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서 모르던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 세상은 각양각색이어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세상 중 하나가 음악의 세계였다. 전두환이 정권을 막 잡은 그 시절엔 아직 금지곡이 넘쳐났다. 한국 음악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음악도 금지된 게 참 많았다. 입학해서 배운 인터내셔널가 같은 곡은 공개적으로 들을 수 없었다. 당장 끌려갈 테니.
그리고 그때는 소니의 워크맨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소문은 들었지만 제품을 판매하는 곳은 드물었다. 한국에서 일본 가전제품을 정식으로 구입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당시 큰 금액이었던 20만 원 가량을 주고 워크맨을 구입했다. 이제 카세트 테이프 확보가 다음 과제로 등장했다. 일반 노래야 공 테이프를 사서 음악방송에서 나올 때 녹음하면 되는데 문제는 금지곡들이었다. 알음알음 해서 아는 이로부터 음원을 확보해 테이프에 옮긴 곡들 중 하나가 칠레의 민중 노래로 알려졌던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단합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F_9FEx7ymg
우리나라의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칠레 인민들에게 작용하던 곡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나왔던 이 노래는 피노체트의 정권 장악 이후 대표적인 저항 음악이 되었다. 그때 헤드폰 쓰고 참 많이도 들었다. 들으면 가슴이 뛰고 막 광장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테이프는 늘어지고 이런 노래나 운동에 대한 관심도 식으면서 이 노래를 오래 잊었다.
음악에 대한 나의 관심이 거의 고전음악 쪽으로 이동해있던 1990년대 말 ―이때쯤이면 CD가 보편화되던 시기다― 에 당시 속주와 뛰어난 테크닉으로 인해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화제를 불러일으키던 Marc-Andre Hamelin(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새로운 음반을 냈다. 음반의 제목은 The 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 즉 단합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였다. 설마 그럴 리가 & 혹시나 하면서 구입한 CD를 CD Player에 구동시키자 흘러나오는 첫 곡, 주제 음악을 들으니 진한 감동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렇다, 미국인 Frederic Rzewski ―제프스키로 발음한다고 한다― 가 작곡한 이 변주곡은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의 멜로디를 주제로 했다. 첫 곡과 마지막 곡은 주제를 담았고 중간의 36곡은 그 주제에 대한 변주로 이루어져 총 38곡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와 연결되었다. 물론 이제는 원곡을 듣기 보다는 제프스키의 작품 형식으로 듣기를 즐기는데 많지 않은 이 곡의 녹음 중 몇 가지를 구비해서 섞어가며 듣는다. 아믈랭을 위시해서 Ursula Oppens, Ralph van Raat, Igor Levit 등까지. 이들 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음반은 가장 최근에 나온 Igor Levit의 녹음이다. 아믈랭은 빠르지만 정이 덜 가는 연주이고 우르술라 오펜스는 지나치게 소박한 느낌을 주는 연주이며 랄프 반 라트는 다소 가벼운 인상을 남기는 연주이다. 그에 반해 레빗의 연주는 곡 안으로 사람을 확 잡아당기는 느낌을 준다. 주제부를 연주할 때에는 눈물겹고 변주부를 연주할 때에는 심장이 조여 온다. 강철 같은 곡을 재단하는 다이아몬드 같은 연주다.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향점은 젊게 만들 수 있는 음악과 연주다. 과거와 연결되는 음악으로서만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물러서지 않겠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음악이기도 하다.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잘 연주되는 곡도 아니지만 나는 이 곡을 사랑한다.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면 이고르 레빗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광고가 자꾸 끼어들어서 불편하지만 그런 불편을 감내하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 점에서 CD가 편리한 면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UGSjBUusI&list=OLAK5uy_lE5I-H_DuDoUM-5M5lWfGAnWTEJQeEsqs&index=1
P.S. 조금 다른 얘기지만 Igor Levit이 연주한 바흐 작품들이 절창이니 모두 찾아서 들어보시기 바란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파르티타 전부 다.
https://www.youtube.com/watch?v=7F_9FEx7ymg
https://www.youtube.com/watch?v=5-UGSjBUusI&list=OLAK5uy_lE5I-H_DuDoUM-5M5lWfGAnWTEJQeEsqs&inde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