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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http://m.ch.yes24.com/Article/View/5855
지난 17일, 서울 홍대부근 한 카페에서 ‘“나는 왜 이러고 살지”의 주인공들을 위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가졌다.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의 시간.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 PD(CBS)가 함께 한 시간. 강신주와 정혜윤은 ‘자아를 분장하기 위한 성공과 출세의 매뉴얼이 아닌 자기를 가꾸고 돌보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단, 명심할 것. (강)신주니즘에 취하지 말고, 신주단지 모시듯 강신주를 읽지 말고, 자신만의 사유를 할 것.

책임(responsibility)의 문제 혹은 기쁜가, 아닌가의 문제


강신주가 말하는 인문학의 주어는 ‘나’다. ‘우리’가 아니다. 그래서 공감도 의지라고 본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깊이는 고통의 깊이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느냐, 그것이 인간을 만든다. 가령, 실연을 뼈저리게 당한 사람만이, 역시 실연을 당한 친구를 위로할 수 있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실연을 겪는구나, 하는 고통의 보편성.

고전의 대가는 그만한 고통의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버티는 고전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얼마만큼의 고통을 겪느냐가 소설을 읽는 감수성과 연결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안 읽힌다. 왜? 못 겪었으니까. 그게 읽히는 순간, 일정 정도의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다.”

강신주는 고통, 공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그것의 핵심에 책임(responsibility)을 둔다. 고로 인문학은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고, 인문학 책은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뭐가 아픈지, 무엇에 고통 받고 있는지, 그것에 반응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인문학은 화장품에 불과하다고 그는 외친다. 그것은 모든 문학의 핵심이며, 애써서 그것이 없다면, 문학과 인문학을 읽어서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혜윤이 물었다. “나의 책임, 흔히 제3세계 아이가 죽을 때 책임감을 느껴야 하나. 책에선 책임과 의무가 혼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 또 하나, 최근 기쁨과 슬픔의 감정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나는 누군가 기쁠 때 정말 기쁘다. 나 때문에 기쁘진 않은데, 남이 나를 기쁘게 해준다.”

강신주의 답변. 의무와 책임을 고전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말라. 책임은 실질적으로 껴안고 가는 것이며, 의무는 최소한으로 해야 할 것만 해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즉, 아이가 아프다. 엄마라면 어떻게 할까? 책임과 의무의 차이는 얼마까지 업고 갈 것인가의 문제로, 의무는 아이가 잠이 들면 잽싸게 자는 것이다. 반면 책임은 무한 책임으로 간다. 아이가 아프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업고 가는 것이라는 것. 이것이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개념이다.

기쁨에 대해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언급한다. “굉장히 어렵게 쓰인 책이다. 기독교를 못 믿게 만들기도 한다. 3부에 기쁨의 윤리학이 있는데, 기쁨 아니면 슬픔을 말한다. 스피노자는 기쁨은 지키고, 슬픔은 배제하라고 했다. 기쁨은, 몽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존재가 확장되는 느낌이다. 연애할 때가 그렇지. 스피노자는 단순하다. 우선, 기쁘냐, 슬프냐. 기쁘면 유지하고, 슬프면 거부하라.”

이것은 단순하나, 무서운 명제라고 말한다. 자신을 향해 물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직장인들, 기쁜가, 아닌가. 회사를 가면, 상사를 만나면 기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쁘지 않다면, 즉 슬픔의 원인은 제거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슬픔을 제거할 수 있을까. 기쁨이냐, 슬픔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를 뒤흔드는 진정한 마주침이 발행하면, 두 가지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쁨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의 감정이다. 마주침과 두 가지 감정에 대한 논의가 어렵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고개를 젓는 스피노자의 사유를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을 토대로 흥미진진한 윤리학을 피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p.158)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고귀해서 힘들고 드문 일, 당신은 기쁘게 일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이 전한 언어의 중요성

강신주가 철학자들 가운데 천재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 중 하나인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나머지 한 명은 인도의 나가르주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갈등은 언어로 인해 생긴다고 봤다. 지적인 사람들은 문맥을 듣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단어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것을 경계했다. 그가 전립선암으로 죽어갈 때, 의사 부인과 나눈 대화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의사 부인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말을 건넸다. “미국에 갔었을 때, 당신은 행복했던 것 같아요.” 비트겐슈타인의 반응은 이랬다. “당신이 말하는 행복의 의미가 뭔지 말해주세요.”

