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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http://m.ch.yes24.com/Article/View/39237

정태춘은 '뮤지션 그리고 투사'였다. 서정적 포크 뮤지션이자 노래하는 시인의 면모 아래 그의 시선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꿰뚫었고 기득권과 권력자들의 위선과 부패를 형형히 응시했다.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 같은 생생한 스토리텔링부터 2012년 발매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까지, 그의 언어는 사회와 관계했고 역사로부터 탄생했다. 덧붙여 그는 언제나 현장에 있었다. 각종 시위와 집회에서 기타를 들고 저항을 촉구하였으며, 악명 높은 사전심의에 헌법 소원과 불법 앨범 제작으로 맞섰다. 그는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실천하는 뮤지션'이었다. 

 

정태춘과 박은옥의 40주년을 맞아 4월 12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정태춘-박은옥 40주년 : 다시, 건너간다> 기념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같은 공간에서 4월 20일 열린 음악평론가 임진모와 정태춘의 토크 콘서트 현장을 찾았다. '78학번 대학교 신입생 시절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처음 접했다. '서해에서'와 '촛불'이 나온 지도 벌써 40년이다. 사회적, 시대적 해석이 활발하지 않은 한국 음악 시장에서 정태춘의 선 굵은 음악은 결코 흔하지 않다!'며 베테랑 뮤지션의 노고에 경의를 표했다. 치열한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가던 그 날의 현장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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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이 처음 나왔을 때 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했던 이정선, 이장희 등 포크 가수는 정태춘 이전에도 많았지요. 그러나 정태춘의 음악에서 저는 서정적이면서도 일종의 '까칠함'을 읽었습니다. 

 

까칠한 게 맞습니다. 세상을 보는 태도, 삶을 대하는 태도 등 많이 까칠하지요. '까칠하다'의 개념이 저의 본질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까칠한 문제의식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원래부터 '게릴라 유전자'를 가져왔는지,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지금까지 수없이 인터뷰를 해오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나의 까칠한 기질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은 어디서도 받지 못한 질문입니다. 우선 형질상으로 아웃사이더의 특징이 있겠고, 사회와 관계하며 느꼈던 저의 정체성이 또 다른 까칠함을 가져온 거죠. 서울 출신 아닌 촌사람이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데다 잘생기지도 않았으니까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시 짚어보자면 본래 정태춘에게 있는 저항의 기질이 사회적 질서, 주류 시선과 충돌하며 불만과 분노를 더한 것이라고 봐도 될까요. 

 

메인스트림의 제도, 가치 등등을 수용하지 않았죠. 그게 기질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주류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다른 태도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메인스트림에 대한 반발심은 언제나 잠재되어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정태춘의 첫 앨범 뒤 편에 보면 동그란 정태춘의 초상 사진이 있는데, 처음 그 판을 보면서 반항적, 비타협적인 인상을 느꼈습니다. 

 

당시엔 제 사진을 많이 갖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레코드사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던 시대도 아니었고요. 앨범 뒤편의 제 모습은 친구가 고향 평택에서 카메라로 찍어준 사진이었습니다.

 

향후 정태춘의 사회 참여적 메시지와 비교하면 다른 느낌의 앨범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정태춘의 음악 세계를 열어준 자랑스러운 앨범이 아닐까요.

 

그 앨범이 몇 장 팔렸는지 개념도 별로 없었네요 나중에 자체 제작하여 앨범을 재발매했는데, 통상 백만 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짐작할 뿐이지요. 

 

두 번째 정규 앨범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시>도 다시 바라봅니다. 대중적 인기로는 데뷔작에 미치지 못했지만, 아티스트의 갈등과 문제의식을 담은, 진지한 작품입니다.

