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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술 분야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다방면에 지식과 심미안을 갖춘 자로서, 생업에 종사하는 교양인이 퇴근 후 맛있는 저녁을 먹고 향기로운 차 한 잔과 더불어 서재에 앉아 느긋한 저녁을 보내면서 품위있는 취미생활을 맘껏 향유하기 위한 훌륭한 지적 여흥거리다. 예인의 기질을 타고났으나 자기 재능을 발휘하여 밥벌이하기는 어중간하여 어렸을 적 꾸었던 꿈을 접은채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심미안만 있고 창조력은 부족한 비교적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회인들. 마치 어린이가 달콤한 군것질을 탐하듯 그들은 이런 읽을거리에 탐닉한다.

 

동로마 제국의 최후: 1453년 5월 29일, 마흐메트 2세의 비잔틴 정복 

훈족의 아틸라에게 신의 채찍을 맞으면서 끝없는 추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로부터 다시 1,000년이 조금 못 차는 동안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온 동로마 제국도 멸망한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영화로 만든다면 그야말로 스텍타클한 영상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화려함을 연출할 것이다.

본래 하나였던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 양분된다. 황제가 제국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로마 본토를 기반으로 카톨릭을 믿는 서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그리스 정교를 믿는 동로마(비잔틴 제국). 동로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건설되었다. 천연 요새에 위치한 삼중의 성벽은 그 어떤 적도 뚫을 수 없다고 믿어졌다.

그 옛날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백만대군을 동원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던 헬레니즘의 아성. 그 후손들이 '300'이라는 가당치 않은 영화를 만들어서 이슬람세계를 욕보인 치욕의 왕국. 마흐메트는 헬레니즘의 정복자로써 자손만대에 이름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다음 정권안정이라는 명분으로 피의 숙청을 단행한다. 아부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빌붙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옅보이는 모든 가족과 친인척이 왕의 이름으로 제거된다. 그리고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여 힘을 기른다. 마침내 굴기할 시기가 도래했다. 마흐메트는 천년왕국을 접수하러 출정한다.

만약 동로마와 서구유럽이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라는 종교상 이견 때문에 반목하지 않았다면 동로마는 침략을 이겨낼 수도 있었으리라. 동로마의 구원요청에 대하여 서구 유럽은 공통된 문화와 역사를 이어받은 형제를 외면했다. 바로 종교 때문에.

마흐메트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역사상 그 어떤 정복자보다도 더 무모하고 기발한 작전을 짠다. 일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마저도 마흐메트의 작전 회의에 참석했다면 두 손을 들었을 것이다. 마흐메트는 황금곶으로 전함을 이동시키기 위해 수 백 척의 배를 산을 타고 넘기는 작전을 구상한다. 배가 산을 타고 넘다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마흐메트는 하룻밤 사이에 이 엉뚱하고도 기발한 작전을 성공시킨다. 기술자들이 산 위에 가능한 한 평탄한 길을 내고 배를 태울 거대한 썰매를 만들어 배를 실은 후 인마를 동원해 썰매를 끌고 산을 넘은 것이다. 새벽에 눈 뜬 비잔틴은 하룻밤 사이에 황금곶에 나타난 수 백 척의 적선을 보고 경악한다. 결국 천년고도는 붕괴된다.

한 인간의 광기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불멸 속으로 도주하다: 1513년 9월 25일, 발보아의 태평양 발견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원정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황금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땅. 유럽에서 대서양을 헤치고 탐험하여 발견한 곳은 여전히 대서양에 면해있는 육지였다. 아직까지 유럽인은 태평양을 알지 못했다.

역사에 기록은 되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태평양 발견의 공로는 파렴치한 범죄자가 차지했다.

