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회
그리고 그날 이야나는 그 돈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만이 여행사를 차린 도시까지 나갔다. 택시를 타본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야나가 탄 택시의 운전수는 지진 전에는 큰 음식점을 경영했다고 했다. 음식점이 다 무너졌는데 다행히 차가 남아 있어서 우선 불법적으로나마 택시 일이라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차를 몰고 다녀도 택시를 부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했다. 이야나는 그가 과하게 부르는 택시비를 깎지 않았다.
만은 사무실에 있었다. 이야나는 투계 얘기를 한참 했고 자신이 돈을 땄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불쑥 만에게 말했다.
약속을 지켜주겠어, 만?
작은 이빨, 거기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요?
사실은 거기에서 얘기를 전부 끝내야 할 것 같아요. 지진이 난 후, 경찰서에 있는 동안, 나는 기나긴 동면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그건 또 하나의 매몰이었겠죠. 영원히 거기 있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매몰보다는 동면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옳겠어요.
유치장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올 때마다 이빨을 비쳐보곤 했어요. 노란 이빨이 투명하게 빛나더군요. 한 사람의 인생이 거기 다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묘해지곤 했어요. 그러니까 탄생부터 소멸까지…… 그것은 모든 기억이고, 무엇이든 씹어댔을 이빨이니, 욕망의 기억이기도 하겠지요.
다시 시작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를 생각하곤 했었어요. 무엇이든 다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죠. 그러니 바로 지금부터,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그냥 어느 하루를 시작하듯이 그렇게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그곳에 있었던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예요.
가끔 당신 생각을 했어요. 묻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그래요, 묻고 싶은 말은 한 가지뿐이었어요.
당신은 그때, 돌아왔나요?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을 묻지 않으려고 해요. 그보다는 해야 할 얘기가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당신이 이런 편지를 받는 것을 좋아할지도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해야 할 거 같아요.
매주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나는 일요일마다 도서관이 근처에 있는 공원엘 찾아가곤 했어요. 공원 옆에 있는 도서관을 바라보곤 했지만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어요. 나는 여전히 당신의 나라 글을 잘 못 읽거든요. 책을 읽는 척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당신을 우연히 만나면, 책을 읽으러 왔을 뿐이에요, 라고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거 같았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당신이 산책을 한다는 공원, 그 공원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이 도시에 있는 공원의 모든 나무 아래들을 거닐었어요.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사는 도시의 공원들을 아주 많이 알게 되었어요.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날 당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당신과 마주치기 위해 공원을 찾곤 했었어요. 그러나 오래 그랬던 건 아니에요. 나중에는 그냥 공원 산책이 마음에 들게 되었거든요. 가끔은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산책을 하기도 했어요. 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캔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요. 나는 친구들을 아주 많이 사귀었어요. 지금의 나처럼 불법체류자인 사람들이고, 지금의 나처럼 제법 많은 돈을 모운 사람들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들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살아요. 돈 벌기 위해서 온 나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나도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어요.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이 고되어도 통장에 쌓이는 돈을 바라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이 말을 꼭 하고 싶네요. 나는 돈을 꽤 모았어요. 그래봤자 당신한텐 얼마 안 되는 돈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이 말이 꼭 하고 싶어요. 돌아가면 내 집을 짓고 작은 가게 하나를 낼 생각이에요. 그리고 내 이빨이 노래질 때까지, 다시는 무너지지 않고, 흔들려도 조금씩만 흔들리며 살 생각이에요.
돌아가는 날까지, 시간이 나는 일요일마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려고 해요. 어느 날 특근을 할지도 모르고 어느 날은 숙취 때문에 방 안에서만 뒹굴 거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가급적 공원 산책을 계속 하려고 해요. 내 나라와는 다른 당신 나라의 나무들이 좋아졌거든요.
당신도 여전히 나무들을 좋아하기를 바래요.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지금, 이것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