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성별은 인류가 만든 위계와 불평등 중 가장 오래된 제도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 때문에 제도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문화, 무의식, 인간 몸의 일부로 체화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차별적 제도, 인간의 모든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모델이 된 것이다. 계급, 연령, 인종적 소수자, 환자,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억압, 착취, 혐오는 남성이 여성에게 한 행위를 기준으로 삼고 '배운' 것이다.
자기 경험과 기존 인식이 일치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 질문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삶은 편할지 모른다. 의문을 갖는다 해도 자기 변화는 어려운 일이다. 반면 사회적 약자, 비주류(인구상으로는 절대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상과 기존 세계관이 불일치 혹은 격렬하게 불일치하기 때문에, 의문을 갖기 쉬운 조건에 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그 역사성을 깨닫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보인다. 이 상태에서 공부를 하면 일취월장의 성장과 변화를 맞을 수 있다. 자신이 여성임을 자각하는 것은 성별 권력관계의 역사성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양성평등을 주장하기 전에, 남성과 여성이 만들어진 목적과 방식을 먼저 알게 된다. 이는 권력의 역사와 세계사의 기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페미니스트들도 다양해졌다. 그것이 여성 간의 차이든, 인식의 문제든, 지향의 차이든, 소수자 셀렙에의 욕망이든, '취향'의 차원이든, 주로 사용하는 언어(매체)의 차원이든, 이제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남성'과 싸운다기보다는 그보다 더 복잡한 조직된 무지, 합의된 비윤리, 페르소나를 던져버린 뻔뻔한 얼굴들,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남긴 폐허 위에서 당황하고 있다. '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성실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같은 삶이기를 바란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115-116p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 - 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