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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들 아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라 함은 생물학적 F1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사회 질서와 권위를 대변하는 존재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일탈과 독립을 꿈꾸는 자 말입니다. 그리하여 반항하던 아이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든 아버지의 영역, 그 두터운 막을 뚫고 마음껏 날개를 펼치고 싶은 의식을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터널을 어떻게든 통과하고 난 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그만 어린 시절의 그 간절했던 열망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이지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어른들의, 그것이 아버지건 혹은 학교라는 조직체의 교사건, 영역 안에서 다시금 아이들은 목말라 할 수밖에 없게 되고요. 이렇게 가슴 저린 연쇄가 어쩜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니 먹먹해집니다.

김해원의 <열일곱 살의 털>은 이런 아들과 아버지의 숙명적인 관계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답스런 훈계조가 아닌 것은 물론, 요즘 감각에 맞는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에다가 통통 튀는 문체 속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곁들여 살갑고 생생하게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 것은 유난히도 쩔쩔맸고, 겨우겨우 그 시절을 견뎌내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남의 얘기로 읽히지 않았거든요. 나의 그 시절을 다시 불러내어 곱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기 아프게 청소년 시절을 겪다 결국은 아버지의 굴레에서 일탈해버렸던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남겨둔 채 밖으로 겉돌기만 했지요. 그런 그가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들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자말자 난처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자기 아이가 17년 전 바로 자기 앞에 가로놓여 있던 것과 같은 문제로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 일호, 범생이였던 일호는 어느 날 자신이 너무 무르거나 단단하여 힘 조절을 잘 못하는 어정쩡한 아이임을 자각합니다. 그리하여 심정적으로 뭔가 분발의 계기를 찾고 있던 차에 예기치 않은 장면을 목격하고 맙니다. 체육복을 입지 않고 두발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생의 머리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체육교사 매독을 보고 내면의 꿈틀거림을 느낀 것입니다. 그 순간 “머리칼은 네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다. 머리칼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섬광처럼 스치면서 ‘이건 말도 안 돼!’라는 속엣 말을 내뱉을 사이도 없이 달려들고 말았지요. 그 사건 이후로 일호는 두발 규정 철폐를 위한 선구적 행동을 펼치는 의식 있는 아이로 변모합니다. 일순간의 분노가 의식을 각성시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의로운 기개를 드러내게 한 것이지요.

이런 일호를 지도하기 위해 학부모를 호출하려고 학생부장 오광두는 전화를 걸게 되고 이를 마침 17년 만에 귀가한 일호의 아버지가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순간 17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겠지요. 다음날 일호와 함께 학교로 출두하면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사과와 함께 자식 가정교육을 제대로 시키겠다고 다짐할 것이라는 교사들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일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30일 정학이라는 중징계가 내려지고, 그리고 일호는 결심합니다. 필 받은 김에 내처 달리자고 말입니다.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이지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싸움이었지만 자부심을 가지라던 할아버지와 단단하게 크라던 엄마, 그리고 싸워서 얻어야 한다던 아버지, 그들이 하거나 하지 못한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고 일호는 자신을 다잡습니다. 땀으로 세상이 다 잠기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펼치겠다고 말입니다.

일호의 할아버지는 국가 시책에는 무조건 순응하는 사회 모범생, 그러나 재개발로 자신의 자산 가치는 늘어나겠지만 세입자들의 신세는 처참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세입자 편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 일호가 정학을 당한 후 일인 피켓 시위를 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지요. 당혹감에 학교장에게 선처를 빌러 삼부자가 학교로 갔다가 할아버지까지 일호의 동지가 되고 맙니다. 비인간적인 교문 지도와 두발 불량자 강제 삭발 광경을 보고 말입니다. 오광두가 아이들의 머리 한가운데를 아무렇게나 바리캉으로 미는 것을 보고 탄식을 하며 할아버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여 폐쇄했던 학교 이발소에서 강제 삭발당한 아이들의 머리를 정리해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 아이들의 뒷머리에 커다랗게 별모양 하나씩을 박아 주었지요. 분개한 교장 선생님의 방문에 할아버지는 수십 년 전 단속에 걸려 머리를 깎이고 이발소에 들른 아이들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 때 항변하던 아이가 바로 지금의 교장일 줄이야. 할아버지는 알아보았지만 넌지시 말만 던질 밖에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한 거지. 어른들도 학생 때는 우리와 똑같았지 뭐. 어른들 중에는 장발 유행할 때 머리 길게 기르고 단속 피해 도망 다니던 사람들도 있고 별 사람 다 있을 거 아냐.”라고 하던 정진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지요.

그리하여 해피 엔드, 두발 규정 철폐에 관한 학운위가 열리고 오광두는 할아버지의 이발소에서 이발을 한 다음 반듯한 손자 두었다고 인사까지 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할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은 난생 처음 세상과의 싸움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과의 싸움에서 오히려 아들 편을 들어주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물론이고요. 그 신선한 경험을 어찌 쉽게 잊겠습니까. 의식이 한 차원 거듭나게 될 밖에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더욱 세입자 편에서 재개발을 반대하며 이발소 영업까지 중단할 지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후련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소설을 즐겁게 읽고 났지만 뭔가 뒷덜미를 누르는 듯한 거북함 또한 떨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아직도 실상은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은 해피 엔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녹록한 게 아니지요. 아버지와 아들 그들의 숙명적인 갈등은 오늘 여기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아버지와 아들 사이건 학교와 학생들 간이건 말입니다.

이처럼 김해원의 <열일곱 살의 털>은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이자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의미심장한 주제를 맛깔스런 문장에 아름답게 녹여내어 우리의 마음결을 후련하게, 한편 심란하게 건드렸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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