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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도서]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마크 펜더그라스트 저/정미나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도서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에는 제목 그대로 

커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가 담겨 있다.


저자인 Mark Pendergrast 가 미국인이고 

가장 많은 커피 수입국이 미국이라 그런지

미국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몇몇 내용은 과잉 소개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총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통해

커피 정보, 기원, 음용법 발전, 국제관계, 경제, 마케팅 등

다양하고 포괄적인 커피 역사를 알 수 있어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커피 생산국의 참담했던 역사와

이러한 현실에 변화를 주기위한 취지로 기획된 공정커피가 

효과는 미미하고 오히려 마케팅으로 이용됨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치열한 커피 산업의 역사를 통해 

코카콜라처럼 장기간 기업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매일 즐겨마시는 커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어 좋았다.


커피에 관심이 없는 이라면 조금 지루할지 모르나 

관련종사자나 본인처럼 매일 즐기는 이에게는 

유익한 도서라고 평하며 글을 마친다.






p.s. Mark Pendergrast - "The History of Coffee"

https://youtu.be/MAl5KoftD-E




p.s. 커피의 모든 것 ㅡ YTN 사이언스

https://youtu.be/egwtYMfr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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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양면형* 씨앗을 감싸고 있는 열매일 뿐이다.


원래 커피나무는 

에티오피아 고원의 산기슭, 열대 우림 속에서 자라던 관목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각자의 관점이나 신장에 따라 

작은 나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늘 푸른 상록수 잎은 반들반들한 타원형 모양이며, 

씨와 마찬가지로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다.


하지만 커피는 

세계에서 가장 귀한 농산품으로 꼽히는 거대 사업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점유율 높은 향정신성 마약의 최대 원천이다.


아프리카 원산지에서부터 전파된 커피는 

전 지구를 빙 두르며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의 

모든 평원과 산악을 점령해 왔다.





이 커피 열매의 

씨를 볶아서 가루로 갈아 뜨겁게 달인 액체는 

그 달콤 쌉쌀한 향기, 정신을 번쩍 나게 해 주는 각성 효과, 

사회적 결속 효과로 사람들의 애호를 받고 있다.


시대에 따라 

최음제, 관장제, 신경 강장제, 수명 연장제로 처방되기도 했다.




* 양면형 : 조리퐁처럼 가운데에 선이 들어간 모양을 가리킴.




     p 021, 022

        흙탕물인가, 만병통치약인가?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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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약 1억 2천5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소위) 밥줄이 되어 주고 있다.


또한 상당히 노동 집약적인 작물이어서, 

손바닥에 못이 박힌 손으로 씨를 뿌려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묘목을 그늘막 아래에서 돌보다 산기슭으로 옮겨심기, 

가지치기와 비료 주기, 살충제 뿌려 주기, 물 대 주기, 수확하기, 

커피 열매를 90킬로그램들이 자루에 담아 질질 끌어 나르기 등 

이만저만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일꾼들은 

과육과 점액질을 제거해 귀한 커피콩을 꺼내는 

까다로운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꺼낸 커피콩은 건조를 위해 며칠 동안 쫙 펼쳐 놓은 후에 

(혹은 드럼통 속에 넣어 열처리를 거친 후에), 

내과피와 은피를 제거하는 과정까지 거처야만 그제야 자루에 담겨져 

로스팅(생두 볶기), 그라인딩(분쇄), 브루잉(추출) 을 위해 전 세계로 선적된다.




     p 022

        흙탕물인가, 만병통치약인가?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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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품질은 어떻게 판단할까?


커피 전문가들은 완벽한 커피의 4대 기본 요소로 

아로마, 바디, 산도, 풍미를 꼽는다.


아로마(aroma)란 익히 들어 봐서 잘 알 테지만, 

대개 맛이 전해주는 것 이상의 기쁨을 약속해 주는 향기를 뜻한다.


바디(body)는 

입안에 커피를 머금었을 때의 질감, 

혹은 '무게감'을 일컫는 말로, 

혀 위를 구르는 느낌과 목으로 넘어갈 때 

목의 충만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산도(acidity)는 

생기와 산뜻함을 주는 요소로서, 

기분 좋은 자극을 더해 주는 짜릿한 맛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풍미(flavor)는 

입안에서 순간적으로 확 퍼졌다가 

미각의 기억으로 남게 되는 미묘한 맛이다.


커피 전문가들은 이런 요소들을 묘사할 때면 지극히 시적이 된다.


이를테면, 커피 애호가 케빈 녹스 Kevin Knox는 

술라웨시 Sulawesi 커피에 대해 

"버터 카라멜의 달콤함에 풀과 비옥한 흙 내음이 묻어나는 맛"이라고 썼다.




     p 023

        흙탕물인가, 만병통치약인가?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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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역사가 이안 베르스텐 Ian Bersten 의 견해에 따르면, 

블랙커피를 마시는 아랍인들의 기호와, 

우유를 타서 마시는 유럽인의 기호 (궁극적으로 말해, 미국인의 기호) 

차이에는 어느 정도 유전적 특징이 연관되어 있다.


앵글로색슨족은 우유에 내성이 있지만 지중해 연안의 민족들, 

즉 아라비아, 그리고 키프로스 섬, 이탈리아 남부의 사람들은 

대체로 유당분해효소가 결핍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지중해 연안 사람들은 

아무 것도 섞지 않은 스트레이트 Straight 커피를 마시면서 

가끔 설탕만 듬뿍 넣는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 베르스텐의 주장이었다.


"유럽의 양 끝단에서 마침내 

이 새로운 상품의 두 가지 전혀 다른 추출방식이 개발되었다.


북유럽의 여과 추출법과 남유럽의 에스프레소 스타일이다.


이탈리아의 카푸치노에 우유가 더 적게 들어가게 된 것은, 

우유에 대한 불내성(不耐性) 때문일지 모른다. 


우유의 양이 적을수록 우유 불내성 문제가 최소화되었을 테니까."




     p 049, 050

        콜시츠키와 낙타 사료

           제1장  커피의 세계 식민지화

              제1부 - 정복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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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에 이르러, 

뜨겁게 마시는 이 커피의 인기가 너무 치솟자 

보다 못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성명까지 발표하며 

독일에서 커피보다 전통 깊은 음료의 편을 들어 주었다.


"짐의 백성들이 커피를 마시는 양이 점점 더 늘고 있다니, 

또한 그로 인해 이 나라에서 점점 더 많은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짐의 백성들은 맥주를 마셔야 마땅하다.


짐은 맥주를 마시며 컸고 짐의 선조들도 그러하였다."


4년 후, 급기야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식적인 정부 시설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커피 로스팅을 금지시켰고, 

어쩔 수 없이 빈민들은 

볶은 치커리 뿌리, 말린 무화과, 보리, 밀, 옥수수 따위의 

커피 대용품에 의존해야 했다.


진짜 커피콩을 어렵사리 손에 넣어 몰래 볶아 파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부의 첩자들이, 속칭 커피 냄새 맡는 개코라는 

경멸적인 이름까지 들어가며 이런 밀매업자들을 잡아냈다.


하지만 커피는 결국 독일의 온갖 탄압 시도를 견디어 냈다.


특히 부인들 사이에서 카페클라츠 Kaffeeklatch 

즉 커피를 마시면서 잡담하는 모임을 아주 즐기게 되었는데, 

커피에 여성적 이미지가 강해진 데에는 이러한 내력이 얽혀 있다.




     p 051

        천번의 키스보다 더 감미로운

           제1장  커피의 세계 식민지화

              제1부 - 정복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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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밀레이아 바스타트릭스는 일명 녹병균 rust 으로 불린다.