 

'탁발승의 노래'를 두고 많은 분들이 곡을 쓰기 위해 출가하였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요, 2집은 군 제대 후 레코드사에서 내준 인사동의 허름한 옥탑방에서 만든 앨범입니다. '탁발승의 노래' 역시 인사동 한복판의 허름한 양철지붕 아래서 한여름 웃통 벗고 땀 흘리면서 쓴 곡이지요. 노래를 쓰면서 인물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야기를 쭉 전개하고, 최대한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 집중해서 몰입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풍경이 완성되면 '내가 그 속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임진모 음악 평론가의 '실제로 출가하신 건 아니신가요?'라는 질문에 정태춘은 '마음 속으로는 수 차례 했다'며 웃음을 지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떠나가는 배'의 탄생 배경도 궁금합니다. 정태춘에게 공식적으로 '시인'의 칭호를 내려준 곡이지요. 

 

원래 저는 곡을 쉽게 씁니다. 노래 만드는 게 어렵지는 않아요. 백지 하나에 가사를 적고, 오선지에는 멜로디를 쓰는 식으로 작업하면 한두 시간 안에 곡 하나가 나옵니다. 그런데 '떠나가는 배'는 어느 정도 과정 후에 진도가 나가질 않아서 몇 달 팽개쳐뒀어요. 그렇게 답보 상태였다가 어떤 시인의 <제주도> 산문집을 읽으며 테마를 잡고, 다시 심상을 가다듬었습니다. 

 

곡의 설명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듭니다. 당시 MBC의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신곡을 듣고 평가해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한 분이 '떠나가는 배'를 듣더니 '강남길로 해남길로'라는 가사를 두고 '서울 강남으로 가는 건가요? 전라도 해남으로 가는 건가요?'하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후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곡의 의도를 다시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비극적 서정'에서 중요한 레퍼토리지요. 

 

정태춘과 '사랑'은 좀 멀게 느껴지는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정태춘은 2집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연가 '사랑하는 이에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은옥이 작사를 맡았고 본인이 작곡을 하셨죠.

 

(수줍게 웃으며) 우리 연애할 때 만든 노래입니다.

 

박은옥 씨에게는 첫눈에 반했습니까. 

 

그런 셈입니다. 저보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하던 가수였죠. '윙윙윙'과 '회상'이 나름 잘 맞는 노래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했는데… 결혼을 하게 됐고, 레코드 회사에서도 그 점 때문에 결혼을 미루자고 했었고… 결국은 그 사장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했지요. (웃음)

 

평생의 반려자 입장을 떠나 '타인의 시선'으로 가수 박은옥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전반적으로 노래하는 스타일은 저와 닮았지만, 노래의 전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제게 있어 노래는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자 '내 말을 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와 연결하여 행동하고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박은옥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대에 서서 사람을 만나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죠. 제가 콘서트 무대에서 썰렁한 분위기를 만들거나, 불편한 낌새를 드러낸다거나 하면 박은옥 씨가 항상 뭐라고 합니다 (웃음). 그런 의미에서 박은옥은 '나보다 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박은옥 씨는 '무대에 올라서 노래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란 가치관을 갖고 계신 거군요.

 

그래서인지 콘서트 할 때 선곡을 두고 다투기도 합니다. 1부 정태춘, 2부 박은옥, 3부에서 같이. 이런 식으로 아예 나눠버리기도 하고요. (웃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랑하는 이에게'는 여전히 사랑받는 올타임 베스트 노래입니다. 당대 섬세한 라디오 프로듀서들의 많은 선택을 받았고, 무엇보다 제목이 좋았지요. '사랑하는 이에게 2'가 나오기도 했고요. 이 정도의 인기를 곡 쓰면서 예상하셨나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쓰는 모든 노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서 만든 것이지요.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2'도 후속곡으로 만든 게 아니라, 원래 1번 곡을 녹음할 때 같이 녹음했던 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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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의 거대한 업적으로 사전 심의 제도의 폐지를 빼놓을 수 없다. 노래 발표 전 모든 가수들은 미리 써놓은 가사를 공연예술위원회(이하 공윤위)에 제출하여 수정 및 심의를 받아야 했다. 지금의 시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 억압적 제도에 정면으로 맞선 이가 정태춘이었다. 대중은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을 기억하지만, 공식 기자회견과 불법 앨범 제작으로 제도에 격렬히 저항한 것은 정태춘이었다. 

