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스위트 투스

[도서] 스위트 투스

이언 매큐언 저/민승남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내 생각에 작가들만이 늘 삶과 허구를 혼동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나는 타고난 경험론자였다. 작가들은 사실인 척해서 돈을 벌며, 그들이 지어낸 것을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적절한 곳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실제 세계를 이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이 지닌 한계에 대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언쟁을 벌일 것도 없고, 변장을 한 채 상상의 경계를 넘고 다시 넘는 듯 보여서 독자에게 불충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한 책들에는 이중첩자가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118쪽)

 

 

세리나 프룸은 영국 정보부 MI6에서 작가 톰 헤일리를 '관리'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실젤로 냉전시대에 CIA는 무수한 문예잡지들과 예술가들을 지원하면서 문화적인 전쟁을 펼쳤다. 세리나 프룸은 냉전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작은 체스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작'으로 만난 톰과 세리나는 곧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문학이라는 커다란 교집합을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도 피가 뜨거운 청춘이었다. 냉전 시대를 다룬 이언 매큐언의 다른 소설 <이노센트>의 설정과 비슷하다. <이노센트>가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삼은 다소 무겁게 설정된 것과는 달리 이 소설은 문학을 매개로 삼은, 가독성 높은 첩보물이다.

 

 

"나는 트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내가 알고 있는 삶이 책 속에 재현된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삶이 트릭 없이 책 속에 재현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308쪽)

 

 

첩모물의 외피를 빌린 이 소설은 '사랑'이 지닌 '거짓'과 '환상'을 겨냥한다. 사랑은 대개 착각과 환상으로 시작된다.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환상에 상대를 대입한 다음에 그 사랑을 정당화시키고 견고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덧씌운다. 어긋날 때마다 거짓으로 균열을 땜질하고 사랑의 서사가 붕괴되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세리나는 톰에게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얘기하는 순간 사랑의 정당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톰 역시 세리나를 속이고 있었다. 서로의 거짓을 토대로 삼은 사랑. 악의를 지닌 거짓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거짓을 피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 앞에는 '나의 환상 안에서'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으니까.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거짓의 정당성을 제공하지만, 시대적인 배경을 제거해도, 이 소설은 사랑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우화처럼 읽힌다.

 

 

"이제 그를 에워싸고 소유하는 느낌은 거의 고통과 같았다. 내가 느껴본 최고의 감정이 모두 모여 견딜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끄트머리를 이룬 듯했다." (405쪽)

 

 

환상에 균열을 외면할 수 없을 때 갈등은 시작된다. 연인들의 갈등은 대개 자신의 결여를 상대의 결여 탓으로 위장하는 기만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이 쓰는 문학작품이 아닐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는 자신이 설정한 서사에서 어긋나는 상대를 허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신 역시 상대의 서사 요건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잊은 채. 이런 어긋남이 드러나는 시점은 대개 하나의 이야기가 붕괴되고, 그 실망감으로 시작된 다음 이야기(사랑)를 쓰는 과정에서 자각하게 된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여기서 대다수는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범속한 작가와 비슷한 행로를 택한다. 타인의 결여로 자신의 결여를 정당화시키는 행위는 점차 익숙해지고 처음 겪었던 고통은 희미해진다. 그렇게 사람은 조금씩 이기적으로 늙어간다.

 

 

"그는 나의 프로젝트, 나의 일, 나의 임무였다. 그의 예술, 그의 작품, 그리고 우리의 연애는 하나였다. 그가 실패하면 나도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했다ㅡ우리는 함께 성공할 것이다. "

 

 

잘 쓴 연애소설은 대부분 회고담의 형태를 취한다. 거짓과 환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후에야 우리는 뒤늦게 이야기를 완성한다. 지난 사랑이 교훈이 되어 다음 사랑의 서사가 잘 이어지길 바라지만, 그 바람은 대부분 실패한다. 처음보다 두번째가 낫고, 두번째보다 세번째가 더 나아지는 우상향의 그래프는 없다. 그것 역시 물질적 축적을 강조하는 세상이 주입한 환상에 불과하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늘 무방비한 상태에서 사랑의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극적이며 필연이라고 믿었던 상황 역시 환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준다. 이언 매큐언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인간의 오류'에서 비롯된 풍경들이 그려진다. 그러다가 점차 연애 소설로 나아간다. 이 전개는 아주 탁월하다. 인간의 오류로 구축된 그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인간에 대한 실망이 누적된다. 후기의 연애소설들을 적으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숱한 오류와 모순에도 인간은 사랑이라는 것을 한다. 오직 그것만이 인간이 자신의 오류와 결여를, 환상의 허약함을 깨닫는 유일한 길이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