처음엔 커피 잎 밑면에 

녹이 슨 것처럼 누르스름한 갈색 얼룩이 생겼다가 

나중엔 검게 변하면서 옅은 오렌지색 가루의 포자를 번식시키며 

전염되어 퍼지기 때문이다.


이 얼룩 이 점차 커져서 잎 전체를 덮으면 잎은 가지에서 떨어진다. 


그런 식으로 마침내 잎이 다 떨어지며 나무가 죽고 만다. 





이 녹병은 처음 출현했던 해에 실론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이후에 진정국면에 들어서는 듯 보이면서 

풍작과 흉작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시름에 잠긴 커피 재배업자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농장주들은 화학약품을 써보기도 하고 

병에 걸린 잎들을 떼어 버리기도 해 봤다. 


하지만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이 녹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이용되는 그늘나무 dadap(다답) 때문이라 거나, 

지나친 습기 때문이라는 둥 여러 가지 이론이 무성했다. 


사실, 이 곰팡이는 

습한 환경에서 왕성하게 번식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진범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단종 재배였다. 


인간이 개입하여 특정 식물을 인위적으로 번성시킬 때마다 

자연은 기어코 이 풍부한 먹이감의 약점을 찾아낸다.


사실, 이런 일이 없다면 커피나무는 강한 편이다. 


카페인이나 코카인 같은 향정신성 알칼로이드 함유 식물들은 

거의 전부가 열대지방에서 자란다. 


실제로, 열대 우림에서 

독특한 마약성분 함유 식물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휴식 기간을 제공해 줄 겨울이 없는 탓에 

생존 경쟁이 아주 치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식물들이 보호 매커니즘으로서 런 마약성분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커피의 카페인 함유도 

해충을 막기 위한 천연 살충제로서 진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커피나무 재배지 면적이 방대해짐에 따라 

어떤 심술궂은 작은 빌레나 균류가 그 풍부한 금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커피가 실론에서처럼 자바에서도 

대실패작이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인 듯하다. 

곳곳의 커피나무들이 

겉보기엔 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고 

그 열매들이 여전히 신선해 보이고 푸릇푸릇한 것 같겠지만, 

검게 변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열매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고 있다." 


1886년에 에드윈 아놀드가 쓴 글인데, 

그의 상황 지적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실제로 전통적 커피의 보루였던 이곳이 

그로부터 얼마 뒤에 주요 작물을 차로 바꾸었으니 말이다.



커피 녹병이 유행하자 

당시에 널리 경직되던 아라비카 품종보다 

내성이 강한 커피 품종을 찾기 위한 광풍이 일어났다. 


아프리카 국가 라이베리아 Liberia가 원산지인 

코페아 리베리카 Coffea liberica 가 

처음엔 가망이 있어 보였으나 이 품종 역시 녹병을 이기지 못하고 

코페아 아라비카보다 생산량이 더 적자 

커피의 맛이 만족스러웠음에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우간다 원주들이 즐겨 씹던 

코페아 카네포라 Coffea canephora 가 

벨기에령 콩고의 백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 초창기 홍보자가 로부스타 robusta*  라고 이름 붙인 이 품종은 

재배해 보니 내성이 있는데다 열매를 많이 맺었고, 

고도가 낮은 지대에 습도가 높고 기온이 더 따뜻한 조건에서도 잘 자랐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강인한 품종은 커피의 맛이 거칠고 

아라비카보다 카페인 함량이 두 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robusta : 'robust' 에서 따온 말로 '튼튼한', '강건한'의 뜻을 지니고 있음.




     p 097 ~ 099

        바스타트릭시의 습격

           제2장 커피 왕국, 브라질

              제1부 - 정복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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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미국의 소비자와 정치가들의 아우성이 갈수록 거세졌다.


수년간 이어진 커피 위기동안 

브라질 농민들이 처했던 곤경에는 

별 관심도 없던 미국 시민들이 

자신들이 마시는 모닝커피 가격이 몇 페니 오르자 

그제야 갑자기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1911년 3월, 네브래스카주 하원의원 

조지 W. 노리스 George W. Norris가 법무장관에게 

"커피 산업의 독점"에 대해 

조사하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을 발기했다.


법무장관 워커샴은 진행 중인 조사를 수행하겠다고 응했다.



4월에, 노리스는 하원에서 

가격 안정책용 대출 절차를 간략히 설명하며 

이 커피 신디케이트를 호되게 비난했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거대 조합은 문명 세계 전역에서 

커피의 공급과 판매를 통제해 왔다.


[그들은] 시가가 폭락되지 않을 만큼의 양만을 팔았다."


그는 여기에 브라질이 관여된 것에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하여, 

한 상품을 독점하려는 단체가 국내의 기관과 결부되면 

그 단체는 이른바 트러스트라는 것이 되어 

깨뜨리기 힘들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단체의 배후에 강국의 힘과 영향력이 있다면 

이른바 '가격 안정책'이라는 

그럴듯한 새로운 호칭이 붙게 된다.


이것은 흔한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한마디로 한 단체에 의한 강탈질이다."




     p 157, 158

        커피 가격에 미국이 아우성을 터뜨리다

           제5장 허먼 질켄과 브라질의 가격 안정책

              제1부 - 정복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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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을 둘러싼 당대의 대중적 논란으로 인해 기업가들은 

원래부터 카페인이 함유되지 않은 커피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네 가지 품종의 커피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마다가스카르 Madagascar 에서 자라는 품종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품종들의 볶은 씨로 만든 음료는 쓰고 맛이 없었다.


유명한 농학자 루서 버뱅크 Luther Burbank 는 

맛이 괜찮은 잡종의 개발이 바람직한 방법이리라 확신한다며,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열대지방에서 수년간 실험해야 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나는 절대로 커피 묘목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이 없다.


다른 기후대로 이사를 가야할 테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뒤이어 의미심장한 의문을 덧붙였다.


"카페인 섭취에 따라 활기를 얻는 효과가 빠진다면, 

과연 사람들이 커피를 마실까?


마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판단할 문제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뱅크의 의문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답이 제시되었다.


직업적인 커피 시음가였던 아버지가 과도한 카페인 섭취로 인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굳게 믿고 있던 

독일의 상인 루드빅 로젤리우스 Ludwig Roselius 가 

생두에서 카페인을 추출해 내는 데 성공했다.


증기로 생두를 과열시킨 다음 벤젠 용제를 이용해 

카페인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 추출방법에 대한 특허를 얻어 1906년에 자신의 회사를 세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의 디카페인 커피는 

독일에서는 카페아그 Kaffe Hag, 프랑스에서는 상카 Sanka (무카페인), 

미국에서는 머크 Merck 제약사 상품의 디카파 Dekafa 

라는 이름을 달고 시장에 출시되었다.


그 뒤로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경쟁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역시 독일인인 로버 휘브터 Rober Hübner 가 19911년에 미국 시장에 

자신의 휘브너헬스커피 Hübner Health Coffee 를 내놓으며 

화학 용제를 사용하지 않은 순수 물 가공 pure-water process 을 통해 

카페인을 추출했다고 주장했다.




     p 193

        디카페인의 탄생

           제6장 마약 음료

              제1부 - 정복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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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에 들어서며 커피 가겨이 뛰자, 

(두 사업가가 선호하던 호칭대로) 

A.H. (Austin Herbert Hills) 와 R.W. (Reuben Wilmarth Hills) 는 

1884년에 소매 판매에서 손을 떼고 도매사업으로 관심을 돌렸다.


1886년경에는 R.W. 가 컵 테스팅을 채택했다.




