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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도서] 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저/민은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두 사람의 여정이 평행이론처럼 펼쳐진다. 아니 셋인지 모르겠다. 한갓진 카프카의 오두막에서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중 우주의 실재를 체험한 작가 니콜, 내면의 부름을 따라 사막의 언덕으로 성변화하듯 사라져버린 엡스타인의 여정에 필자도 동행하고 있다. 그들은 왜 이스라엘로 향했을까? 전격적이었다. 주변에 미리 알라지도 않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불쑥 길을 나선 것이다. 출구 없는 막막한 현실에 너무 갈급한 나머지 이리저리 셈해 보지도 않고.

먼저 삶이나 글쓰기 모두 벽에 부딪힌 작가 니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그녀는 무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겨 버렸다.

나는 정말로 왜 텔아비브에 온 것인가? 소설에서는 인물의 행동에 모두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동기가 없어 보이는 행동이라도 뒤로 가면 플롯과 공명의 섬세한 건축술이 항상 그 동기를 드러낸다. 빛이 어둠을 감당하지 못하듯이, 서사는 무정형을 감당하지 못한다-서사는 무정형의 안티테제이며, 따라서 무정형을 전달할 수 없다. (중략) 글을 쓰면 쓸수록 나는 서사의 구조로 이룩한 합리성과 고안된 아름다움이 더욱 미심쩍게 느껴졌다. 그런 속성들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그것들이 주는 위안 없이 살고 싶지 않았다. 의미가 잡히듯 그 속성들 역시 손에 잡혀 다뤄질 수 있도록, 무정형을 포함할 수 있는 형태로 포용하고 싶었다. 그런 일의 불가능성을 감시해야 했지만 그저 잘 잡히지 않는다고만 느껴졌으므로 그 포부를 버릴 수 없었다. (90~91)

작품 구상에 진척이 없어 안달하며 글쓰기 자체에 회의를 느낀 면도 있지만 니콜의 실제 삶도 궁지에 몰려 있었다. 특히 남편과의 관계는 정리가 필요한 단계까지 이르렀다.

밤에 남편이 내게 등을 돌리고 침대 저쪽에서 잠이 들면, 나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침대 이쪽에서 잠들었다. 우리는 상대에게로 건너갈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건너기가 두려워 건너가고 싶지 않은 것을 건너가지 못하는 거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각자 여기에는 없는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며 잠이 들었다. 그래서 아침에 두 아이 중 하나가 자면서 따뜻해진 몸으로 우리 침대로 기어들어올 때에야 우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그곳에 대한 강한 애착을 다시 기억해냈다. (163~164)

뚜렷한 계획도 없이 무작정 도착한 텔아비브에서 그녀는 생경감과 친숙함을 동시에 느낀다. 모순적인 감각에 휩싸인 채 자신의 마음결을 짚어본다.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하자면 운하임리혜에 해당하는 심리 상태란 걸 직감한다. 새롭고 생소한 것을 맞닥뜨리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양가적인 감정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운하임리혜란 억압된 무언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생기는 특별한 종류의 불안이라고 주장했다. 하임리히와 운하임리히가 하나이며 같은 것임이 드러나는 이 어원의 연보에서 우리가 결국 발견하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불안, 프로이트에 의하면 새롭고 이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억압 과정을 통해 의식과 멀어진 익숙하고 오래된 어떤 것과 직면할 때 생기는 이 불안에 담긴 비밀이다. 숨겨진 채로 있어야 하는데 훤히 드러난 것. (93쪽)

니콜은 엘리에제르 프리드만이라는, 실존하는 인물인지 가공의 존재인지 정체가 모호한 인물의 인도를 받아 카프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와 동행하다 엉겁결에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카프카가 말년에 머물렀던(?) 사막 한가운데 오두막에 유폐된다. 홀로 남아 삶을 되짚어보던 니콜은 열병에 시달리며 다중 우주와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을 깨닫게 되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다. 자신을 객관화하며 고뇌의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비로소 얻은 것이다. 카프카의 문턱이 내포하고 있는 희망과 낙관을 읽어낸 것이다.

