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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도서] 여름의 빌라

백수린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이십대 초반에 그녀는 계단에서 헛발을 디뎌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자주 휩싸였고 또 그만큼 자주 계단 앞에 걸어가는 사람을 그녀가 밀어 넘어뜨릴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 폭설, 126p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 199p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질 떄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 201p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고 닿고 싶은 마음의 크기와 그 모양이 단 1%라도 훼손되지 않고 그쪽으로 그대로 온전히 옮겨갈 수 있도록. 전하고 싶은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바람은 더더욱 간절했다. 기대와는 정반대로 내 마음이 전혀 다른 색깔로 닿는다거나 아예 닿지도 않고 튕겨져 나온 일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 요즘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말과 글로 분명히 담아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당신이 하는 말이 분명하게 나에게 들어올 때면 나 역시 그 힘을 받아 정확하고 솔직한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절로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백수린 작가가 <여름의 빌라>에서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던 것 같다. 8개의 단편은 모두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탄생했지만 결국 작가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목도하고 있듯이 이해는 오해로, 사랑은 혐오로 너무 쉽게 상해버리고, 그런 생각들을 하면 어둡고 차가운 방에 홀로 남겨진 듯 슬프고 또 무서워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고, 이 소설들 역시 그런 믿음 속에서 썼을 것이다.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므로.

/ 작가의 말

 

책에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관계가 속절없이 망가지거나, 이미 망가져버린 관계를 뒤늦게 마주하기도 하고, 관계로 인해 '내'가 망가지기도 하는 등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와 그 결이 조금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덮고 보니 특이하게 느껴졌던 점은 망가짐의 끝을 마주하는 인물들의 마음이 마냥 '슬픔'으로만 가득차지는 않았고, 그래서 그 인물이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결말 역시 '그리움'만으로 남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황예인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끝나버린 인간관계를 두고 회피"하는 것이 이토록 쉬운 이 시대에서, 인간관계에서의 단절과 이별이 주는 고통이 "드넓었던 나의 세계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순식간에 줄어들어버리는 것"과 같을지라도, 책 속의 인물들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마치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책을 읽는 동안의 나는 소설 속 인물처럼 관계로 인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고 있던 와중이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기는커녕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라 나를 무너지게 했다. 마냥 슬펐다기보다, '이게 뭔데 나를 무너지기 해."라는 절망이 더 힘들었다. 경험을 통해 깨우치고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당장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까진 안됐었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피하거나 안주하는 대신 슬픔에서 잠시 머물다 끝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이자 분투라는 것. 그 여름 시끌벅적했던 나의 고군분투 속에서 백수린의 소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부족했던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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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심한블로거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피하지 않기"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우수 리뷰어 선정 축하드립니다~~!!

    2022.08.30 15:2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목연

    책을 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0630alswn 님이 말씀하신 이 글이 묘하게 인상에 남네요.

    "이십대 초반에 그녀는 계단에서 헛발을 디뎌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자주 휩싸였고,
    또 그만큼 자주 계단 앞에 걸어가는 사람을
    그녀가 밀어 넘어뜨릴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 글에서 '그녀'를 '나'로 바꾸고,
    '계단'을 '삶'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나는 삶에서 헛발을 디뎌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자주 휩싸였고,
    또 그만큼 자주 삶의 앞에 걸어가는 사람을
    내가 밀어 넘어뜨릴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찌 20대뿐이겠습니까?
    30대나 40대의 삶에서도 휘청거린 적이 많았고,
    누군가를 밀어버리거나 밟고서 앞서고 싶은 충동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제력이 생기더군요.
    내가 누군가를 밀치거나 밟으면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해 줄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내가 잠시 참고 누군가를 배려했다면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알아채거나 느끼고,
    나의 위기 상황에서 그도 배려하거나,
    최소한 멈칫하더군요.

    상대가 절대적으로 타도해야 할 최악이 아니라면,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이라면...
    인정을 베풀자...측은지심을 갖자...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고 할까요.

    소개해 준 글 대부분이
    인생의 어떤 장면을 비유한 듯해서 여러 번 읽어보았습니다.
    책 자체가 의미 있는 책이라는 의미겠지요.

    작가와 출판사에게 도움이 되는 훌륭한 리뷰를 쓰신 마음에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2.08.30 16:04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thkang1001

    0630alswn님! 이주의 우수 리뷰에 선정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의 중요함에 관한 유용한 내용의 책을 소개해 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책을 많이 소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2.08.30 18:35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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