컵 테스팅이란 샌프란시스코의 동료 커피업자 

클라렌스 빅포드 Clarence Bickford 가 

태평양 연안에서 개척해 놓았던 것으로, 

커피 커퍼 coffee cupper 는 와인 시음가처럼 

커피를 입안 가득 후루룩 머금고 입안에서 신중히 굴렸다가 

옆에 있는 타구(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에 뱉는 식으로 시음을 했다.


이런 커핑 의식은 커피업계의 

비교적 진지한 (그리고 지켜보기가 우스운) 의식 중 하나로서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p 211, 212

        힐스브라더스, 진공팩을 이용하다

           제7장 성장통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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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서전쟁* 중에 힐스브라더스는 

미군에 어마어마한 양의 버터를 팔았다.


그런데 이 버터는 

미군이 필리핀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 

염수로 방부 처리되면서, 맛에서 아쉬움이 많았다.


1899년, R.W. (Reuben Wilmarth Hills) 는 

대륙 횡단 출장길에 시카고에 들렀다.


힐스브라더스는 벌크 원두의 소매상용 디스펜서를 만들었던 

노튼브라더스 Norton Brothers를 찾아가 

더 좋은 버터 포장법이 없을지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노튼브라더스에서는 진공포장법 개발을 막 완수한 상태였고, 

이 포장법은 소금에 절이지 않고도 버터를 보존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로스팅한 커피는 공기에 노출되면 

금방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았던 

R.W. 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진공포장이 커피에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과연 효과가 있었다.


힐스브라더스는 발 빠르게 노튼브라더스 측과 협상에 나서서 

그 진공포장법에 대해 태평양 연안에서의 

1년간 독점사용권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샌프란시스코 회사들은 

13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진공포장을 채택했을 뿐더러, 

그 나머지 지역에서는 이보다도 더 오래 걸렸다.



1900년 7월에 출시된 힐스브라더스 최초의 진공팩에는 

과대 주장의 문구가 떡하니 찍혔다.


자사의 하이스트그레이드자바 Highest Grade Java 와 

모카커피 Mocha Coffee는 

"밀봉을 뜯지 않는 한 신선도가 영원히 유지된다"고.


신빙성 없는 주장이었지만, 

그래도 진공포장이 상품의 품질과 신선도를 

개선시켜 주었던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다.



* 미·서전쟁 : 쿠바섬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p 212, 213

        힐스브라더스, 진공팩을 이용하다

           제7장 성장통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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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에, 칙은 완벽한 블렌딩을 찾았다는 믿음에 이르렀다.


그는 내슈빌의 유명한 호텔인 맥스웰하우스 Maxwell House 의 

식료품 구매 담당자, 미스터 블레드웰 Bledwell 을 찾아가 

무료로 9킬로그램을 제공해 줄 테니 시험 삼아 써 보라며 설득했다.


며칠 후에 그 커피가 다 떨어지자 

호텔 측은 다시 예전 브랜드를 사용했다.


그런데 블레드웰의 귀에 고객 불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주방장에게 브루잉 방법에 무슨 변화라도 주었느냐고 묻자, 

주방장은 그게 아니라 단지 

칙의 블렌딩 커피가 더 맛이 좋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맥스웰하우스에서는 

칙의 원두를 구매하게 되었고, 6개월간 시험사용 후에 

그 블렌딩에 호텔의 이름을 붙이게 해 달라는 

그의 요청까지 받아주었다.





1893년, 40세의 조엘 칙은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나와 

존 노튼 John Norton 과의 합작으로 식료품 도매 회사를 시작하며 

커피를 전문으로 취급했다.


1900년에는 이 사업에 존 닐도 가세했다.


닐은 칙과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 

한때 그의 밑에서 일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노튼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칙과 닐은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내슈빌커피&매뉴팩처링컴퍼니 

Nashville Coffe and Manufacturing Company 를 설립하는가 하면, 

마침내 사명을 칙닐 커피컴퍼니 Cheek-Neal Coffee Company 로 바꾸면서 

내슈빌 전역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한편 1905년에는 텍사스주 휴스턴 Houstton 에 로스팅 시설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또 5년 후에는 

플로리다주 잭슨빌 Jacksonville 에 공장을 새로 짓고 

1916년에도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 Richmond 에 공장을 하나 더 짓는다.


칙의 여덟 명의 아들들도 하나둘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거들게 된다.



특히 큰아들은 판촉과 광고의 귀재로서 소질을 드러냈다.


그 한 사례가 자사의 커피를 

사회적으로 중요한 상징으로서 연상시키려는 시도였다.


가령 그는 1907년부터 품위 있는 삽화들과 함께 

흰색의 공간을 많이 활용하여 광고를 기획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과 함께 

"고품질 커피" 라는 문구를 붙이며, 다음과 같은 카피를 내걸었다.


"커피의 가치를 아는 주부라면 누구라도 

맥스웰하우스 블렌딩의 뛰어난 품질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맥스웰하우스 블렌딩은 

우수한 품질을 위해 엄격한 기준에 따라 거래되며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커피 기관으로부터 후원받고 있습니다."


고급품이라는 점을 내세운 

스놉어필 snob appeal 광고를 통한 

맥스웰하우스 블렌딩의 차별화 효과는, 

전통적으로 브라질산이나 곡물로 묽게 만든 

저렴한 블렌딩이 우세하던 남부에서 특히 성공했다.



같은 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슈빌의 유명한 휴양지 허미티지 Hermitage 를 찾았다가 

맥스웰하우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런데 이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활기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맛있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어."


몇 년 후 조엘 칙은 이 말을 맥스웰하우스 커피의 선전 문구로 삼았다.


1908년에 내슈빌시 인명부 Nashville City Directory 에 실린 한 광고에서는, 

맥스웰하우스 커피가 

테디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애칭) 의 활력을 돋워 줬을 뿐만 아니라 

"애틀랜타에서 태프트 대통령 당선자와 1천여 명의 손님에게 서빙되었다" 

고 과시하기도 했다. *





*  어쩌면 테디 루스벨트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다" 는 말을 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어째서 

이 1908년도 광고에 그 문구를 넣지 않았겠는가?


맥스웰하우스 커피의 광고에 

이 문구가 처음 들어간 것은 분명히 1920년대였고, 

이미 1908년에 코카콜라에서 자사의 음료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상쾌하다"는 슬로건을 내건 적도 있었다.




     p 222 ~ 224

        조엘 칙, 맥스웰하우스를 만들다

           제7장 성장통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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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하게 블렌딩된 

풀바디의 풍부한 아로마 커피를 골라 세심히 우리면 (…)

묵직하고 섬세하며 기분 좋은 음료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평범한 커피 음용자에게 가져다주면 

그 사람은 "맛이 별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 똑같은 커피를 가지고 

섬세한 특성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팔팔 끓여 잿물같이 우려서 같은 사람에게 주어 보면 

이번엔 기뻐하며 이렇게 외칠 것이다.


"그래요! 바로 이게 커피죠!"


ㅡ 찰스 트리그(Charles Trigg), 커피 연구가, 1917년




     p 237

           제8장 커피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안전지대로 만들기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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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라틴아메리카가 가장 신뢰할 만한 고객층으로서 

미국을 새롭게 주목하도록 만들어 놓은 동시에 

참전자 세대가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의 음용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도 종종 산패되고 질 낮은 커피콩과 결부되는 양상으로. 



전쟁 전까지 함부르크와 르아브르 Le Havre 의 항구 

그리고 이 두 곳보다는 비중이 좀 떨어지지만 

앤트워프 Antwerp 와 암스테르담 Amsterdam 역시 

세계 커피 물량의 절반 이상을 호령하고 있었다. 


독일의 커피 재배업자와 수출업자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수입업자들은 전통적으로 최상급의 등급을 수입했다. 


