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랍비 예수

[도서] 랍비 예수

로이스 티어베르그 저/손현선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랍비 예수 시리즈’의 1편 격인 [랍비 예수]를 읽었다.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다. 이전에 3편 격인 [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를 읽고 너무 좋아서 2편 격인 [랍비 예수와 함께 성경 읽기]를 마저 읽었다. 영화에서 흔히들 말하는 “1편보다 좋은 2편은 없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완전히 서구인들이 느끼는 성경 해석상의 문제점 들을 나열해 놓은 듯했다. 그때도 감상평으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1편 격인 이 책을 읽어보았다. 처음 아이디어를 얻은 책이라 그런지 참신하고 좋았다. 특히 예수님이 유대인이었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신선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이 다 좋았지만, 지면상 다 나열할 순 없고 특히 감동을 주었던 내용을 각부마다 하나 정도 소개한 다음 전체 느낌을 말해 보겠다.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에 능통하셨고 그 내용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런 이유로 히브리어가 중요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히브리어 맥락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뇌 속에서 진행되는 정신 활동 너머로까지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듣기’만 할 게 아니라 주의하고 반응하고 순종해야 한다. (p.53).” 본문의 말씀이다. 또한, 예수님이 상대한 유대인들은 ‘쉐마’를 중요시했고 예수님 역시 ‘쉐마’를 중요시했다. 우리는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쉐마)는 구절을 건성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이 구절에 대한 유대 적 해석은 인생 내내 매 순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일, 취미, 스포츠, TV, 최신영화 간간이 하나님을 위한 짧은 순간을 끼워 넣겠다는 우리의 문화적 통념과는 사뭇 반대된다. (p.62).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볼 일이다.

둘째 유대인에게는 말의 중요성이 굉장히 강조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대인에게는 말의 범위가 더 넓었다. 적극적인 말뿐만 아니라 소극적 말까지,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말을 수긍한다는 표시까지도 다 말의 범위에 넣고 있었다. 아니 이보다 더 광범위하다. 본문의 예를 들어본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말씀과 행위 ‘둘 다’ 필요하다. (p.114). 만일 당신의 허물이 드러나는 게 가슴 아프고 수치스럽다면 남의 허물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선 안 된다. (p125). 우리의 언어와 의도는 하루에 몇 번이나 일치하는가? 온갖 소소한 방식으로 남을 기만하는 일이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p.132). “만일 당신이 더 그리스도를 닮고 더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더 유익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려면 내일이 있어 무엇하겠는가?” (p.179) 정말로 말에 대하여 철저한 민족이다. 이러한 정신을 어려서부터 배워온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시편 34장 12~13절의 말씀을 인용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p.122)

셋째, 3부에서는 두 가지의 내용이 뇌리에 남아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여기에 대한 해석이 무릎을 치게 만든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아로새긴 대상은? 그렇다.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삶을 바쳐야 한다.’ (p.208) ‘헤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음을 본다면 이웃을 사랑하게 될 뿐 아니라 원수조차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p.218) 은 욥의 고난에 관한 내용이다. 분명 동방의 의인이라고 소개된 욥이었는데 엄청나고도 이유를 잘 모르는 고난을 받았으니 황당했으리라. 이에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하지만, 욥기의 끝부분까지 하나님은 잠잠하셨다. 그 대답은 본문에 나왔다. ‘하나님이 욥의 질문에 답하시는 것보다 아인슈타인이 아메바에게 상대성 원리를 설명하는 일이 더 쉬울 것이다. 욥이 알고자 했던 것은 자기 이해력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문제였다.’ (p.242) 우리가 하나님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마다 욥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모을 낮춰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지 우리가 어떻게 자신하겠는가? (p.244)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찬란한 승리인 동시에 끔찍한 심판임을 종종 망각한다. 하나님의 자비로 그날이 미뤄진 것이다. (p.248)

 

이렇게 책장을 덮으려니 구약성서의 중요성이 새삼 다가온다. 사실 지금까지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신약성서는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신 것으로 구분하여 알고 있는 듯했다. 참 단순한 이분법적인 생각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신약성서에 더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면 끝인 줄 알았다. 하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그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겠다. 그래서 기드온 협회 같은 곳에서도 성경을 보급할 때 신약성서가 먼저인가 보다. 또한, 선교를 시작할 때 복음서 중 하나를 먼저 소개한다는 것도 많이 들어보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싶다면 반드시 구약성서가 필요하리라.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오셨으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니까. 유대 공동체에서 성장하셨으니까. 유대인을 대상으로 가르치셨으니까. 예수님도 훌륭한 랍비셨으니까. 다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랍비로만 생각했나 보다. ‘메시아’이신걸 모르셨나 보다.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가 나누어진 것을 보니까. 암튼 기독교인의 뿌리를 잊지 말고 구약성서도 더 열심히 살펴보고 히브리어 사전도 필요할 것 같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