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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면 어김없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흙먼지 날리는 바깥에서 잿빛땀을 흘리던 아이들은 제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집으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늦도록 뛰어놀던 아이는 엄마의 지청구를 들으며 슬픈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녁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지, 해는 왜 이리 빨리 지는지, 내일은 언제 또 오려나, 놀이가 하루의 일과인 아이는 저녁시간과 잠자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게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기 롤랑이 걸린 기억상실증은 하나의 장치이자 연출이 아닐까. 그의 기억여행은 영상으로 그리기엔 환상적이지도 스펙타클하지도 않다. 그러니 지난 시간이란 물리적 개념을 인간이 그의 몸과 마음으로 기억하려면 눈에 보이는 혹은 감각으로 느껴지는 어떤 매개가 필요하다. 가령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날 한 잔의 홍차에 찍어먹은 마를렌느의 향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완벽하게 기억해낸다. 프루스트에게는 '콩브레'가 그 시간속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재현해내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파트릭 모디아노에게는 기억의 공간이 없다. 기 롤랑이 어두운 벽을 더듬으며 한발 한발 내딛는 복도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암흑일 뿐이다. 시간제한등이 나온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현관문에 일정 순간동안 켜져 있는 센서등을 말함이라. 잠시 밝아졌다가 이내 꺼지는 시간제한등처럼 그의 기억도 순간에 명암이 달라진다. 그러니 기억의 진위여부를 종잡을 수가 없다.그러나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한번쯤 이런 순간은 끼어들 때가 있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그곳을 건너질러 가는 습관을 익혔다가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기 롤랑의 여정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의미가 없다. 오래되고 두터운 전화번호부는 타인의 삶과 그를 연결하는 장치이다. 기억과 관련된,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방식으로, 지금이라면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실마리뿐 아니라 기억상실의 결론가지 마무리짓겠지만....그렇게 된다면 아주 시시한 추리물이 되어버릴 지 모른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모디아노의 기억의 장치들은 전화번호부에 들어있다. 실제 그의 서재가 나오는 다큐물을 보면 전화번호부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다시 의미없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주인공일 때 주변의 건물이나 사람들은 하나의 객체로써 주인공인 나에게 별 의미가 없다. 당신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라. 나 아닌 주변에 찍힌 타인들은 왜 거기에 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스치는 타인들은 나와 어떤 관련이 있어서 그 곳에 그 시간대에 있게 된걸까.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빡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등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윝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나에게 그 예를 들어 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시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증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가징 긴 챕터 서른일곱번째을 읽어보길 바란다. 산산조각이 난 기억의 파편들을 꿰맞추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 기억들은 온전히 나의 기억들일까, 아니면 간접적이거나 나 아닌 다른 나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 그가 직감하는 그의 과거는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가, 로마


그곳으로 지미 페드로의 삶을 따라 기 롤랑은 발길을 옮길 지 모른다. 누군가의 삶은 곧 누구나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공간을 잃어버린 기억의 편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당신은 당신의 기억들로 인해 행복했던 적이 있는지 묻는다. 좋은 시절이 떠오르는지 묻는다. 나는...나는 그런 기억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엄마의 지청구와 어린 나의 슬픈 표정뿐! 거기에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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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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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바우먼

    전 요즘 잘한일보다 후회되는일, 잘못한 일들이 더 많이 생각이 나네요. 가족한테 미안하고 친구한테 미안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러겠죠..?

    2015.03.02 10:3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하루

      이 책의 주인공은 저랑 아주 다른 성격이예요. 전 지나간 일들에 미련이 없어요. 과거에서 조금씩 멀어져간다는게 때로는 지금은 사는데 덜 버거워요.

      2015.03.15 19:34
  • 파워블로그 꼼쥐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의 의미, 추억의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았어요. 한 인간의 삶, 그 과정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하는 가정도 해보았었죠.

    2015.03.03 19:0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하루

      아주 어릴 적 일도 드문드문 생각나는데요. 과거를 잃어버린 주인공처럼 우리도 살아가는 것 같아요. 같은 상황도 수없이 왜곡을 반복하기도 하고요. 기억을 찾는 일이 어쩌면 혼돈의 순간을 경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2015.03.15 19:37
  • 스타블로거 초보

    똑같은 작품을 읽는데도...천지차이가 있네요....역시 문학에는 타고난 소질, 아님 땀흘린 댓가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015.03.04 09:1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하루

      한 번 더 읽어보려구요. 또 다른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2015.03.15 19:37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