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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해야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 해도 똥깅이의 그것은 일상적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참혹 그 자체였다. 내면에 깊이 드리운 트라우마에 옭죄어 늘 우울한 낯빛이던 똥깅이. 특히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 증상은 거의 경계선을 넘나들 정도로 심각해져서 저러다 무슨 일 나는 것 아닐까 할 정도로 위태위태했는데 그런 부대낌의 와중에서 겨우겨우 고비를 넘기고 생을 일으켜 인간으로, 더구나 작가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힘겨운 나날을 견딜 수 있었던 원천이 무엇이었을까. 다름 아닌 글쓰기였다. 상처를 뚫고 똥깅이를 구원으로 이끈 것이 바로 문학이었던 것이다.

똥깅이가 겪은 아픔은 몇 겹이나 중첩된 것이었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우울한 기질을 공고화되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고향 함박이굴의 막막한 어둠과 슬픔의 분위기에서 길러지고 4.3의 와중에서 어머니의 부재까지 그 어린 나이에 감내해야 했으니. 또 사춘기를 거치며 늑막염을 앓게 되는데 투병 과정에서 우울한 무력감에 빠져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하였던 경험도 타인과의 관계를 닫아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의 성을 쌓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하겠다. 그리고 늘 비어있던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에게는 아버지 대역으로 한풀이를 당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이 아우러져 그는 늘 세상 고난 혼자 짊어진 듯 우울한 얼굴이었고 스스로도 이를 즐겨 베르테르처럼 보이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아니마뿐이었다. 나르시스처럼 또 다른 자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비정상적인 나날을 보내던 똥깅이의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이런 우울한 얼굴의 아이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앙금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경험을 하면서부터이다. 자신의 속내를 글로 나타내어 마음결을 추스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재능을 주위에서 인정받게 되면서 서서히 마음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제에도 안절부절 못하던 똥깅이가 스스로의 아픔은 물론 고향 제주도의 뼈저린 기억까지 오롯이 살려내게 될 줄이야.

그렇게 된 것은 똥깅이의 참혹한 경험에서 비롯된 내면에 응축된 역량과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를 알아 본 국어교사 김선생의 줄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소음이 오히려 침묵을 강조할 경우도 있다.”는 등 획기적 어법의 화두를 던져 똥깅이에게 문학의 심원하면서도 은밀한 세계를 열어 보인, 그리하여 언어적 감수성의 극한을 체험케 한 김선생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똥깅이의 재능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똥깅이의 아픔은 실은 그만의 것이 아니고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라 하겠다. 모두의 아픔이고 우리의 고난이었던 것이다. 아니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바로 나의 그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런 질곡을 뚫고 구원의 길을 찾은 똥깅이는 행복한 자에 속한 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 못다 피고 속절없이 저버린 꽃잎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똥깅이의 성장 과정을 통해 나의 그것을 돌아보고 힘겨웠던 시절의 우리 사회의 일단을 돌이켜 짚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시절이 아릿하지만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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