유럽인들은 상급의 커피를 사기 위해서라면 

돈을 더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서 

미국인들에게는 하급품만 남겨졌다.



미국 항구로 들어오는 커피의 대부분은 외국선박에 실려 왔다.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한 

미국의 상선을 보강하기 위한 법이 방치되면서 

미국은 다른 나라의 선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쟁 포고가 개시되자 

전쟁국의 국기를 단 배들은 침몰할까봐 출항을 못하고 

항구에 묶여 있게 되었다. 


그에 따른 임시변통적 법이 서둘러 제정되면서 

이제 외국에서 건조된 배들도 미국인이 등록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구아노 guano (새똥 비료)를 실어 나르는 것으로 

떼돈을 벌던 W.R.그레이스&컴퍼니 W.R. Grace & Company 같이

전에는 커피를 운송해 본 적도 없던 회사들이 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편 혼란스러운 전시경제 상황 속에서 

뉴욕 커피 거래소가 4개월 동안 문을 닫았다. 


급기야 1914년 9월에 커피업계지의 한 사설에서는 

미국의 커피업자들에게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남미의 상업은 그 근접성을 감안하면 우리의 차지어야 마땅한데" 

그동안 대부분이 유럽 자본에 장악당해 왔다며, 


"이제는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이 

자국 영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우라 어쩔 수 없이 

남미의 무역 기반을 방치하고 있으니 

미국의 세일즈맨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때가 무르익었다"는 요지였다. 


게다가 이제는 커피콩의 큰 시장은 미국뿐이라 

커피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뉴욕이 금융과 상업의 세계 중심지로 떠올랐습다." 


1915년에 한 은행가가 

미국의 로스팅업자들에게 해 주었던 말이다.


실제로 영국은 

세계 비즈니스의 정보센터로서의 지위를 미국에게 내주고 말았고, 

뉴욕의 내셔널시티뱅크 National City Bank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본테비데오 Montevideo, 리우데자네이루 산투스, 상파울루 아바나 Havana 

에 속속 지점을 열면서 미국은 순조롭게 무역 균형을 발전시켜 나갔다.




     p 237 ~ 239

           제8장 커피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안전지대로 만들기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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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새로 나온 솔루블커피 soluble coffee (가용성 커피), 

즉 '인스턴트커피'를 크게 띄워 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1906년에 과테말라에 살고 있던 

(또한 알려진 바로는 미국 초대 대통령의 방계 후손이던) 

조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의 벨기에인이 

브루잉한 커피에서 추출한 커피 결정체를 

정제하려는 착상을 생각해냈다.


1910년 무렵, 

워싱턴은 이제 미국의 시민으로 뉴욕에 살면서 자신의 

G. 워싱턴 G. Washington 사의 이름으로 

리파인드커피 G. Washington's Refined Coffee 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 인스턴트커피는 갓 로스팅한 원두로 브루잉한 

커피의 향이나 맛, 바디가 담기지는 않았으나, 

신기하게 즉석에서 타먹을 수 있는데다 

진짜 커피 같은 맛이 나고 

커피와 똑같이 따뜻한 온기와 카페인 섭취의 효과를 주었다.


지속적인 광고와 기발한 판촉을 통해 이 인스턴트커피는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부터 유명해졌다.





1918년 여름, 미 육군은 

G워싱턴의 생산분 전량을 병사용 식량으로 징발했고 

회사에서는 재빨리 이 사실을 광고로 냈다. 


"G. 위싱턴의 리파인드 커피가 

전쟁에 함께 참가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이 인스턴트커피에 감사해 하는 고객들도 있었다. 


다음은 1918년에 참호 근무를 하던 한 보병이 쓴 글이다.


"쥐들, 쏟아지는 비, 질척대는 진흙, 가뭄, 

대포의 굉음, 탄피의 쇳소리 속에서도 나는 정말 행복하다. 


단 1분이면 

내 작은 석유 히터에 불을 켜서 

조지 워싱턴 커피를 타 마실 수 있다(…) 


매일 밤마다 [워싱턴 씨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게 된다." 


또 다른 병사는 이렇게 썼다. 


"독일을 격파시켜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가장 먼저 찾아가고 싶은 한 신사가 있다. 

바로 브루클린의 조지 워싱턴 씨다. 

그분은 우리 병사들의 친구다." 


보병들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조지" 한 잔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반사일 정도였다.



이에 다른 커피 로스팅업자들도 

서로 앞 다퉈 인스턴트커피를 개발했는가 하면 

미국의 솔루블 커피 컴퍼니 오브 아메리카 

Soluble Coffee Company of America 같은 

몇몇 신설 회사들까지 속속 생겨났다. 


1918년 10월 무렵, 

육군에서 요청하는 인스턴트커피의 분량은 

일일 316,783 킬로그램에 달했으나 

미국 내 전체 생산량은 2,721 킬로그램에 불과했다. 


그러다 1918년 11월에 전쟁이 끝나며 

갑자기 인스턴트커피의 시장이 없어지자 

생산업자들 상당수가 폐업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G워싱턴사는 살아남았지만 

수많은 신봉자들을 끌어내지는 못했고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진까지는 

인스턴트커피의 부흥을 되살리지 못했다.




     p 242 ~ 244

        병사들의 조지 한 잔

           제8장 커피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안전지대로 만들기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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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무렵, 자바에서 재배되는 커피의 

80퍼센트는 로부스타 품종이었다.


로부스타는 

카페인 함량이 높고 질병에 강한 대체 품종으로, 

잎 녹병균인 헤밀레이아 바스타트릭스가 

동인도의 아라비카 품종을 고사시키고 있던 

1898년에 벨기에령 콩고에서 발견되었다.


보다 섬세한 풍미를 지닌 품종인 사촌뻘의 아라비카와는 달리, 

로부스타는 (튼튼하게 잘 자란다는 의미의 이름처럼) 

해수면에서부터 3천 피트(914미터) 고도까지 

어디에서든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열매가 열리는 양도 훨씬 더 풍성했다.


또한 아라비카보다 이른, 2년생부터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단점은 딱 하나, 우려마실 때의 맛이었다.


최상급의 로부스타조차 맛이 거칠고 밍밍하고 썼다.


그래서 아라비카와 블렌딩을 하면 

아라비카의 맛이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바와 수마트라의 고무나무 사이에 있는 

로부스타 재배를 감독했던 네덜란드인들은 

로부스타에 입맛을 들이게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렇게 되어 

당시에 네덜란드에서는 로부스타의 소비량이 

브라질산 아라비카의 소비량을 앞섰다.



1912년에 뉴욕 커피 거래소는 

세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로부스타 연구를 맡겼다.


이 위원회는 로부스타가 하급 산투스산과 비교해도 

"거의 쓸모없는 생두"라고 결론지으며, 

거래소에서의 거래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자바산 로부스타의 라벨에 전통적으로 

최상급 아라비카로 통하는 '자바'가 찍혀 유통될까 봐 

각별한 우려를 표하기까지 했다.



일부 로부스타 묘목이 잠깐 브라질에 수출되긴 했으나 
브라질 측에서 신속히 수입 금지를 취했다.


아직까지 서반구의 커피 재배지까지 확산되지 않은 

잎 녹병균 포자가 유입될까 봐 염려되어 취한 조치였다.


하지만 다른 곳, 특히 헤밀레이아 바스타트릭스 때문에 

다른 커피 품종을 다루기가 어렵게 된 곳에서는 

로부스타를 재배하는 이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인들이 

로부스타 원두에 시장성을 갖게 해 준 덕분이었다.


