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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는 예수 교회

[도서]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십일조에 대해서 소설가이자 목사이기도 한 조성기 씨가 십일조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고 그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십일조의 유래 중 성경에서의 유래라는 내용에서 기독교에서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일 바친 아브라함의 행위를 십일조의 기초로 잡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소산의 10분의 1이 아니라 전리품의 10분의 1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며, 전리품의 10분의 1은 모세 오경의 전통적인 십일조 개념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한다.


그 책의 저자인 조성기는 신약에서도 무서운 책망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다하더라도 사랑은 버렸다고 하는 말씀에서 십일조의 긍정을 찾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십일조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움에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성장 최고의 논리에 근거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교회 건물이 커지고 신도 수가 많은 것이 자랑이 되는 시대이니 말이다. 그 안에서 제대로 믿는 신도가 많아야 하고 양보다 질을 추구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십일조를 설사 낸다고 해도 특별회계를 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던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를 위해서 써야할 것이다. 그 십일조로 교회를 짓는 일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던 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부총리를 역임한 바 있고 장로인 저자 한완상이 쓴 이 책의 제목부터 특이하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니. 하지만 맞는 말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 갈 곳이 없다고 서럽게 울지 않겠는가. 생전에 머리 둘 곳조차 없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서럽게 하는 한국 교회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교회인지 반성해야 한다.


기독교가 교리와 율법, 제도와 관행에 매여 있어 은총과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바람직한 종교는 신자의 실존적 고뇌를 덜어주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도, 역사와 사회구조를 보다 맑고 밝게 변화시키는 용기와 결단으로 인도합니다. 개인의 평안과 공동체의 평화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기 위해서 종교는 항상 자기반성과 개혁으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104쪽).


음악을 듣는 것처럼 교회를 다니는 것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서 대접을 받는지 의문스럽다. 헌금 명부를 보면서 그 명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과연 목사들은 그 생각을 해보았는지 묻고 싶다.


주요 개신교 교파마다 세계 제일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터에, 한국 기독교를 ‘개독교’라 폄하하고 개신교 성직자를 ‘먹사’로 희화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고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안티 기독교의 온갖 비난과 질책은 한국 개신교회를 향한 이 시대 ‘돌들의 외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역행하는 교회가 불러일으킨 자업자득의 결과 같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분노하기에 앞서, 왜 한국 교회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진솔한 자기반성을 먼저 해야 합니다(6-7쪽 저자의 머리말에서). 저자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예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를 알고 예수를 따르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예수따르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리와 신조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사람(예수믿으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교적 선민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들의 하나님을 배타적인 신으로 믿고 싶어 합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그 팔이 안으로만 굽으실까요? 온갖 사이비 종파주의자들이 굴을 파거나 숨어 살면서 종파적 이기주의를 극대화하는 것도, 그들의 하나님이 종파적 신이기에 그 팔은 항상 안으로만 굽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41쪽). 그래서 제대로 믿지 못하면 선민의식만 강해지고 문자주의만 강해져서 무조건 나만 옳고 타인은 싫다고 하게 되는 것이리라.


강제로 땅을 빼앗긴 아픔, 자기들 지역에 들어와 좋은 언덕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 정착 마을이 주는 아픔, 소수 유대인 정착촌의 안전을 위해 인위적인 장벽이 위압적으로 설치되어 팔레스타인 주민의 자유이동을 제한하는 데서 오는 아픔. 이런 삼고三苦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면서 저의 가슴은 조용히 떨리고 있었습니다(54쪽). 과연 어떤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2천 년이나 세월이 지난 뒤에 이게 내 땅이다, 그것도 누가 나에게 그 땅을 가지라고 했다는 말을 한다고 하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바로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만 옳다고 했지만 이제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사랑을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우리도 명사로 살지 말고 사랑의 동사로 살자고 하면서 더 나아가 예수가 바로 동사라고 한다. 사랑이 명사가 되면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사랑하라고 하게 된다. 사랑받으려면 먼저 남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중요하고 그것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동사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일지 이승헌은 깨달은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한다. 불교에서 소승불교가 대승불교보다 못하다고 배운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그래도 종교가 필요하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종교를 가지라고 한다. 종교인은 겸손과 죄의식이 있다는 점에서 비종교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100점짜리라고 생각하니 겸손이 없다. 반면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80점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님이든 어떤 분이든 절대자는 100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겸손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죄의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의식이 별로 없다. 나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은데 왜 내가 조금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가져야 하느냐면서 오히려 기고만장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래도 죄에 대해 회개를 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죄를 덜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가 없는 사람은 종교를 가져야 하고 종교를 가진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믿으미가 아닌 따르미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복적인 무당을 믿는 종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만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수단으로 회계사가 직업이고 회사에 가면 글쟁이고 집에 오면 종교인이다.


