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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X문화일보 국민서평프로젝트
밝은 밤

[도서] 밝은 밤

최은영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일견 여성 서사로 읽힌다. 그러나 작가는 진영을 나눠 선악을 특정 집단의 전유물로 배치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약자들을 불러내어 그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음을 보인다. 그들은 몇 겹의 모순에 휘둘려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중첩된 질곡을 뚫고 가느다라나마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 낱낱의 올들이 모여 어둠을 환히 밝히고 세상을 훈기로 데웠던 것이다.

그런데 가녀린 불꽃이 어떻게 빛과 열기를 뿜을 수 있었을까? 여러 겹의 모순을 뚫고 어떻게 잉걸불이 되었을까? 암울한 땅에서도 달뜬 열기로 웃음을 머금게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먼저 자신부터 당당히 세웠다. 드높은 자존감을 지녔다. 뼈에 실금이 난 할머니가 안쓰러워 지나치게 걱정하는 손녀딸에게, 무슨 노인 봉사활동 나왔냐며 스스로 챙길 수 있는 힘을 보여주려 했던 할머니처럼 말이다. 명숙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돌보는 자가 되려고 애썼다. 그렇게 단단하니 발화력이 셀 수밖에.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을 데우려 불을 지피곤 했다. 이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활성화된 계기가 따로 있기도 했다. 새비 아주머니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적은 증조모의 편지는 그를 온전한 인격체로 거듭나게 일깨웠다.

그런데 자존감은 때론 자괴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설정한 탓에 자책에 빠져 스스로 쥐어뜯는 것이다. 할 만큼 했는데도 더 베풀지 못했다며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 증조모는 추운 겨울날 새비 아주머니를 피난길로 내몬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자괴감에 빠지지 않으려 분투했다. 자연스레 불꽃이 커졌을 것이다.

 

또 하나같이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뭐가 인간의 도리인지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약자에 대한 예의에 민감했다. 그들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 허위의식과 그것에서 비롯된 위선적 행동이다. 증조부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자였다. 백정의 딸인 증조모를 구해주었다는 우월감에 취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뇌리에 붙박인 것은 계급적, 성적 편견이었다. 막무가내로 윽박지르는 그에게 할머니는 분연히 저항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입에 달고 살던 조부의 행태도 진배없었다. 겨우겨우 모은 돈을 앗아가며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할머니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분별력 없는 이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요즘 자유와 공정을 소리높이 외치는 일부 인사들도 그런 부류이리라. 정교한 논리나 생활 속 실천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이 공허한 주장만 내뱉고 있으니. 그에 비하면 일리 있는 대거리에 신변을 정리해버린 증조부가 오히려 더 분별력 있어 보인다.

 

당연하지만 그들이 약자였기에 연대할 수 있었다. 아니 연대가 필요했다. 피워 올릴 수 있는 양이 작다는 걸 알기에 다른 이들의 손을 잡아야 했다. 처지가 비슷한 이들은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또 다른 나의 모습이 거기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관계의 총합이다. 자기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들과 더불어 가야만 한다. 심지어 자식들에게 이런 감정이입이 일어나기도 했다. 증조모는 눈치를 살피느라 맘껏 울지도 못하는 딸의 심경을 헤아려 귀하게 여기며 돌봤다. 결국 그들은 또 다른 자신이기도 한 서로를 다독이며 불꽃을 모아 나가게 되었다. 약자를 알아보는 눈,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연민이 이제 연대의 불길로 이글거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존재에 합당한 의식을 지녔다 하겠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지닌 자들도 있다. 자신을 옥죄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나의 그것도 짚어보았다. 좌표를 찍을 수 없게끔 흐릿하다. 기껏 세금 몇 푼 더 내게 되었다고 서민을 위한 주택정책을 비난하고 있으니.

 

이렇게 자존감 높고 분별력을 지녔으며 존재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저마다의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었고 그것들이 하나씩 쌓여 암울한 지경을 밝히게 된 것이다. 마음을 전하고 물건을 나누던 작은 실천들이 여린 자들을 살려낸 것이다. 그런 인간에 대한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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