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바람이 분다, 가라

[도서]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2010.02.26. 문학과지성사)를 읽기 시작했을 때, 봄을 떠올렸다. 무거운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살랑살랑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그의 문체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볍다고 해서 경박하거나 방정맞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진중하고 묵직했다.

 

 

그런데 이야기에 집중하면서부터 내 안에서 봄은 사라졌다. 대신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한 살얼음 위를 누군가 위태롭게 서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반가운 소식이건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봄을 예감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해서 불안하고 무모해보였다. 하지만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이유는 반드시 봄이 다가오리란 걸 알기 때문인데 희망이 없는 그들은 어떻게 겨울을, 아니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화가 서인주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친다. 인주를 사랑한 남자 강석원과 인주의 친구 이정희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인주이지만 독자는 서인주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없다. 이정희를 비롯하여 그녀를 알았던 주변인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서인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왜 인주가 자살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떤 증거도 없는데요.

그럼, 눈 덮인 미시령을, 그 새벽에, 체인도 없이 찾아갈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인주에게는 스스로 죽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 애는 삶을 사랑했어요. (p.32)

 

 

강석원은 서인주가 자살했다고 믿는다. 강석원이 확인한 바로는 인주의 전 남편도 자살로 짐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석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정희는 인주가 아들 민서 때문이라도 자살할 리 없다고 확신한다. 어린 시절부터 인주를 알아왔기에, 그녀가 얼마나 활기차고 강인했는지 알기 때문에 정희는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누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걸까? 누가 더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p.92)

또렷이 기억한다. (p.95)

 

 

정희의 기억 속에 인주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희는 먼저 죽었어야 할 사람은 나다.(p.27)’라고 계속 되뇌며 죽음과 어울리는 사람은 인주가 아닌 자신이라고 피력한다.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강석원에 맞서기 위해 인주를 알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인주는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또렷이 기억한다고 자신하는 모든 것은 인주가 자살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p.335)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는 추리소설을 읽는 듯하다. 서인주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를 알아내려는 과정은 지독하게 아프다. 이정희가 기억하는 조각에, 전 남편 정선규의 조각 그리고 강석원과 다른 이들이 가진 조각이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밝혀지는 건 서인주의 아픈 인생사였다. 결국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단지 서인주의 죽음이 스스로의 결정이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서인주 역시 평생 봄이 찾아오지 않는 겨울 안에서 간신히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온 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그들이 가련하고 애처로웠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에 이어 세 편째 읽었다. 이전에 읽은 두 편의 소설도 좋았지만 바람이 분다, 가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아름답다.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슬픔이 있다. 그래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13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꼼쥐

    저도 이 책을 오래전에 읽엇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책은 대부분 다 읽어보지 않았나 싶어요. 대개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내용의 이야기인 까닭에 한번에 쭉 읽는 게 힘겨울 때도 있지만 말이죠.

    2018.01.11 17:2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이쁜처키

      세 권 밖에 안 읽었지만 세 권을 놓고 보면 <바람이 분다, 가라>가 제일 좋은데 잘 알려지지 않은 듯 보여 안타깝네요.. 저도 천천히 한 권씩 읽어보려고요. ^^

      2018.01.12 12:40
  • 파워블로그 파란하늘

    저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사고 <채식주의자>는 읽은지 꽤 되는데 아직도 리뷰를 안 썼답니다.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 지 가끔 난감하더군요, 한강 작가의 글은요. ㅎㅎ..제가 덜 감성적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막 좋지는 않았습니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제가 좋아하는 이쁜처키님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극찬을 하시니 한강 작가 책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군요.

    2018.01.11 23:4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이쁜처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와 비교했을 때 세 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잘 썼어요. 정말정말요. ^^ 파란하늘 님께서도 읽어보시면 좋을텐데...
      제가 리뷰를 잘 못써서, 쓰고 보면 항상 아쉽죠. ㅎ 정말 좋은데 이걸 표현을 못하겠으니까요. ^^;; 진짜 파란하늘 님께서도 읽으시면 대단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다, 이렇게 느끼실텐데...

      2018.01.12 12:43
    • 파워블로그 파란하늘

      일단 제 카트에 넣어놓았습니다. 밀린 책이 많지만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이쁜처키님 추천이니까요. 이쁜처키님 리뷰 아주 잘 쓰십니다. ㅎㅎ

      2018.01.16 00:59
    • 파워블로그 이쁜처키

      앗 ㅎㅎ 부끄럽잖아효. 파란하늘 님 ^^

      2018.01.19 21:00
  • 파워블로그 블루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내용이 가물가물하네요.
    이쁜처키님의 리뷰로나마 그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기억해내 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읽고 썼었던 소설의 내용도 가물가물하니... 이거 원.
    저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바람이 분다, 가라>만을 읽어서 <소년이 온다>는 언제고 읽어야겠다 마음 먹고 있어요. ^^

    2018.01.12 16:4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이쁜처키

      오래 전에 읽은 책은 저도 가물가물해요. 리뷰를 읽어도 기억이 안날때가 있지요. ㅋ
      역시 블루 님께서는 벌써 읽으셨군요. ^^

      2018.01.19 20:59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