의사 부인은 헛소리를 했구나, 싶어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했다. 일기에 비트겐슈타인이 일상 언어의 소중함을 알려줬다고 말하고선 끝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겐 내면에 있는 말을 쓰면 안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거다. 고통스러울 때 친구가 위로를 해도 짜증스러워할 때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걸 알았던 거다. 살아가면서 타인과 관계 맺을 때, 선을 긋고 싶은 거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 거다.”

보여준다는 것, 그것의 취약성


정혜윤은 라디오PD가 가진 딜레마를 토로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자가 말하려고 할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울러 오디션 프로그램의 창궐 시대. 리얼리티는 여전히 대세다. 허나 그것은 편집이다. 편집한다는 것,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신주는 우선 스펙터클 사회를 비판했다. 스펙터클은 구경거리이며, 사람을 구경꾼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 시각적인 사회에 대한 일침이다. 말하자면, 시각문명과 자본주의의 협잡이다. 그는 하나의 극단적인 가정을 제시한다.

그는 TV에 길들여진 우리네 가족의 풍경을 예로 든다. TV가 없으면 가족끼리 대화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TV가 고장 나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결국 TV가 묶어준 사회라는 것. 구경하는 것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지진을 보여준 TV의 행태도 스펙터클 보여주기에 다름 아니었다. TV나 영화를 통해 보는 전쟁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하이퍼 리얼리티의 세계. 구경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명제 때문에 과도하게 스펙터클을 만들고, 실재를 과장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강신주는 청각과 촉감의 복구를 주장했다. 시각 사회는 또한 사람들의 계층을 나눈다. 보여주는 사람은 우월하고 보는 사람은 열등하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나꾡를 보이려고 한다. 즉, 나를 팔려고 한다. 강신주는 보여 지는 것을 좋아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시각이 가지는 세계는 지배의 세계이며, 스스로 보여 지려는 것은 열등감의 표현이고, 피학증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면접관은 지저분하게 있어도 되지만, 면접을 보는 사람은 자신을 사달라고 예쁘게 꾸민다. 이것이 ‘자기 비하’의 한 형태일 수 있다고 그는 꼬집었다.

“시각의 세계에서 내가 나? 보여준다는 것, 고민해봐야 한다. 남이 안 보게 가급적 지저분하게 살아야 한다. (웃음) 그러면 남이 편하게 본다. 나는 잘 차려입는 사람을 보면 불쌍해 보인다. 무언가 하고 있는데 당당한 사람들을 보면 옷도 더럽게 입고 남에게 신경 안 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신경 쓰는 건 유치한 거다. 구경거리의 사회에 산다는 것, 내가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 고민 많이 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선 화장을 하는 건 여자들이다. 모계사회에선 남자들이 화장했다.”

호모 루덴스, 놀이와 노동은 합치할 수 있을까


일하지 않는 것이 곧 죽음이 되는 시대. 일이 생존과 직결되는 시대. 과연 지금의 시대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혹은 바람직한 것일까. 강신주가 꺼낸 또 하나의 화두는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였다. 하위징아의 개념이었다. “인간의 본질은 놀이다.” 즉,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났다. 혹은 제대로 놀아야 인간이다.

하위징아의 주장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왜 혁명적이냐면, 헤겔에 반대한 거다. 헤겔에 의하면, 노동은 합목적적 행동이다. 수단과 목적이 분리돼야 한다. 고등학교 때 왜 공부했나. 고등학교 때 대학이 목적이면 고등학교 때의 행동은 수단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이 수단이면서 목적이면, 그 자체로 즐거운 거다.”