카프카처럼 철저히 문턱에 머물러 산 사람도 없었다. 행복의 문턱, 저 너머로 가는 문턱, 가나안의 문턱, 우리에게만 열려 있는 입구의 문턱에서. 탈출의 문턱, 변신의 문턱에서. 거대하고 최종적인 이해의 문턱에서. 그런 일을 카프카처럼 잘해낸 사람은 아무도 업었다. 그런데도, 카프카가 결코 불길하거나 허무주의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문턱까지 이르는 데도 희망에 대한 민감성과 강렬한 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은 있다. 올라가거나 건너가는 길은 있다. 우리가 이 삶에서 거기에 도달하거나, 그 문을 알아보거나, 통과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할 뿐. (173)

또 한 명의 구도자가 이스라엘로 향한다. 엡스타인은 한때 모든 것을 다 가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그 마이더스의 손으로 못 이룰 게 없었다. 어떤 하찮은 것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명예와 이익, 젊음과 섹슈얼로 변모하였다.

그는 벽을 마주치면 계속 들이받고 매번 넘어졌다 일어서면서 결국 언젠가는 그 벽을 돌파했다. 그런 엄청난 압박과 노력이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감지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하면 안간힘처럼 보일 것들이 그가 하면 기품의 한 형태로 보였다. (19)

그러던 그에게도 실존적 자각의 순간이 찾아왔다. 부모님의 별세, 아내와의 이혼, 직장에서의 퇴직 등 외적인 여건의 악화와는 다른 차원의 감각이 그를 휩쌌다. 어느날 마실 것을 가지러 부엌에 가려고 일어서다 머리에 빛이 가득 차오르는 체험을 한다. 마치 그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새로운 지경으로 나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엡스타인은 슐로스에게 말했다. 스물일곱에 자신은 성공과 돈과 섹스와 아름다움과 사랑을, 규모뿐만 아니라 핵심을, 눈에 보이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는 야망과 욕구에 눈먼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치열함으로 정신적 영역에 매진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왜 자신은 그토록 철저하게 그 영역을 차단한 걸까? (24)

길굴 공동체의 랍비 메나헴 클라우스너와 교유하며 그는 점점 버림과 비움의 경지, 미답의 신비로운 영역으로 나아간다.

엡스타인은 셔츠를 벗고 바다 앞에 서서 넘치는 생동감, 새와 같은 자유를 느끼며 그동안의 포기와 기부가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마침내 이해했다. 바로 이 바다, 이 가벼움, 이 배고픔, 이 태곳적 분위기. 야파의 색채에 취한 채로 휴대전화가 빛을 내며 전해줄 저 너머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이 유연함. 더 큰 존재로부터, 시나이산에서 모든 것을 본 후 그에게 얘기해주려고 서둘러 내려오고 있는 모세로부터,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에게서 받을 것이라고는 그 자신밖에 없는 여자로부터, 그의 간청대로 사막에 있는 황량한 산비탈에 나무 사십만 그루를 전달해주기로 한 사람들로부터 전해질 메시지를 기다리며.
그의 나날은 산란하게 퍼져나갔다. 물과 하늘을 나누는 선이, 그 자신과 세상을 나누는 선이 없어졌다. 그는 파도를 바라보며 그 자신 역시 무한한, 계속 반복되는,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찬 존재라고 느꼈다. (291)

그는 더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향을 바꾸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행복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 자유롭고 평온한 곳, 어두운 숲으로 발을 내딛는다. 성변화하듯.

저자 니콜 크라우스도 두 사람의 구도행에 함께 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페르소나인 듯 아바타인 듯 이름조차 같은 니콜의 입을 빌려 이곳 세속의 막막함을 토로하며 저 세상 너머를 그리워한다. 그예 새로운 지경에 이르러 문턱을 넘는 경험도 한다. 아니 지어낸 것일 수도 있다. 꿈인 듯 실재인 듯 가물거리는 불빛 속에 새로운 경지에 이르려는 결기가 강고한 탓에 예지몽을 꾼 것일 수도 있으니.

처지와 입장이 유사한, 성향과 지향의 결이 같은 두 사람이 연원을 찾는 구도의 여정은 치열하면서도 온화했다. 인연이 닿은 이들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았고 남은 자들도 납득할 만한 선택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누구든 자신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미래를 추론해보고픈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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