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조예은
고등학생 이루루는 학구열이 강한 부모의 아래에서 부모의 기대치를 넘지 못하고 그대로 재수행 열차를 탄다. 기숙 학원에 가게 될 위험 아닌 위험에 처한 루루에게는 제이라는 애인이 있다. 제이는 루루와 반대로 대학에 붙었지만, 가정환경으로 인해 입학하지 못하는 같은 학생이다. 대학 입학은커녕 제이에게 손을 벌리는 부모의 아래에서 제이는 "다 망했어." 밝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각각 무겁거나 너무 가벼운 이 부모들에게서 제이와 루루는 기숙 학원으로 감금 아닌 도망을 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허름하고 오묘한, 학생의 성적 관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기숙 학원의 합격률은 90%. 이 합격률에는 도대체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일까. 루루와 제이는 허름한 기숙 학원에게서 위험한 패스트푸드의 냄새를 맡게 된다.
지나가다가 사 먹은 노상의 닭꼬치가 사실은 비둘기로 만들어졌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거짓말보다는 값싸고 맛있는 닭꼬치를 더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 결국 금방 잊었지만 그 루머를 믿었던 짧은 몇 달간은 지나가던 비둘기의 개체 수를 세어 본다거나 친구들과 급식에 나오는 찜닭과 비교를 한다거나 하는 추리를 연속하곤 했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입고 쓰며 바라보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원산지가 적혀있다고 하더라도 고작 포장지에 한 줄 적힌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2병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었겠지만 이런 생각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발전시키고 가공해 내는 능력은 역시 조예은 작가다웠다.조예은 작가 특유의 장점이자 능력 같다. 누구나 상상해 볼 법한 이야기를 누구나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로 탈바꿈 시키는 능력. 물론 그 지점까지 끌고 가는 단계가 허점 하나 없이 탄탄하고 즐겁다는 것 역시 작가의 매력이자 큰 장점이라고 느꼈다. 잔인하고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주인공의 이름과, 학생의 일탈이라고 할 수도 있는 분위기와 구조, 햄버거라는 가까운 패스트푸드의 조합은 [펄프픽션] 이라는 구조 안에서 이 이야기가 좋은 시작이 되게끔 한다.
떡볶이 세계화 본부, 류연웅
한국을 대표할 정도의 맵고 맛있는 떡볶이를 만들어 유명해진 [사망 떡볶이] 사장 김신전은 유명세를 치러 내한한 영국 배우들의 촬영을 제안받는다. 그러나 영국 배우들에게 사망 떡볶이를 내어주게 된 날 큰 사건이 벌어지고, 탄탄대로였던 사업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떡볶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던 김신전에게 국정원이 찾아와 뱀파이어 사태에 대해 비밀스러운 계획을 제안한다.
한국의 블랙 코미디를 부흥시키겠다는 다짐을 가진 작가답게 써 내려간 요소들이 장난스럽게, 단단하게 결속되어 탄탄한 블랙 코미디를 보여주고 있다. 떡볶이 - 빨간 양념 - 피 - 뱀파이어 등 계속해서 연쇄되는 유머를 감싸고 있는 현실의 색채는 새까맣고 어둡다. 블랙과 코미디 어느 한 부분에도 치우치지 않고 작가 특유의 가볍고 유쾌한, 한계 없고 통통 튀는 문체가 독자들을 인도하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무거워질 법하면 바로 한계 없는 서술이 코미디를 넘나들고, 너무나도 유쾌해져 무게감을 잃을까 싶으면 바로 잘 직조한 현실이 무게를 잡는다. 나라를 오가고 인종을 오가며 자칫 무겁고 괴로운 주제가 되는 부분들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서술과 구조는 [떡볶이 세계화 본부]라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왠지 존재할 것만 같은 이 제목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매콤하지만 계속해서 먹고 싶어지는 떡볶이와 같은 맥락의 블랙코미디를 퍼뜨려나갈 작가답다고 생각했다.
정직한 살인자, 홍지운
조폭을 남편으로 둔 조선족 아내 '나'는 남편을 살해했다. 이 결혼은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 아닌 어떠한 조직의 이해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시작된 결혼이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살기 위해 남편을 죽였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시체를 저수지에 버리기 위해 핸드폰 플래시를 켜 험한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저수지에서 예상치도 못한 목격자이자 이방인을 만나게 된다.