하위징아의 놀이가 단순히 노는 건 아니다. 그것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할 뿐이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놀이의 대상이면 수단이자 목적임을 의미한다. 허나 아이를 낳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연애(결혼)는 수단일 뿐이다. 또 월급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회사 생활은 지옥이다. 그나마 일과 중에 내가 하는 건, 즐거워야 한다. 강신주는 니체와 스피노자, 하위징아의 말을 빌어, 이런 말을 던졌다. 미래를 위해 살지 마라. 현재가 수단과 목적이어야 한다. 인생을 잘 보낸다는 것, 오늘 행복하면 놀이가 될 수 있다. “하위징아는 우리가 왜 불행한지, 한 잣대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는 거지. 수단에 불과한 식으로 살았다는 거지. 헤겔의 변증법 체계가 합목적성인데, 헤겔을 비판한 것이 니체이고, 목적을 분쇄한다. 하위징아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창조성의 비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노동보다는 놀이를 통해 인간은 놀라운 집중력과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즐겁게 하는 일에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붓게 되는 법이다. 보통 사람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은 즐거웠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p.306)

강신주에게 질문하고, 강신주가 답하? 시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시각이 위험하다고 했는데.

“가령, 영화를 볼 때 음악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애국가를 만들었겠나. 우리나라는 시각적인 문화인가, 청각적인 문화인가. 노래방을 봐라. 전 세계적으로 이런 나라는 없다. (웃음) 프랑스는 시각문화가 발달했고, 독일은 청각문화다. 양쪽이 서로를 비판한다. 독일은 소리는 영혼의 깊이라고 하고, 프랑스는 독일이 주관적이라고 한다. 왜 두 나라가 앙숙이냐면 이런 양쪽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청각적이고 일본은 시각적이다. 김소월이나 백석(의 시)을 보면, 리듬감이 탁월한데, 소리의 문화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는데 음악을 듣나? 그림과 음악 중에 자신을 더 울리는 것이 뭔가. (음악이다.) 그럼, 음악을 연주하거나 작곡을 해야지. (웃음) 헤겔의 변증법이 소나타 형식이다. 정반합. 왜 독일철학을 좋아했냐면 리듬감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읽으면 잘 안 읽힌다. 처음의 박자 리듬만 잘 타면 헤겔을 다 읽을 수 있다. 베토벤과 헤겔은 같이 간다. 자기한테 정직해야 한다. 음악으로 위로를 받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건 비극이다. 그림이 나한테 더 영향을 주고 울린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솔직함과 정직함은 내가 만난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 있다.(p.13)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혼자서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살 수 있나.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면 된다. (웃음) 원효 섹션의 제목(「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을 이렇게 달았는데, 하나의 대안이다. 한 사람만 업겠다면 다른 사람을 못 업는다. 여러분이 정해야 한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다. 다만 행복도 없다. 고통이 싫으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사랑하면 관심이 가고 집중을 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 대가는 분명하다. 사랑이 주는 기쁨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p.197)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기쁘든 슬프든 내가 계속 업고 안 놓으려 한다. 내 뿌리가 되는 사람이니까. 특정한 누구를 사랑할 수 없어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자비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빼면 허무주의로 빠진다. 특정한 누구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내 어깨에 특정한 사람이 아닌 사람을 바꿔가며 얹는다는 거다.”

(누군가에게 뿌리를 내렸는데, 나중에 그것이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때 무너진다는 그 느낌이 싫다.)

“결과론적이지만 (사랑을) 해봐야 한다. 우리의 슬픔은, 모른다는 거다. 그거라도 안 하면 혹여 뿌리가 될 수 있는 것을 놓칠 수 있다. (헤어지면) 그 순간은 힘들지만, 나이가 팔십정도 되면 추억처럼 남을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사랑을) 해라.”

사랑은 기쁨과 고통이란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쉽게 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의 위험성을 감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사랑이 주는 기쁨에 취해서 애써 고통이란 이면을 보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의지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의 단맛과 쓴맛을 다 맛본 사람들이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197)

종교를 믿나?

