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후 네시

[도서] 오후 네시

아멜리 노통브 저/김남주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소설의 원제인 Les Catilinaires 는 프랑스어로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 연설 / In Catilinam]편들을 가리키며 보통 명사화하여 [논박], [야유]등을 뜻하기도 한다.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브를 이름으로만 듣다가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접했다.  일전에 읽은 [눈표범]의 작가 실뱅 떼송의 글을 읽어가면서 나랑 비슷한 연배라는 점이 눈에 띄었는데 아멜리 노통브 역시 비슷한 연배이다.  공간은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 나는 이 멋진 사람들의 호흡과 생각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차츰 노통브의 소설들을 다 읽어갈 생각이다. 역자인 김남주 님의 매끄러운 번역은 또 하나의 반전이다. 번역은 반역이라고도 하고 문학의 손길이 아닌 기술적인 장인의 역할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그 말은 모순이고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다. 김남주님의 번역은 물흐르듯 매끄러워서 글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의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에서 보았듯이 문학적인 충실성이야말로 역자가 지닌 기품있는 소양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첫문장의 의미는 맨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둔다. 나는 이 말이 너무도 적격하고 명확하며 누구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철학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동화로 시작해서  스릴러로 진행되다가  블랙코미디로 착각할 수 있는 지점을 통과하게 되면 바로 위 첫문장으로 귀결된다. 길들여진 자아와  본능적인 자아가 자리 바꿈을 하며 타자를 대할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지를 실질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점이 두렵지만 사실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에밀과 줄리에뜨는 50여년간 함께 살아온 부부다.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고 각자에게 집중하고 싶어서 아이도 갖질 않았다. 에밀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은퇴하고 사랑하는 부인과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 목가적이면서 조용한 전원생활을 꿈꾸며 그들의 생각에 맞는 <우리 집>을 찾는데 성공한다. 노후에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게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럴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자부하는 바인데 이 소설의 기본 전제는 오후 네시만 되면 문을 두드려대는 이웃남자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는다. 베르나르댕이라는 거대한 몸집의 이 남자는 네시에 쳐들어와서 안락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여섯시에 그들의 집을 떠난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문제는 에밀의 난해한 태도에 있다.  남의 집에 약속도 없이 들어와 거만하게 커피를 마시고 아무 말도 없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는 베르나르댕에게 뭐라도 말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에밀의 본능이 은근슬쩍 드러나게 되고 이런 생활이 반복지속되다보니 부인 줄리에뜨와도 이전과는 다르게 뭔가 모를 결속이 깨지게 된다.  고요한 연못에 돌맹이를 던졌더니 그곳의 주인인 개구리 두마리의 공간이 흐뜨러지며 바닥에 쌓인 온갖 흙더미들이 뿌옇게 올라오는 이미지를 상상해보면 이 소설의 줄거리가 대충 짐작이 갈 것 같다. 에밀의 사랑하는 제자인 클레르가 방문을 하는데  이제껏 보아왔던 그들에게 실망하며 돌아가는 장면도 작가가 던지는 냉혹한 진실이다.  

클레르 / Claire..  명확한 이란 뜻을 지닌 이름의 소유자는 실로 명료하고 확실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에 비해 평생동안 죽은 언어를 가르친 에밀의 실존은 생각속의 생각을 쌓아두고 추상적인 논박과 뒷담화를 늘어놓는 데 시간을 보낸다. 이웃남자 베르나르댕의 권태와 공허를 비난하지만 에밀 역시도 권태로운 일상에 급작스러운 침입이, 그런 무질서와 혼란을 즐기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문을 열어주었던 건 아닐 지... 베르나르댕의 부인은 살덩어리로 표현된다. 요즘 뜨는 넷프릭스의 [스위트홈]에 등장하는 욕망덩어리 괴물을 표현한 느낌이랄까. 어쩌면 이웃의 덩어리 부부는 에밀과 줄리에뜨 몸 속에서 떨어져나온 엽기적인 덩어리가 아닐까 하는 좀비스러운 상상도 해보았다.

사람은 자기 안에 정체되어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갖고 있지.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잃고 체념하는 순간 그게 밖으로 나오는 거야.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희생물일 뿐이야.

 

바른 선을 위해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에밀의 사고가 결국은 베르나르댕을 살해하게 되고 에밀은 다시 동화적인 현실로 돌아온다. 줄리에뜨에게도 숨겨진 에밀의 살인은 결국 묵인되고 일년이 지난 이사 온 바로 다음의 해로 넘어간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1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날처럼.  나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에밀은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살아가는 나날동안 인간은 자신을 잘 알고 간다. 그걸 애써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무서운 진실이 아닌가.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2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Joy

    아, 김남주님 번역 좋지요^^ 번역가를 잘 모르는 제가 알고 있는 몇 안되는 분 중의 한 분이네요^^
    책에서 가져와 주신 문장 중에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는 글이 인상적입니다. 저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과연 진짜 나일까? 아니면 남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 그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괴리가 있을까? 등등 말이예요.
    하루님, 추운 날씨가 계속되니 감기 조심하시구요^^

    2021.01.09 08:1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하루

      프랑스문학쪽으로 시작해보았어요. 김남주님 번역서들이 좋아지고 있답니다. 나의 모습에 대해서 계속 인지하고 있어요.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거 알아가고 있답니다. 이제서야 말이죠. ㅎㅎ 아예 추우니까 더 긴장하고 조심하게 되네요. 건강하자구요. ^^

      2021.01.09 10:45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