어느새 인도, 실론, 아프리카에서는 

버려진 차 농장이나 커피 농장, 

혹은 커피가 한 번도 재배된 적 없던 뜨거운 저지대에서 

튼튼한 루부스타 묘목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p 249, 250

        로부스타가 아니면 죽음을

           제8장 커피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안전지대로 만들기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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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는 금주법, 적극적 홍보, 대중의 사교 열풍에 힘입어 

미국의 대도시마다 커피하우스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1923년에 「뉴욕타임스」에서 

"커피에 취한 뉴욕" 이라는 부제의 기사를 실었을 지경이었다.


이 부제에는 "뉴욕이 그렇게 흥분에 들떠 있는 것, 다시 말해, 

그렇게 활기에 넘치는(jazzed-up)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 

이라는 부연설명까지 달렸다.


커피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재즈 시대로 들어섰다.

(또한 재즈 시대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위 기사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아침으로 커피만 마시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또한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나서 활력제로 

하루 중 아무 때고 커피를 찾고 있다."



같은 해, 미국의 

1인당 커피 소비량은 약 6킬로그램으로 올랐는데, 

이 정도의 양은 지난 수년 동안 4.5킬로그램이나 5킬로그램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것과 비교되는 수치일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이 전 세계 공급량의 

절반을 소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였다.




     p 256, 257

        커피하우스, 부활하다

           제9장 재즈 시대의 이미지 장사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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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29일 뉴욕의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모든 희망도 함께 무너졌다.



미국의 주식시장 붕괴 2주 전에 

커피 시장이 무너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 당시 커피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 였다.


커피가 국제 교역에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번창하던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의 커피 제왕들도 그런 번영이 영원할 거라 자만했다.


주식시장 붕괴 바로 얼마 전인 10월 17일에, 

미국의 한 경제학 교수는 주식 가격이 

"영원히 하락하지 않을 고지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와 다르지 않게, 

파울리스타들 역시 착각에 빠져 자신들은 불멸할 줄로 믿었다.


또한 미국 투자가들이 신용매입을 했듯, 

창고에 보관된 커피의 서류상 가격이 점점 더 높아지자 

그것을 담보로 삼아 더 높은 액수의 대출을 받았다.


그러다 결국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그 모든 커피의 무게에 파묻히고 말았다.


1930년대에 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그 뒤로 수년간 커피는 물론 거의 모든 것의 가격이 하락하고 

대량 실업에 시달리는 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검은 음료를 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 282

        대규모 주식매매 ㅡ 커피의 몰락

           제9장 재즈 시대의 이미지 장사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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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진공캔 용기의 인기와 산패된 커피에 대한 광고 덕분에 

소비자들은 점점 커피 상식이 높아져서, 

이제는 갓 로스팅하고 갓 분쇄한 커피야말로 이상적인 커피이며, 

커피는 서늘하고 밀폐된 용기에 담아 보관한 후에 

빨리 우려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대공황기는 

커피의 품질에 역설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선 저렴해진 가격과 더 높은 수준의 교육 덕분에 

소비자들은 콜롬비아산이나 케냐산이 

세계적으로 좋은 커피에 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고급 커피를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다.


또한 원두가 산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적절한 분쇄를 고르고, 

드립식이나 진공식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우리기 위해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질 낮은 원두로 

저가의 블렌딩 제품이 생산되었는가 하면 

로스팅 후에 의도적으로 왕겨를 섞어 분쇄하기도 했다.




     p 318 ~ 320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거나

           제11장 불황 속의 나 홀로 호황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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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와 1930년대에 유럽의 커피 산업 발달은

미국의 커피 산업 스타일과 비슷했으나

권력 집중화, 과대 선전, 가격 인하 경쟁 면에서 그 정도가 덜 했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같은)

북유럽의 소비자들은 대체로 미국과 비교해

1인당 커피 소비량도 더 높고 더 상급의 커피를 찾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의 경우엔

이제 아라비카 원두에 로부스타 원두를 섞으면서

로부스타의 쓴 맛을 가려 주는 다크 로스팅을 즐겼다.

남쪽으로 갈수록 로스팅이 더 다크해지는* 경향을 띠면서,

이탈리아 남부는 원두의 빛깔이 거의 숯 빛이 될 만큼 로스팅했으나

이탈리아 북부는 적당한 로스팅을 선호했다.


또한 유럽 대다수 지역에 걸쳐 고급스러운 드립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가정주부들 대다수가 여전히 가정에서 생두를 로스팅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프랑스에서도

​1930년대에 ("순간의 압력으로 추출하는")

새로운 에스프레소 방식이 점점 인기를 끌었다.


에스프레소 커피는아주 미세한 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을 높은 압력으로 통과시켜 추출하는 방식으로

30초 이내면 브루잉이 끝나며,

짙은 빛깔과 풍부하며 복합적이고 농축된 맛을 띠고

위쪽에는 엷은 갈색의 크레마(거품)가 풍부하게 형성되며 향도 그윽하다.


​1901년에 이탈리아인 루이지 베제라 Luigi Bezzera 가

최초의 상업용 에스프레소 기계(espresso machine) 를 발명했다.

마개, 손잡이, 게이지가별도로 장착되고

이 각 장치의 위쪽에 반짝거리는 독수리를 얹어 놓은

인상적이고 멋지며 정교한 물건이었다.65





데지데리오 파보니 Desiderio Pavoni 는

베제라의 특허와 더불어 테레시오 아르두이노 Teresio Arduino 등

이탈리아의 다른 발명가들의 특허도 사들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한 시간에 1천 잔의

에스프레소 추출이 가능한 증기압력식 머신을 생산했다.


1930년대 무렵에는 이런 에스프레소 머신들이

유럽 전역의 카페와 미국의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으로 퍼져 있었다.


빠르게 농축 추출되는 이런 머신의 이점 중 하나라면, 

하등급 원두의 모든 특징을 가려 준다는 것이었다.


사실, 값싼 로부스타 블렌딩으로 풍부한 크레마가 형성되었을 정도니까.



* 로스팅은 볶는 강도에 따라

라이트 로스팅(약배전), 미디엄 로스팅(중배전), 다크로스팅(강배전) 

으로 분류됨


65 - 압력식 커피 추출기들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9세기 유럽에서였다.​


1933년에 프란체스코 일리 Francesco Illy는 트리에스테 Trieste 에서

illycaffé (소문자 'i' 의 표기는 오타가 아님) 를 시작했다.

그는 2년 후에 개선된 에스프레소 머신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커피 가루 사이로 물을 통과시키는 데 증기를 이용하지 않음으로써 

과잉 추출을 막아 주는 방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활성가스*로 압력을 가해 포장하는

아라비카 단품종의 에스프레소 블렌딩도 개발했다.

* 불활성가스 

; 다른 원소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안정된 기체로서,

희가스류 원소인 아르곤, 네온, 헬륨 등을 말하며, 

넓게는 질소나 이산화탄소도 포함됨.

…​

1930년대 말에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의 한 회사가

커피의 세계로 진입하기도 했는데, 바로 네슬레였다.

오래전인 1867년에 스위스 브베 Vevey 에 정착한

독일의 화학자 앙리 네슬레 Henri Nestlé​ **는

모유 수유를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유아용 유동식을 개발했고,

1900년 무렵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생산 시설을 세우면서

연유도 같이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30년 동안 이 다국적 음료회사는

초콜릿과 과자류를 상품 목록에 추가해 나가면서

전 세계에 공장과 자회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1938년, 8년의 실험 끝에 네슬레는 네스카페 Nescafé 를 런칭했다.

