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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어 서점

[도서] 행성어 서점

김초엽 저/최인호 그림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SF물을 좋아하면서도 더러 버거울 때가 있다. 내 깜냥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상력의 스캐일과 지적인 정교함 앞에 막막하고 허무해져서 무너져버린 경우도 있는 것이다. 장편 SF를 한번에 휘리릭 읽어본 기억이 없다. 쩔쩔매며 어찌어찌 다 읽고 난 다음 스토리 라인을 가다듬으며 재독을 해야 하는 난감한 사태에 봉착하기도 한다.

이번 김초엽의 짧은 얘기들을 읽는 데 그런 걱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단순히 분량이 짧다는 것에 안심했던 것은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를 쓰자며 어깨에 힘을 빼고 가벼이 써낸 이야기들의 모드와 코드가 부담 없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소설로 옮겨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던 아이디어들이 이상하게도 '짧은' 소설이라는 제약을 걸어주면 스르륵 문장이 되어 풀려나온다.

"이렇게 짧은데 완벽한 이야기를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냥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쓰자." 그렇게 어깨에 힘 빼고 출발해야 도달할 수 있는, 산뜻한 이야기의 마을이 있는 것 같다. (중략) 홀가분히 가벼운 짐만 꾸려 떠난 휴가처럼 이 책을 즐겨주시기를.(6~7쪽)

 

이렇게 작가 자신에게 좋은 얘기들에 나까지 서서히 물들어 간 것 같다. 겸손하고 온화한 위로가 무장해제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들은 현란하고 난해한 과학적 원리에 기대고 있지 않았다. 진입장벽을 느끼지 않고 문턱을 쉬 넘을 수 있었다. 외계 행성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로 현혹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건 우리별 얘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변주로 읽혔다. 우리별이 처한 엄혹한 실상과 시급한 과제에 대한 시사점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었다.

여러 빼어난 얘기들로 빼곡하지만 내겐 특히 '포착되지 않는 풍경'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셀카와 인증샷이 생활양식으로 굳어진 우리에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을 이미지 파일에 담아 간직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아스라한 기억들을 디지털 기기로도 포착하지 못하고 애틋한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을 그 별에선 과연 어떻게 타개할는지.

 

허공에서 안개 입자 하나하나가 빛으로 부서지듯 반짝였고, 두 개의 태양이 기울며 시간마다 다른 색의 빛줄기를 그 위에 더했다. 부유하는 금속 미생물들이 대기 중의 황화수소와 반응하여 약 세 달간 지속되는, 뮬리온-846N에서도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별안개라는 현상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행성 여행자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들이 절벽 끝의 난간에 매달려 반짝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드론으로 영상을 촬영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그 시각 데이터들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모두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니까 저 별안개의 미세한 입자들이 가진 패턴이 데이터 오류를 일으킨다는 거죠?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서 다른 데이터까지 집어삼키고요."

"맞아요. 은하 표준 시각 데이터 형식을 사용하는 모든 데이터가 저 별안개의 패턴에 손상되고 있어요. 소리를 녹음한다든지 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절대로 포착될 수 없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기록은 표준 형식으로 통일되어 있으니까요. 우리는 당신이 무슨 특별한 촬영 방법을 알아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군요." (98~102쪽)

여행자들은 다같이 숨을 죽이고 바람 소리, 연필이 긁히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의 별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빛과 그림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조차 완전히 멈추었고, 정적 사이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소리만이 끼어들었다. 리키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고 말 순간을 지켜보았다. (106쪽)

 

작가는 포착되지 않는 순간을 담고 남기기 위해 인류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최첨단 디지털 기기와 혁신 기술을 제시하지 않았다. 눈에 담고 손으로 그리고 마음에 새기는 인간 본연의 방식을 포착되지 않는 풍경을 간직하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뜻하고 아련한 얘기들 앞에 마음이 절로 놓였다. 변화무쌍한 얘기들을 따라가며 스토리 라인과 플롯을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긴장하고 집중하며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안전하고 온화한 짧은 이야기들에 위로받고 평화로워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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