 

공윤위의 사전 검열에 대해 특히 민감하셨던 이유가 있습니까.

 

첫 앨범 만들 땐 '어떤 음악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막 제대해서 서울 상경한 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만든 음악이었죠. 그런데 공윤위에 가사를 제출했더니 '출처를 밝혀 달라'는 겁니다. 제 가사를 표절로 본 것이지요. '시인의 마을'의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도 안된다고 해서 '생명의 친구 자연의 친구'로 가사를 고쳤습니다. 당시 저는 전업 뮤지션을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수정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서라벌 레코드가 출판사 성음사로부터 출발했기에, 사장님께서 다 고쳐주셨지요. 

 

그 이후에도 계속 가사가 심의에 걸렸습니다. 때로는 소명서를 써서 억울함을 표해보기도 하고, 정 안되면 공윤위에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심의 위원 분들 중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가만히 있는데 유독 작곡가, 음악 하는 분들이 '노래를 꼭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소명을 하면 봐주거나 고치거나 하며 심의를 통과했지요. 계속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공윤위 사무국장과 친분이 생겨서 '정 형, 저랑 같이 고칩시다'하며 가사를 수정했던 기억도 납니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곡들은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이야기 노래 마당'이라는 제목의 소극장 순회 콘서트에서 부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토크 콘서트처럼 관객 분들 앞에서 기타 두 대 두고 공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자리였는데 저에게는 굉장한 활로였지요. 그렇게 참고 참다 '아,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내 노래를 발표해야 한다. 심의를 넘어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심의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지요.

 

심의 철폐 운동의 시작이 그때였군요. 

 

1990년대 초부터 심의 철폐를 주장하고 저항을 시작했죠. <아, 대한민국> 이후 1993년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 역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다시 한번 기자회견을 열고 이 제도의 부정성을 알렸습니다. 결국 불법으로 발표하게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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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이 불법으로 발표한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한국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명반이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아, 대한민국'을 보라. 2019년의 20대 청년도 이 노래를 들으며 '세월이 흘렀는데 어쩜 이렇게 세상이 똑같지?'라며 한숨을 쉰다. 정태춘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교육방송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혁명을 꿈꾸고 있다...'. 그 어떤 뮤지션도 라디오에 출연해 '혁명'을 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투쟁의 기지를 40년간 이어가는 뮤지션은 정태춘이 유일하다. 그는 국보 뮤지션이다. 

 

결국 공연 사전 심의 제도는 1996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며 6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벌써 20년이 더 지났네요. 

 

흥미롭게도 저의 첫 앨범에 대해서는 정부 당국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내며 기자 회견도 하고, 불법 발매를 할 땐 바로 기소되었습니다. 헌법소원을 청구했죠. 이후 6년이 지나서야 국회에서 개정안이 만들었다고 문화관광부(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나와달라고 합니다. 사무실에 전화기 하나 갖다 놓고 '국회 상임위에서 이 안을 두고 최종 논의를 하고 있다. 오케이 한 말씀만 해달라...'고 하기에 법 조항을 봤더니 이게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 심의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죠. 마지막까지 정부는 노래에 대한 심의를 유지하고 싶었던 겁니다. 소위 '국민들의 문화생활에 어떻게든 개입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2012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향한 환대를 보며 정태춘과 박은옥을 기다려온 분들이 이렇게 많구나, 감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그냥 노래가 속에서 우러나오니까 썼어요. 운도 좋았고, 마음이 움직이니까 몸도 같이 움직였어요. '이것은 아니다'라 생각한 건 자연스럽게 '아니다'라고 말했고요. 그렇게 제 소신과 내면의 생각대로 창작하고 행동할 수 있던 것도 행운이에요. 