출시 이후 전 세계의 수많은 소비자들의

커피 음용 방식에 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이 네스카페는

기존보다 개선된 분말형 인스턴트커피로서,

브루잉한 커피를 결정체가 농축될 때까지 끓이는 드럼식 방식 대신에

브루잉한 커피액을 뜨겁게 가열된 타워형 장치 9에 분사시켜서

그 즉시 커피 방울이 분말로 변하게 만드는 방식을 통해 생산되었다.

또한 풍미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하에

같은 양의 탄수화물(덱스트린, 포도당, 맥아당)을 첨가하기도 했다.

네슬레는 그 다음 해부터 미국에서의 네스카페 마케팅에 돌입했다.




     p 325 ~ 329

        유럽의 커피 무대

           제11장 불황 속의 나 홀로 호황

              제2부 - 격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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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커피 산업은 

전후 시대에 들어서면서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특히 초반에는 네스카페가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미국의 시장을 지배했다.

그리고 국제적 위세를 떨치던 이 스위스 회사는

유럽,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남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자사의 인스턴트브랜드를 출시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미국이야말로 가장 잠재성이 큰 시장이었다.

새로운 인스턴트 브랜드들이 급증하면서

현대적인 미국 소비자들은 편리함을 위해 기꺼이 품질을 양보했다.

특히 1950년에 보통의 로스팅 커피가

파운드당 80센트까지 치솟자

인스턴트를 찾는 수요가 그야말로 급증했다.

인스턴트커피는 높은 타워형 분사 시설과 후처리 공정 시설을 위해

막대한 자본의 지출이 필요했으나 제조비용이 한 잔당 125센트꼴로,

보통의 로스팅 커피보다 1센트 낮았다.

인스턴트커피의 맛은 너무 형편없어서

어떤 원두를 쓰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국의 경제에

달러를 주입하기에 급급하던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값싼 로부스타 원두도 이런 인스턴트커피의 원료로 쓰였다.

게다가 제조업자들은 커피 가루를 과잉 추출함으로써

원두 한 톨 한 톨을 더 알뜰하게 쥐어짜 낼 수 있었다.



인스턴트커피가 인기를 끌면서 뒤이어 자판기도 등장했다.

1947년에 둘 다 군의 기계기사 출신이던

로이드 러드 Lloyd Rudd 와 K. C. 멜리키안 K. C. Melikian 이

5초 만에 종이컵에 뜨거운 인스턴트커피를 담아 주는

퀵 카페 Kwik Kafe 라는 자판기를 선보였다.

러드멜리키안인코퍼레이션 Rudd Melikian Inc. 은 

첫해에 3백 대의 자판기를 팔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회사들도 이들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1951년에 이르러 미국에 보급된 자판기는 9천 대도 더 되었고 

1950년대 중반에는 6만 대를 넘어섰다.

​​

     p 362 ~ 365

        빠르고 편리하고 현대적이지만 맛은 별로인 인스턴트

           제13장 커피 마녀사냥과 인스턴트커피의 단점

              제3부 씁쓸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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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는 그 귀하디귀한 미국의 전통,

커피 브레이크 coffee break 를 

하나의 제도처럼 굳히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커피 브레이크라는 말은 1952년에

범아메리카커피사무국에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연간 2백만 달러의 예산을 지원받던

범아메리카커피사무국이 당시에 라디오, 신문, 잡지를 통해


"여러분 스스로에게 커피 브레이크를 주세요.


그리고 커피가 선사하는 기쁨을 누려 보세요."


라는 카피의 광고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이 말의 시초였으니 말이다.

전시 중에 방위산업체 공장들에서 

실제로 이런 커피 브레이크를 갖기 시작했는데, 

커피 한잔을 위한 이런 휴식 시간은 근로자들에게

카페인의 각성 효과와 더불어 기분 전환의 여유를 주었다.

커피를 위해 잠깐 일을 쉰다는 것은

전쟁 이전에만 해도 사실상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1952년에 설문조사를 실시해봤더니 설문에 참여한 회사들 가운데

80퍼센트가 커피 브레이크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런 커피 브레이크는 병원에서도 시행되었고, 

일요일의 교회 예배 후에 신자들이 

목사들과 커피 브레이크를 갖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하나의 일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범아메리카커피사무국은 전국의 도로에서 

"커피스탑 Coffee Stop" 캠페인을 개시해

운전자들에게 안전운행을 위해 

두 시간마다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실 것을 권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대선 캠페인에서조차 이런 분위기에 합류해, 

커피 브레이클의 개념을 차용한 전략을 세우면서

일명 "커피 파티"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아이크 Ike(아이젠하워의 애칭)를 

"유쾌하고 친근한 식으로" 소개했다.

『룩 Look』지에서 지적했다시피 

커피를 통한 사교의 트렌드가 확산 추세에 있었다.

"주민 회의에서 커피와 디저트가 참석자들의 기분을 띄워 주고, 

커피 파티를 통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기금 마련 행사가 열리고, 

학부모·교사 회의에서 차와 함께 커피를 들며 

매끄러운 의견 교환을 나누는 이 모든 일은, 

여러 사람들에게 인스턴트커피를 타 줄 수 있는 간편함 덕분이다."

이제 사람들은 성가시게 크림이나 우유를 함께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스턴트커피의 멋대가리 없는 짝꿍으로 인스턴트 프림,

즉 가루우유가 출시되기도 했다.

"시간 낭비와 성가심으로부터의 해방."

프림의 광고 문구였다.

​​

      p 365, 366

         커피 브레이크의 개발

            제13장 커피 마녀사냥과 인스턴트커피의 단점

               제3부 씁쓸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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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삭스 같은 수완가들이 큰돈을 벌어들이고

제너럴푸즈, 프록터&갬블, 네슬레, 야콥스는 

대량생산 상품인 캔용기 커피 분야에서

세계의 왕좌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불만에 찬 베이비붐 세대들의 주도로 품질 추구의 물결이 새롭게 일어났다.

이런 주도자들은 대부분이 

히치하이킹으로 유럽을 여행 다녀 봤거나 

군 복무 중 유럽에 주둔해 봤던 경험이 있어서 

에스프레소, 스페셜티 커피하우스 카페가 주는 

즐거움을 느껴 본 이들이었다.

또한 높아진 국제적인 기호를 지니게 되어, 

커뮤니티와 근본적 진리를 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로스터기에서 

갓 볶아 나온 향기로운 통원두에서 찾았다.

특히 버클리로의 순례에서 피츠의 분위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직접 영감을 얻은 이들도 많았다.

제리 볼드윈 Jerry Baldwin, 고든 바우커 Gordon Bowker, 제브 시글 Zev Siegl,

이 세 명의 시애틀 대학생들도 함께 유럽 여기저기를 여행 다녔다.

그러다 이제 20대 후반이 된 1970년 즈음에 다시 시애틀로 돌아왔다.​

그 후 바우커는 지역 잡지에 글을 게재하면서 광고회사를 시작헸고,

볼드윈과 시글은 교사가 되었다.

바우커는 맛좋은 커피를 구하려고 주기적으로

브리티시컬럼비아 British Columbia 주 밴쿠버까지 차를 몰고 갔다.

미식가들을 위한 작은 매장, 

머치스 Murchie's 에서 원두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1970년의 어느날, 

그런 밴쿠버 여정 중에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 그거야. 시애틀에 커피하우스를 내는 거야!"

마침 그 무렵, 볼드윈도 한 친구가 

버클리의 피츠에서 주문한 원두로 만든 커피라며

한 잔 권해 주어 마셨다가 비슷한 착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 친구는 시애틀을 기반으로 삼아

작지만 품질을 우선시하는 로스팅 사업을 시작했다.



…​




이제 오픈 준비는 거의 다 되었고 이름을 지어야 할 차례였다.