내가 생각하는 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깨달은 분들의 사례로 부처, 공자, 예수, 석가, 노자, 장자 등을 들 수 있다. 나도 깨달으면 그런 경지로 갈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인류는 형제인 것이다. 자연도 인간과 동일하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종교 때문에 싸울 일은 없다고 본다. 너와 내가 형제인데 왜 싸우는가.


복음서란 가장 일찍 기록된 마가복음도 기원 70년 후에 씌어진 것이며 요한복음도 서기 10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그때쯤에는 예수가 신격화되어서 그 말씀과 행동이 절대적인 것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출구를 찾았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은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 이 복음서를 쓴 기자가 자기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동환에게 새로운 전망을 안겨주었다(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이란 책의 322쪽).


나는 기독교 경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내용 중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중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이며 이를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용도로 쓰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인용한 김형수의 책에서는 앞의 내용도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 복음서 기자의 자기고백 정도로 나와 있지만, 나는 앞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보고 뒤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를 공인한 이후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조건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며,  이로 인하여 개신교가 앞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유럽의 어느 곳처럼 황폐화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성장주의, 배타주의, 문자주의 등은 원래의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쳤던 내용이 아니라 권력을 잡은 정단(나는 이단의 반대로 이런 말을 쓰고 있다.)들이 만든 교리에서 발생한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깨달은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내가 혹시나 목회를 한다면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 중의 하나이다. 종교가 그 원래의 뜻을 발현하여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것’처럼 위로와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미 다른 종교가 깊이 뿌리 내려 그곳 사람들의 가치 속에 스며들어 있는 지역에서, 수천 명의 한국 대형교회 신자들이 몰려다니며 그들을 개종시키려려고 하는 행위는 종교적 교만의 수준을 넘어 종교적 폭력에 가까울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까? 특히 회교 근본주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곳에서 기독교 선교(예수 선교가 아닌) 행위를 하는 것은 신판 십자군 전쟁을 하자고 무모하게 덤비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모른다는 말입니까?(61쪽)


무릇 여행이란 자기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고 조용히 그러나 깊이 반성해 보는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값진 인생 경험입니다. 여행에서 자기 성찰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여행의 참 맛과 멋을 모르는 사람이지요. 인생을 하나의 여행으로 본다면, 사람다운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새롭게 깨닫고 배우면서 앞날을 더 밝고 맑게 만들어갈 줄 압니다(63쪽).


험한 세상에서 갖은 곤욕과 수모 그리고 가난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고 살았으나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으로 이 괴로운 세상을 끝까지 아름답게 바라보며 살다가 죽은 시인 천상병 씨가 생각납니다. 그의 시 귀천은 어린이의 마음을 투명하고 가슴 시리게 전달해줍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에서 하늘을 하나님나라로 바꿔서 다시 읽어 보십시오. 어른이 되어도 아이로 돌아갔던 천상병 시인은 이제 하나님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232-233쪽).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야말로 우아하게 지면서 마침내 모두 함께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새로운 삶, 멋있게 짐으로써 함께 이기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오늘날 개신교 지도층이 가장 이해를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한국이나 구미에서나 크게 다를 바 없어 더욱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 원인은 주로 물리적, 물질적 힘에 의한 승리, 그에 따른 평화를 오랫동안 숭배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에서 교회 지도자의 주류는 승리주의 가치를 기독교 본연의 가치로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적 기반이 강한 교회이기에, 힘을 통한 승리와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역사적 예수 운동의 원래 의도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교인일수록 예수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인 양 착각하는 듯합니다. 하기야 성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는 데 일관성이 부족한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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