 

말씀하신 대로 정태춘의 음악 인생 40주년을 맞아 다양한 플랫폼이 만들어졌습니다. '정태춘 박은옥 데뷔 40주년 기념 사업회'가 발족했고 전국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전시회는 물론 다큐멘터리 영화도 촬영 중이고, 기념 앨범도 발매됩니다. 

 

올 한 해 나의 컨텐츠를 다 공개할 예정입니다. 영화는 내년 여름 쯤 개봉 예정으로 촬영 중입니다. 기념 앨범엔 두 곡의 신곡과 과거 발매한 '사람들'의 가사를 바꿔 재수록했습니다. 신곡 '연남, 봄 날'과 '외연도에서'가 있구요, 나머지는 이미 발표했지만 다시 불러보고 싶은 젊은 시절의 노래들로 채워집니다. 또, 시집 두 권과 노래 에세이 책 등이 나왔고, <붓글> 전시도 하고 있고..

 

정새난슬은 2016년 단독 앨범 <다 큰 여자>를 통해 호평을 받았는데요, 지금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나요? 

 

음악은 거의 접은 상태입니다.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책을 내고 있죠. 본인은 지금 자신을 뮤지션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첫 앨범을 들어보고 '너 다른 거 하지 말고 음악만 하라!'고 칭찬할 정도로 결과물이 좋았는데 시장의 반응이 좋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정태춘 박은옥 40주년을 맞아 젊은 세대도 정태춘의 음악을 알아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두 가지를 강조하자. 우선 한국을 대표하는 연가 '사랑하는 이에게'를 쓰고 부른 사람이 정태춘이다. 동시에 1996년 헌법재판소 소원을 청구해서 '사전심의 철폐'를 이끌어낸 사람 역시 정태춘이다. 그는 충실한 예술가요,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현실을 바꾸려고 했던 실천주의자였다. 정태춘은 '예술가의 완성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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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긴 커리어 중 정태춘의 음악적 성과를 종합하는 단 한 장의 앨범을 꼽아주신다면. 

 

단연 가장 최근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입니다. 음악적으로나 가사나 가장 완성도 높은 앨범으로 또, 마음 짠한 애정으로.. 아마도 모든 창작자들이 그럴 거예요. 가장 마지막 작업, 거기에 가장 애착이 가지 않을지..

 

앨범의 마지막 파트엔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다시 실려있습니다.

 

그 곡이 1993년 발매됐는데 당시 편곡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1절부터 강하게 치고 나오기보다 잔잔히 시작하면서 분위기를 고조하고 싶었어요. 더불어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 이 노래를 헌정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음악하신지 정확히 40년입니다. 향후 정태춘의 음악 세계를 예고해주십시오. 

 

40주년 콘서트를 11월까지 진행합니다. 그렇게 방대했던 40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영화가 나오면 관련해서 언론에 좀 노출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 끝낼 겁니다. 그리곤, 마케팅이 없는 작은 기획 공연이나 초청 공연 등으로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서의 가수 활동은 계속 하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창작과 앨범은 못할 것 같구요, 내 안의 이야기는 <붓글>로 계속하게 되지 않을지.. 생각합니다. 로맨티시스트로의 음악을 했다면 창작 작업을 계속하는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제 노래는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나온 것이지요. 

 

정태춘 박은옥의 40주년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이 날 토크콘서트에 참여한 영화팀 관계자는 '귀와 눈이 즐거운 음악 다큐멘터리로 콘셉트를 잡고, 전체 상영 시간 95분 중 80분 이상을 음악으로 채워 정태춘의 음악 세계와 존재, 행보를 의미 있게 담아낼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계획을 공개했다. '어떤 노래가 영화에 수록되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정태춘은 '그것은 영화 쪽의 일'이라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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