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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도서]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누구든 분노 스위치 하나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켜건, 외부에서 눌러 오건 순간적으로 열등감이 폭발하고 자존감이 손상되는 결정적 포인트 말이다. 사이보그였던 레이첼도 그러했다. 지수를 향한 끌림이 실은 감정 패턴 조절에 의해 유도된 것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경악했다. 자신을 장난감으로 여겼냐고, 적어도 존중한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심어진 감정이었냐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냉정하게 선을 그어 버렸다. 그 후론 메신저 로봇을 이용한 간접 소통만 가능했다.

 

레이첼의 분노를 헤아려 보면 그들 사이엔 모종의 설렘이 오갔던 것 같다. 기대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 표식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을 테다. 온실 안 식물을 바깥 세계로 옮기자는 지수의 제안에 레이첼이 건넨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 넌 어디로 갈 거냐고. 그건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과학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일을 물은 것이다. 더스트 자욱한 온실에서 외골수로 식물 연구에만 몰입하던 그에게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흐트러짐 없는 과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던 그였으니. 지수도 레이첼을 좋아했다. 대안 공동체를 이끌며 좀처럼 속을 내비치지 않던 냉정한 리더였던 그녀가 갈망으로 두근거렸던 것이다. 급기야 레이첼의 호감을 사고자 조절 장치를 켜기까지 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감정의 결이 교차했다.

 

로봇 정비사와 사이보그 식물학자 사이에 싹튼 이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또 온도는 얼마쯤 될까? 레이첼의 변화는 지수가 감정 패턴을 조절한 후에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전부터 있어 왔는지 모른다. 지수가 자신을 살려냈을 때부터 남다른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내면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적인 끌림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지수의 안위부터 걱정했던 것이다. 지수는 레이첼과 처음 시선이 마주친 순간부터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뱃속을 긁는 듯한 생경한 느낌이 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확신하긴 어렵고 구체화하기엔 모호한 감정이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진심이란 걸 곧 알아차렸다. 레이첼은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치는 존재였다. 특정 기능만 편집한 인공 식물 모스바나에겐 딱히 필요 없는 형질을 제거하지 않았다. 더스트 폴로 멸망당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상황인데도 반짝거리며 피어오르는 푸른빛을 감상하는 심미안이라니! 그래서 둘의 마음이 시작된 순간을 특정하긴 어렵겠다.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사이보그에게 심어진 감정 때문이라 단정 짓기도 곤란할 것 같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발화된 감정일 개연성이 크다.

 

 유리벽 사이에 오간 감정의 온도를 짚어본다. 레이첼에게 지수는 세상을 향해 열린 유일한 창구였다. 둘은 상호 조력자이자 동반자로 우정 어린 관계를 이어갔다. 그에 더해 지수는 레이첼의 호의를 얻고 싶었고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물기를 원했다. 레이첼은 내면에 대한 궁금증을 넘어 그리움으로 나아갔다. 평생을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어떤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로 미뤄볼 때 우정과 애정 사이 어디쯤에서 뿜어져 나올 온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애정이 아니었다고, 그렇다고 오롯이 사랑의 감정이었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고온의 애정이라고 좌표 찍기엔 망설여지는 구석이 있다. 과열된 감정이 아니었고 농도도 짙지 않았으니. 그랬기에 사랑에 눈이 멀고 복수심에 불탈 때 내리기 쉬운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안전과 바깥세상의 평화를 위해 단호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후회와 그리움에 휩싸일 걸 알았지만 고통과 원망에 젖어 있지는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애틋하면서도 담담했던 그들의 눈빛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결국 그들을 일으킨 건 온기 어린 마음이었다. 불가항력적 재앙과 극단적인 배제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따뜻한 선의에서 나왔다. 그것은 가치중립적 과학자와 냉정한 리더의 역할 행동보다는 인간적인 우정에 더 기대고 있는데 들여다보면 애정의 결도 여러 가닥 섞여 있었다. 사랑과 우정이 배려를 낳고 희생을 감수하며 그예 더스트 폴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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