"바우커, 시글&볼드윈은 너무 법률회사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소유라는 느낌을 내고 싶어서

첫 문자라도 세 사람 중 한 명의 성에서 따오고 싶었는데, 

그 첫 문자로는 'S'가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Steamers, Starbo 등등 별별 이름들을 다 내놓았다.


그러다 Starbo 라는 단어를 들은 고든의 입에서 

불쑥 'Starbuck' 이 튀어나왔다."

이 이름은 문학도 삼총사의 마음을 끌었다.

스타벅이 『백경』과 『레인메이커 The Rainmaker』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타벅스는 귀에 착착 감기는 어감이었다.



1971년 3월 30일,

가슴을 드러내고 두 개의 꼬리가 달린 

인어를 로고로 내세운 스타벅스가 문을 열었고, 

주로 통원두를 판매하면서 개점하자마자 히트를 쳤다.

첫 9개월간의 가게 총수익은 4만9천 달러로, 

먹고살기엔 빠듯한 수준이었지만 용기를 북돋워 주기엔 충분했다.

세 동업자는 그 다음 해에 제 2호점을 열었고

알프레드 피트는 자체적인 로스터기를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사업이 너무 커지고 있으니 그게 좋겠어요."

세 사람은 1973년에 3호점을 열었다.

볼드윈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행복했다. 

돈은 나보다 직원들이 더 벌었어도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모험이었으니까.


되돌아보면 그 시절은 낭만주의 시대였던 것 같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그런 시대."

​​

      p 450 ~ 452

         스타벅스 : 낭만주의 시대

            제15장 열정가들의 출현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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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때 노르웨이에서 뉴욕시로 건너왔던

에르나 크누첸 Erna Knutsen 은 세 명의 남편을 만나 살아 봤고,

대륙을 가로질러 캘리포니아까지 오게 되는 인생 굴곡 끝에

시간이 좀 걸려서야 자신의 천직을 찾았다.

이미 40대 초반에 들어섰던 1908년, 크누첸은

커피와 향신료를 수입하던 샌프란스시코의 역사 깊은 회사,

비씨아일랜드 B.C.Ireland 에서

(결혼 후의 성인 에르나 게리어리Erna Guerrieri 라는 이름으로)

버트 풀머 Bert Fullmer의 개인 비서로 취직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에 상관의 장려로,

자신만의 작은 분야를 얻게 되었다.

로트 lot 미달분

(총 250자루가 들어가는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양)의

고급 아라비카 생두를 "소점포",

즉 캘리포니아 연안을 따라 속속 생겨나고 있던

작은 로스팅 매장들에게 판매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미각을 발전시키고 싶은 열망에,

상관에게 신비로운 커핑의 기술을 배워 보고 싶다고 말했다.

고객에게 제품을 제대로 귄하려면 

​샘플 원두별 산도 바디, 아로마 풍미를 직접 경험해 보고 나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비씨아일랜드의 커핑실 직원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저 여자가 여기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만둘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크누첸도 어쩌다 그들의 이 말을 엿듣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1973년에 커핑실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제대로 커핑을 해내겠냐며 나를 비웃었다.

내가 처음에 커피를 너무 조심조심 얌전하게 마셔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가 섞이며 풍미를 미뢰에 강하게 분사시켜 주도록

커피 샘플을 후루룩후루룩 큰 소리로 마시는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그녀는 "미각과 감각 기억이 정말 뛰어난 편"이었고

그렇게 커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며,

그녀의 말마따나 "내 생애 가장 위대한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의 열정 어린 전문성은 로스팅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품질 좋은 생두, 아니 그녀가 부르던 식대로 바꿔 말하자면

"녹색 보석 green jewel" 에 관한 한 일인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크누첸은 아프리카, 하와이, 중앙아메리카, 자메이카

등지의 바이어들과 독점적인 거래 관계를 맺기도 했다.

미국의 생두 수입업자들 대다수가 저급품 취급으로 가격 경쟁을 벌이며

한 푼이라도 더 줄이려고 아등바등거리던 시기에,

크누첸은 터무니없게 여겨질 만큼의 가격을 지불하며

유럽과 일본으로만 실려 가고있던 최상급 생두를 들여왔다.

그리고 그런 노력에 대한 고마움의 대가로

그녀의 고객들은 기꺼이 그 생두를 구입해 주었다.



1974년에 『티&트레이드 저널』 에는 크누첸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바로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이 판매하는

셀레베스 Celebes**의 칼로시Kalossi, 

에티오피아의 이르가제프 Yrgacheffe, 예멘의 모카

를 지칭하기 위해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 라는 신조어를 언급했다.

(나중에 이 용어는 초창기의 고메이커피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 되었다.)

크누첸은 스페셜티 커피의 미래를 밝게 내다보았다.

"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집단이 떠오르고있어요. (…​​)

질 좋은 커피의 진가를 아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나는 자신해요.

우리 사업이 결국엔 성장하게 될 거라고요."

훌륭한 와인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처럼 커피 전문가들도

"대다수 사람들의 형편에 맞는 적당한 고급 상품"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p 453 ~ 455

         커피와의 연애

            제15장 열정가들의 출현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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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까지 과테말라의 대다수 원주민들은

알티플라노(고원) 지대에서 몇 뙈기 안 되는 밭에서 기른 작물로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가며 영양실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수확기 동안의 생활상은, 

사회운동가 필립 베리먼 Phillip Berryman 이 

1977년에 쓴 다음의 글과 같다.

"남녀 어른들과 아이들이 인부 도급업자의 

낡아빠진 트럭에 짐짝처럼 한데 실려 농장으로 향하는데, 

농장에 가게 되면 이들은 사방이 휑하니 뚫린 채 

달랑 지붕만 얹어진 오두막에서 거주한다.

어디가 아파도 치료를 받는 건 어림없는 일이다.

게다가 일당도 토르티야나 생두로 받는 것 같다

(커피조차 주지 않는다)."105

105 - 1970년대에 커피 농장(핀카) 노동자들은 

살충제에 위험한 수준으로 노출되기도 했다.

1978년에 미국이 금지품록 수출 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는데, 

이때 미국식품의약품은 DDT, DDE, BHC, 클로르데인, 앨린, 달린, 엔드린, 헵타클로르 같은

금지 살충제가 라틴아메리카의 커피재배에 사용되었다고 밝혔다.

커피콩은 열매에 싸여 보호되기 때문에 생두에서는 극소량의 화학물질만 발견되며, 

그나마도 로스팅 과정에서 연소되어 사라졌다.

따라서 살충제는 소비자에게는 건강상의 위험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되는 캄페시노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p 481, 482

         중앙아메리카의 압제와 혁명

            제16장 검의 서리의 그림자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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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들은 

통신판매를 통해 고급품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뉴요커 New Yorker』, 『고메이 Gourmet』, 『월스트리트저널』

에 광고를 실었다.​

게다가 이제는 자신들의 원두를 전국으로 포장·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1900년의 힐스브라더스이 진공캔 이후 가장 혁신적인 포장 혁명인, 

원웨이 밸브 one-way valve* 덕분이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적층비닐** 봉투에 이 밸브를 달아 놓으면

갓 볶은 원두에서 '가스를 제거' 해 주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주되,

산소가 다시 봉투 안으로 유입되지 못하게 해 준다.

1970년에 이탈리아의 루이지 골리오 

Luigi Goglio 가 발명한 이 원웨이 밸브는, 

미국에서는 1982년에야 

스페셜티 커피 산업에 의해 그 유용성이 발견되었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이용되고 있었다.

* 원웨이 밸브는 

공기가 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은 명칭임. 

아로마 밸브라고도 부르며 생긴 모양 때문에 '배꼽' 이라는 별칭도 있다.

