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5일의 JTBC 뉴스룸 인터뷰 장면이 기억난다. 앵커 앞에 앉아서 당시 충청남도 도지사이며 이미 유력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인구에 회자되던 안희정이 행한 성폭력 사실을 담담하고 차분하게―당시 방송 인터뷰를 볼 때 가졌던 느낌이다― 털어놓던 김지은님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까, 방송을 보면서 저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저 모습조차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약간의 걱정도 들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터뷰 내용은 우리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면서 미투(Me too, 나는 고발한다) 열풍이 세차게 몰아치던 상황이었다.
그 후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계속 기각될 때 한국에 사법 정의란 게 있는지 의심스러웠고 가해자 측이 언론 등을 통해 펼치는 마타도어를 볼 때에는 일말의 양심도 없는 족속들이란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다른 SNS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트위터에서는―적어도 내 타임 라인에서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요동치고 있었다. 당연히 유죄라고 여겼던 가해자에게 내려진 1심의 무죄 판결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위력은 있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는 판사의 말은 ‘탁 치니 억 하더라.’는 헛소리를 연상케 했다. 다행히 2심과 대법원에서는 가해자의 유죄를 인정하여 2019년 9월에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훨씬 더 오래 감방에 있게 하지 못함은 여전히 아쉽다.
이 책은 그 김지은님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기록물이다. 책의 많은 부분은 김지은님의 고백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방송 인터뷰 내용이나 탄원서 등의 기록물도 상당수 포함되어있다. 2019년 3~4월에 쓴 일기 형식의 글모음도 수록되어 그의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2018년 3월 5일의 방송 인터뷰를 촉발한 계기가 된 그해 2월 25일의 상황으로부터 기록은 말문을 연다. 왜 그리고 어떻게 미투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인터뷰 직전까지 어떤 압력이 가해졌는지 긴박하기까지 한 상황을 보니 그가 발휘한 용기가 새삼 놀랍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과 맞서기로 함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음을 각오한다고 해도.
방송 인터뷰 이후 김지은님은 갈 곳조차 없는 처지가 된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가난한 노동자였고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가 상대하는 인물은 권력 그 자체였으며 힘을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선을 대고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있었다. 가해자 측은 사실을 왜곡해서 피해자를 대상화하고 모욕하고 고립시켜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김지은님은 자신의 환경과 성장 과정을 밝힌다.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장녀. 화목한 가정이지만 경제 형편은 취약했다. 비정규직 공무원이 되고 계약 연장을 위해 스펙을 높이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던 노동자 김지은은 우연한 기회에 안희정 캠프에 합류한다.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안희정의 수행비서로 선발되는데 그 이전에는 여성이 수행비서로 뽑힌 적이 없다고 한다. 수행비서의 일은 노예보다 못하다. 그가 한 일을 읽으면서 너무 놀랐다. 하루 24시간을 다 쏟아도 모자랄 것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도 독촉 전화를 해서 대리운전 같은 일을 시킨다. 가해자는 수트핏이 안 산다고 정장 안에는 지갑도 넣지 않고 다녀서 수행비서는 온갖 짐을 잔뜩 들고 다니며 보좌해야 했다. 나열하기도 힘든 수많은 사례는 마치 전제군주의 지랄 버라이어티처럼 보였다. 거기에 언제든 그를 자를 수 있는 권한과 평판을 좌지우지해서 적어도 그 바닥에서 누군가의 밥줄을 끊을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기업에도 위력은 존재하는데 김지은님이 겪은 위력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심을 다해 가해자를 보좌하려 했다. 직장상사였으니까. 그랬던 그를 가해자는 강간했다. 민주, 정의, 인권 등으로 분칠한 가짜 진보주의자의 민낯은 성폭력범, 거짓말쟁이, 협잡꾼, 권위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가해자의 가족과 측근들의 2차 가해로 김지은님의 정신과 육신은 점점 망가진다. 가해자의 변호사는 법정에서 그를 조롱하며 무너지기를 부추긴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으로 인해 그는 집안에 자신을 가두고 외출을 최소화하고 통조림 음식으로만 하루 한 끼를 때우기도 한다. 자살을 생각하지만 자신이 사라지면 유일한 증거까지 없어져 가해자가 자유로워질 것을 우려하여 실행하지 못한다. 내가 이 모든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김지은님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버텼다고 고백한다. 그의 지인들이 낸 탄원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 이토록 정직하고 성실하며 좋은 사람을 괴롭힌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지만 김지은님은 꺾이지 않았다. 움츠러들다 못해 자해와 자살을 생각할 만큼 피폐해진 정신과 육신을 추슬러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나서는 그의 모습은 감동을 준다. 그 일어섬이 혼자만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대해준 모든 이들의 지지에 힘입었음을 고백하고 감사를 표하는 글을 읽을 때에는 따스함이 심장을 적신다. 에필로그의 타이틀은 ‘살아서 증명할 것이다.’이다. 그는 그 증거가 되었다.
나는 진실이 항상 승리한다는 듣기 좋은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럴 때도 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장막으로 가려져 사라지는 진실은 많다. 승리할 때조차도 그 승리를 쉽게 얻지 못하고 어렵게 쟁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테다. 힘을 갖지 못한 자들의 진실은 자주 그렇게 덮여버리거나 일부만 밝혀진 채 버림받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연대連帶가 중요하다. 한 사람은 작고 약하지만 모인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으며 외롭지도 않다. 기러기가 떼를 지어 긴 거리를 날아가듯 우리는 우리로 연대하여 세상의 불의에 맞설 수 있다. 그럴 때 진실은 더 많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좀 덜 어렵게 승리할 것이다. 그럴 수 있음을 노동자 김지은이 보여주었다. 그가 책에 서명하면서 쓴 글은 '용기와 연대'이다.

김지은님의 글은 명징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괴롭고 힘든 이야기도 너무도 생생하고 적확하게 전달해서 기록의 가치를 높였다. 많은 분들이 이 선명한 기록을 읽으면 좋겠다. 이 기록은 더 많이 읽혀야 한다.
그리하여 책에 담긴 내용을 이야기하고 주변에 퍼트려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고 또 그런 구조에 기생하는 인간이 사라진 세상을 만드는데 힘을 모으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노동자 김지은이 노동의 현장에 다시 설 날을 기대한다.
P.S.
출판사가 SNS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김지은님의 서명이 포함된 책을 받았다. 당첨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당첨되기 하루 전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같은 책을 사서 읽던 중이었다. 이제 먼저 구입한 책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있다. 그의 서명이 든 이 책은 소중히 간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