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는 조나탕 베르베르의 첫 장편소설이에요.
또 다른 베르베르의 등장! 놀랍게도 조나탕 베르베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베르나르의 아들이더군요.
그 사실을 몰랐더라도 흥미롭게 읽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마음에 쏙 드는 주인공 제니가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소설 속 주인공에게 반하지 않고서는 몰입하기 힘든데, 제니는 정말이지 너무 매력적이라 읽는 내내 맘껏 상상했어요. 이 정도 매력이 터지는 주인공이라면 영화로도 충분히 제작될 것 같아요. 제니 마턴은 스물여섯의 젊은 여성이며 아버지 구스타브 마턴이 남긴 책 『마술의 길』을 늘 품고 다니는 거리의 마술사예요. 소설 속에 나오는 두 권의 책, 『마술의 길』 과 『완벽한 요원을 위한 핑커턴 지침서』 는 속임수의 극과 극이라는 재미를 주네요.
1888년 10월, 뉴욕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제니는 낯선 남자에게 일자리 제안을 받게 돼요. <핑커턴, 최고의 사설탐정 회사>의 대표인 로버트 핑커턴은 제니에게 <요원>이 되어 심령술로 수십 년간 부와 권력을 누린 세 자매(리아, 마거릿, 케이트)의 사기극을 밝혀내라는 임무를 준 거예요. 정확하게는 범죄자인 폭스 자매에게 접근하여 가장 친한 친구가 되라는 거예요. 사기꾼을 속이기 위해 침투하는 요원이라니, 아이러니 그 자체예요. 암튼 제니는 『완벽한 요원을 위한 핑커턴 지침서』에 적힌 내용을 숙지하고, 위조 신분으로 '헤이즐 바월'이라는 두 자녀를 둔 과부 행세를 하게 돼요.
제니는 폭스 자매의 심령회에 참석했다가 둘째 마거릿 폭스가 무례한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과감하게 무릎으로 걷어찼어요. 그 놈의 콧구멍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제니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멈췄어요. 이 사건으로 마거릿과 제니는 친해졌고, 제니는 마거릿의 순수함에 죄책감을 느끼게 돼요. 인간적인 친밀감과 신뢰가 생겼는데, 자신은 상대방을 속이고 있으니 고약한 상황인 거죠.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제니에게 마거릿은 나이 차이조차 잊게 만드는 인생 친구가 되어버린 거예요. 보통의 사람들은 마거릿을 영매로서 대하는데 제니는 달랐어요. 제니가 마거릿에게 주먹쓰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어요. 제니는 "봐요, 마거릿, 난 당신 안에 그런 게 들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저 조금 풀어놓기만 하면 충분했죠." (131p)라고 말하며, 영매의 억눌린 내면을 뚫어준 것이 대단히 놀라웠어요.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제니뿐 아니라 여러 여성들이 감동을 주고 있어요. 비밀요원의 활동에서 서서히 여성들의 이야기로 빠져든 것 같아요.
핑커턴 형제는 4년 전, 아버지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폭스 자매의 심령회가 사기극임을 밝히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사업가 마인드예요. 신기한 건 로버트 핑커턴의 변화예요. 제니는 마술사의 능력 못지 않게 대단히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것 같아요. 가득 차면 흘러넘치는 법, 굉장히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보이진 않지만 제니로부터 흘러나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드네요.
심령회에서 특이한 점은 심령을 소환하면 딱 소리가 난다는 거예요. 마술쇼처럼 어떤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폭스 자매를 통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을 심령의 형태로 만나 위로받고 있어요. 심령의 존재를 믿든 안믿든, 죽음으로 남겨진 사람들에겐 그 고통을 치유할 힘이 필요해요.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거쳐야 놓아줄 수 있어요.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다 가짜는 아니에요. 우리 마음은 진실을 알 수 있으니까요.
"마턴 양,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우월한 점이 무언지 아시오? 우리가 늘 갈리는 그 지점을?"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건 아주 간단하다오. 여자들은 배우기 위해서 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거지.
우리에겐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놀라운 뭔가가 있소. 공감이라고." (409p)
"제일 어려운 일, 그건 함께 일할 좋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거지." (514p)
"나는 기꺼이 당신 그 무게로부터 벗어나도록 돕겠지만, 당신만이 그 무게를 벗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53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