태생이 사기꾼인 발보아는 식민지의 정당한 총독을 살해하고 자기가 대장 노릇을 한다. 그는 콜럼버스가 실패한 황금의 땅을 발견하여 때부자도 되고 살인죄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어했다. 만약 엘도라도를 발견하여 황제에게 은금을 바친다면 왕도 자기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인디언 부족들을 공격하며 황금을 찾아 헤메던 그는 결국 한 부족으로부터 황금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땅이 저너머에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런데 본토 스페인에서 새로운 총독이 파견되어 그를 기소하러 오고 있었다. 이제 모 아니면 도다. 죽음을 각오한 백 여 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전인미답의 정글을 헤치고 파나마 지협을 통과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그의 모험은 성공한다. 최초로 태평양 바닷가에 발을 담갔을 때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동행한 서기에게 역사를 기록하게 하였지만, 탐욕과 범죄로 얼룩진 이 배포 큰 인물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가 발견한 황금의 땅(마츄픽츄. 잉카 제국) 역시 탐욕스런 백인들에 의해 멸망한다. 역사는 그를 기억할 때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부활: 1741년 8월 21일,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이 불세출의 음악가는 말년에 부채와 불운에 시달리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계속 그를 불행의 늪으로만 몰아가는 듯했다. 급기야 뇌 질병으로 반신불수가 된다. 사람들은 이제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을 눈앞에 그리며 침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헨델은 기적적으로 병이 낫더니 창조적 영감의 폭발을 경험한다. 이름 없는 시인이 자신의 시를 헌사하며 예술의 날개를 달아주십사 부탁했을 때 늙고 병든 헨델은 코웃음치며 자조했다. 그런데 그 시 첫 행을 읽자마자 고귀한 영혼의 울림으로부터 끓어오른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가 불편한 몸을 믿음의 힘으로 움직여 식음을 전폐하면서 악보를 써내려가니 <메시아>가 완성된 것이다.

신경정신과적으로 뇌 관련 질병을 앓고나서 특별한 재능이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천재성은 머리에 쇠붙이가 박혀 음악을 담당하는 부분을 자극했기 때문이란다. 아마 헨델의 경우도 뇌졸증 후 운동기능이 마비된 대신 창조기능이 활성화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룻밤의 기적: 1792년 4월 26일, 혁명의 노래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 애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는 평범한 군인 루제가 하룻밤만에 완성한 곡이다. 그가 이 곡을 만들 당시 그는 언감생심, 상상도 못했다. 이 곡이 애국가가 될 줄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 의해 퍼뜨려진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의 불기를 타고 들불처럼 퍼진다. 모든 축제와 집회는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한 번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하는 것으로 끝났다. 행군에 지친 병사의 귀에 라 마르세예즈가 들려오면 그는 그 곡을 따라부르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일어섰다. 노래 한 곡이 소심한 민중의 왜소한 가슴에 혁명적 이상으로 가는 정도에 불을 붙여주었다. 아마 프랑스만큼 애국가를 사랑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루제 자신은 혁명 반대자로 돌아선다. 극렬 혁명분자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반혁명 분자로 낙인 찍어 모두 단두대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누명을 쓰고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까지 했다.

루제는 그 위대한 곡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이 없었다. 운명의 여신이 루제에게 단 하룻밤만 위대한 창조력을 부여하고 새벽이 되자 되가져가버린 것이다.  

 

워털루의 세계 시간: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그루쉬 장군은 결코 뛰어난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20년 동안 나폴레옹을 따라다니며 영욕을 함께 했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명령으로써 명예와 권력을 얻었으며 성실한 그루쉬는 다만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살아남으면 족했다. 그는 결국 장군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보다 뛰어난 선배 장군들이 차례차례 전사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운명을 가르는 동시에 세계 역사를 바꿔 쓰게 될 워털루 전투가 시작됐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웰링턴의 본대를 공격하고 변변찮은 그루쉬 장군은 프로이센 패잔병을 추격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그루쉬. 그런데 프로이센 패잔병은 아무리 추격해도 꽁무니도 보이지 않고, 나폴레옹 본대에서 의문스런 포성이 들려온다. 그루쉬의 부관들은 나폴레옹의 본대가 위기에 처한 것으로 추정되니 빨리 회군하여 나폴레옹을 원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그런데 이 고지식하기만 하고 재능은 부족한 인물은 황제의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장교들의 의견을 묵살한다. 웰링턴과 나폴레옹은 사생결단을 벌이면서 피차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이제 전세는 누구에게 원군이 먼저 도착하는가에 따라 결판날 것이다. 그 때 도망간 줄로만 알았던 프로이센 군이 어느새 나폴레옹의 측면을 공격하고 나섰다.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은 그루쉬 장군에게 서둘러 회군명령을 내리지만 그루쉬는 전령을 만나지 못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패하고 만다. 이 때 간교한 유태인 로스차일드는 워털루 전투의 정보를 남보다 먼저 알고 주식 장사를 벌여 때부자가 된 다음 훗날 유럽을 장악한 돈의 황제가 된다. 그 때 그루쉬 장군은 보이지 않는 프로이센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도대체 왜 적군이 보이지 않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조국의 군대가 분패한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이 우직한 장군은 열패감에 빠져 나머지 병력을 위기로 내모는 대신 영국군을 정면돌파하는 용기를 발휘하여 조국의 마지막 군대를 지켜냈다. 그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도 칭찬하지 않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말한다. 운명은 과감하고 유능한 인물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치욕스런 삶의 연장만 안겨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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