사랑과 결혼, 이익을 따지는 관계 속에서 서로 죽고 죽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불가피하게 비극만이 있다. 하지만 그 비극이 어떤 형식으로 어떤 맛으로 그려질지는 서사를 직조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 비극은 어떤 비극일지 궁금해하면서 읽게 되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조금은 뻔한 서사인 구조에 SF적 이방인을 추가해 제3자가 서술하게끔 만드는 구성이 너무나도 신선했다. 사건에 자리하고 있는 본인이 이러한 이해관계 속의 사랑을 서술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칫 신파가 되기 쉽다. 뻔한 사랑 이야기에 그칠 이야기를 제3자이자 SF적이며 전혀 관련도 없는 (심지어 지구에 살지도 않는!) 이방인이 아주아주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며 서술하는 장면이 오히려 이 서사를 아주 신선하고 너무 맵고 짜지 않게, 딱 보기 좋고 맛있게 덜어주었다.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 이경희
고객 서비스 담당인 요한나는 한 달 만에 불만 민원 열일곱 건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남기고 팀장에 의해 '특별 민원 담당' 이 된다. 특별 민원 담당 요한나 주임이 맡게 된 인물은 이명현이라는 이름의 오지랖 1000% 노인. 하루에만 민원 열 개, 총 3만여 건을 신고한 이명현의 1:1 특별 담당 민원인을 맡게 된 요한나는 출근 첫날부터 퇴사를 염원하고 있었다.
1호선 지역에 거주하며 1호선의 '빌런'들을 많이 만난 나는 서술되는 이명현을 만나자마자 머릿속에 뚜렷이 그 '빌런'을 상상하게 되었다. 뚜렷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성은 물론, 캐릭터에게 당위와 디테일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누구든 알고 있을 법한 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만났던 캐릭터들과 다른, 신선한 구성에 끊지 않고 쭉 읽을 수 있었다. 누구나 상상하는 1호선 빌런처럼, 여기저기 손쉽게 말을 걸고 소리를 치며 1호선을 수호하는 듯이 보이는 이명현을 중심으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도시철도를 '수호'하고 있었다는 서사는 너무 재미있어 충격이었다. 독보적이고 유쾌한 캐릭터 선녀를 토대로 여러 노동자들이 수호자로 뭉치고, 그와 대립하는 재앙과 조광민이라는 캐릭터 역시 탄탄하고 즐거운 구성이었다. 게다가 비현실적인 구조 사이사이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의 요소들, 현실의 디테일은 이야기를 마냥 유쾌하고 즐거운 판타지 소설로 받아들일 수 없게끔 한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편도 아닌 채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생명을 걸어 무엇인가를 수호하는 모습은, 하나의 거대한 비유처럼도 느껴졌으며 캐릭터에게 당위성이 섬세하게 느껴져 읽기 즐거웠다. 이런 거대한 비유 속에서도 Z세대처럼 보이는 요한나 주임은 어떻게든 들어선 발을 다시 빼보려고 하는 것도 이 이야기의 킥 포인트였다.
시민 R, 최영희
아주 귀여운 아기 깡통 로봇 R-YET (알옛) 은 첫 로봇 살인마로 재판장에 서게 된다. 인공 지능이 발달하며 인공 지능 로봇을 도구로 범죄 행동을 저지르는 일이 많아진 시간 선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공 지능 로봇이 재판장에 서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로봇 '혼자' 재판장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봇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를 소유자가 알옛에게는 없었다. 알옛은 살인사건 피의자로, 알옛을 개발하고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던 강희원은 살인사건 피해자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혹은 아주 과거 인공지능이 미지의 지점이었을 때부터 로봇에 대한 묘한 적대심과 공포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알고리즘을 통해 의논하고 분석하며, 하나의 가치관과 뚜렷한 논리를 가진 이 물체를 단순히 로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직접 학습하고 가치관이 형성되며 하나의 인격이라 말할 수 없는 인격을 가지게 된 이 물체가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발언하기 시작했다면 이 물체는 로봇이 맞는가? 인공지능에 관련해 분분한 논쟁 지점을 건드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철학적인 논쟁과 데이트 폭력 등의 윤리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시민 R]은 보는 내내 생각해 볼 거리가 넘쳐나 풍요롭다고 느낄만한 작품이었다. 본인을 로봇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 정의하고, 시민이 해내야 할 의무를 다 하는 모습은 어쩐지 하나의 성장 소설처럼도 느껴졌다. 결국 시민 R, 알옛을 창조하고, 방치해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것은 모조리 다 인간이라는 사실과 알옛의 강요 아닌 선택으로 인해 처형은 사라지고 온갖 시스템과 인터넷을 이용해 유유히 감옥을 빠져나가는 알옛의 모습은 섬뜩했다. 섬뜩한 엔딩은 단순히 SF적 서늘함과 쾌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와 현재를 아우르는 문제의 새로운 오프닝이 되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