대부분 이 밸브를 커피의 향을 맡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원래는 커피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제작되었다.

** 종이, 천 등을 포개어 합성수지로 굳힌 것.


      p 491, 492

         중앙아메리카의 압제와 혁명

            제17장 스페셜티 커피 혁명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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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 스위스의 대기업 제조회사, 코펙스 Coffex

물만을 이용한 카페인 제거법을 개발해 냈다.

염화메틸렌을 활용한 방법도

로스팅 원두에는 화학물질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이 새로운 '스위스 워터 프로세스 Swiss Water Process'가

건강을 의식하는 소비자들의 흥미를 끌면서

수많은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들이 이런 공정의 생두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디카페인 생두는 

풍미에 결정적인 지방이 카페인과 함께 제거되기 때문에

레귤러커피만큼 맛이 좋으려 해도 좋을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1980년대의 디카페인 커피는 예전에 비해 풍미가 훨씬 좋았다.

가공법이 개선된데다, 무엇보다도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들이 높은 등급의 생두를 썼던 덕분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 변성 생두에 향미료를 더해 

플레이버드 디카페인 커피를 팔기도 했다.

      p 494

         디카페인 커피의 열풍

            제17장 스페셜티 커피 혁명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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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역사를 되짚어 보면,

대체로 미국의 시민과 정치인들은 

저렴한 커피를 무슨 타고난 권리처럼 여겨왔다.

소수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은 

가끔씩 공정거래 원두에 돈을 더 쓰거나, 

최상급 커피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은 개의치 않지만, 

그런 그들도 모든 커피가 수확자들의

온당한 생계 수준을 받쳐줄 만한 가격대가 된다면 불만을 이야기해 댈 것이다.


      p 551

         라 미니타 : 커피의 도시국가

            제19장 마지막 이야기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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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업계의 사람들은 다들 서로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

재배업자들은 자기들이 고생해 생산한 생두를

편하게 전화 통화만으로 수출업자에게 팔고 수수료를 챙겨 간다며, 

중개상들을 시기한다.

또 중개상들은 수출업자들이 갑이라고 여기는데, 

정작 수출업자들은 부유한 미국인들에게 생두를 파는 수입업자들에게 꼼짝 못한다.

수입업자들도 그들대로 앓는 소리를 한다.

자신들은 심한 가격변동에 휘둘리느라 이윤이라 봐야 얼마 남지도 않고, 

오히려 떼돈을 버는 건 로스팅업자들이라면서, 

로스팅업자들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소매상들이 자신들에게 사간 로스팅원두에 가격을 두 배로 매겨서 팔고, 

커피하우스에서는 그 원두로 음료를 만들어 비싼 값이 판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러나 커피하우스 점주들은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주 6일을 일하고 있다.

      p 587

         신음하는 세계

            제19장 마지막 이야기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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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섭취되는 향정신성 마약이며, 

커피는 카페인의 첫째가는 전달식품이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날마다 카페인을 섭취하고 있다."

카페인을 주제로 두 권의 저서를 펴낸 잭 제임스 Jack James 의 글이다.

그에 따르면 카페인 함유 음료의 세계 소비량을 환산하면 

전세계적으로 매일 1인당 한 잔씩 마시는 꼴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그 섭취형태를 막론할 경우, 

습관적으로 카페인을 섭취하는 비율이 전 인구의 90퍼센트 가량에 이른다.

인류는 사실상 모든 문화권에서 마시거나 씹거나 연기를 피우는 등

이런저런 식의 자극적 마약을 갈망하고 있다.

그 섭취 형태도 알코올, 코카 잎, 카바*, 마리화나, 양귀비, 버섯, 

카트, 빈랑나무 열매, 담배, 커피, 콜라나무 열매,
요코나무 yoko bark 껍질, 
과율 잎, 감탕나무 잎(카시나 음료), 

마테, 과라나 열매, 카카오(초콜릿), 차 등 다양한데,

이 중에서도 확실히 마지막 아홉 개가 가장 보편적인 카페인 섭취원이다.

사실 카페인을 만들어 내는 식물은 60 종이 넘지만,

세계인의 각성 수단으로서의 역할에서 

커피콩이 차지하는 비중은 54퍼센트에 육박하며,

그 뒤를 차와 청량음료가 잇고 있다.

만화가 로비트 테리엔 Robert Themen의 말마따나,

"커피는 최고의 마약이다!"

카페인은 알칼로이드의 일종,

질소 원자를 가진 고리 묘양의 (탄소함유) 유기 화합물이다.

알칼로이드는 약리학적으로 활성 화학물질로서 

여러 종의 열대식물에서 만들어진다.

열대식물들은 포식자들로부터 구제받을 겨울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교한 자구책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카페인이 바로 천연 살충제라는 얘기다.

실제로 식물이 카페인을 함유하게 퇸 이유는

대다수 잠재적 포식자들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쳐

못먹게 만들려고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그 카페인이 매력 요인이지만.

커피 생두에서 카페인C8H10N4O2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820년이었다.

카페인은 (식물과 동물 공통의 구성물인) 크사틴 xanthine 분자에 접착된,

세 개의 메틸기(基)(H3C)**로 구성되어 있다.

이 메틸기로 인해

울퉁불퉁한 분자가 된 (일종의 트라이메틸국산딘인) 카페인은

혈류를 타고 흐르며 여기저기 부딪치지만,

위장기관 같은 생체막(生體膜)은 거뜬히 통과한다.

한편 인간의 간은 카페인을 

독으로 간주해서 분해시키려 시도하며 메틸기를 떼어 낸다.

그래도 전부다 처리하기엔 역부족이어서 

상당수의 카페인 분자가 그대로 간을 통과해 

결국엔 정박지인 뇌로 찾아간다.

카페인 분자는 신경전달 물질인 아데노신을 흉내 내는데,

이 아데노신은 뇌의 전기적 활동을 감소시키고 

다른 신경전달 물질의 방출을 억제시키는 작용을 한다.

즉 아데노신은 활동을 저하시키는 물질로서,

우리를 쉬게 해 주며 

우리가 하루에 한 번씩 잠을 자도록 수면을 촉진시킨다.

그런데 카페인이 아데노신 대신 아데노신 수용체에 결합하여,

아데노신의 작용을 방해한다.

말하자면 카페인은 잠이 안 오도록 

적극적인 작용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 브레이크의 자연스러운 작동을 방해하는 것뿐이다.

카페인의 영향을 받는 곳은 뇌뿐만이 아니다.

인체에는 곳곳에 수용체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 카바 : 폴리네시아산 후춧과의 판목 또는 그 뿌리로 만든 마취성 음료

** 메틸기는 메 테인에서 수소 원자 하나를 제거한 일가(一價)의 원자단을 뜻함​

사실 전문가들은 커피와 카페인의 섭취의 문제에 관한 한

그다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편인데, 

그 한 이유는 사람에 따라 커피와 카페인에 대한 반응이 

현저히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마셔도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시고도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따라서 커피 애호가들은 누구든

자신에게 잘 맞는 적정 섭취량을 미리 판단해 놓아야 하며, 

가급적 하루에 두세 잔 정도만 마시는 것이 좋다.

      p 590 ~ 592, 596

         신음하는 세계

            제19장 마지막 이야기

               제4부 호모 커피홀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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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루이스 이구아라스,매튜 프레더릭 공저/정세라 역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마크 펜더그라스트 저/정미나 역
일러스트 칵테일북
오 스툴 저/엘리자베스 그레이버 그림/황소영 역
예스24 | 애드온2


https://youtu.be/MAl5KoftD-E
https://youtu.be/egwtYMfr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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