“안 믿는다. 인문학자는 종교를 믿으면 안 된다. 인문학은 신을 거부하면서 출발한다. 신, 자본, 권력, 국가 모조리 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해도 외적 간섭을 거부하고, 인문학자끼리 이야기를 만든다. 인문학자 중에 교회 다니는 분들을 보? 인간적으로 동정은 가지만, 짜증난다. 왜 인문학자를 자처할까 하고. 인문학자가 아닌 종교학자면 상관없지만.”

요즘 고전 리라이팅이 많은데, 고전을 반드시 읽어야 하나. 최근 니체를 읽고 있는데, 이해가 잘 안 된다.

“니체 이해하려면, 이해가 안 된다. 니체를 읽을 적령기는 중학 1~2학년이다. (웃음) 미친 척하고 읽어야 한다. 이해하려고 해서 안 된다. 진짜 좋은 고전은 시간을 견딘다. 고전의 깊이나 높이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허접 같은 베스트셀러에 취한다. 농담처럼 말하는 거지만, 고전을 안 읽어본 사람과는 얘기하지 마라.

나이 칠십 정도가 되면 고전이 다 읽힌다. 삶은 살아간다는 것보다 살아낸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때가 많다. 그러니 미리 지금이라도 읽으면, 힘들지만, 그 파괴력이 얼마나 엄청나겠나. 강력한 고전 한 권이 다른 책 100권을 커버한다. 철학책을 교과서처럼 읽으면 안 된다. 이해가 안 돼도 된다. 폭풍처럼 통독해야 한다.

나는 어른이란 걸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어른인 척 하나, 대개 어른이 아니다. 시골에 가면 예순 살이 막내고, 어른이라고 생각 안 한다. 사람은 사랑할 거 사랑하고, 상처받을 거 상처 받아야 한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한 아이들은 겪어야 할 거 못 겪는다. 인생은 재밌다. 겪을 건 다 겪는다. 어느 순간 삶이 뭐냐고 물었을 때 웃어야, 어른이다. 진짜로 겪어낸 사람은 얘기를 안 한다.

어른들이 니체를 읽는다는 의미. 모르겠다. 니체는 크다. 끝가지 가야 한다. 일단 한 바퀴 돌고 느낌만 잡아라. 중요한 책들은 어릴 때 그렇게 읽었을 거다. 어릴 때 폭풍처럼 읽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이해하려고 읽는다. 어릴 때는 막 흡수한다. 술 마시듯 읽는다. 지금은 술 마시듯 읽으면, 시험 못 보잖나. 폭풍처럼 읽어서 흡수해야 한다. 이해된다,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고. 배운다, 라는 게 뭔데. 새로운 여행지를 가면 (그곳을) 껴안잖나. 이해가 안 된다고 그렇진 않잖나. 그럴 바엔 인터넷을 검색하지. 고전도 읽을 때 영화 보듯 봐야 한다. 다 보고나서 평가해야 한다. 그렇게 책 읽기를 해야 한다.”


스스로 넘었다고 생각한 고전이 있다면. 자신을 폭풍으로 몰아놓은 고전 다섯 개를 꼽는다면.

“비트겐슈타인, 나가르주나, 스피노자, 알튀세르, 들뢰즈. 문학에선 유일하게 카프카. 나머지 문학은 재미없고 허접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인 소설가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인데, 그 중 압권이 카프카다. 카프카 책을 많이 봐라.

처음에 비트겐슈타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짜증나게 어렵네. 일관적으로 어렵다는 건 체계가 있다는 거다. 아예 어렵거나, 아예 쉬워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을 그렇게 넘으니까, 책읽기는 강해졌는데, 그만큼 삶이 강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웃음) 나의 자랑은 겪어냈다는데 있다. 피하지 않고. 처음엔 호승심에서 읽었는데, 지금은 왜 내가 철학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의미는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다. 나도 어떤 동기에서 철학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지막에 내가 어떤 곳에서 의미를 부여할지 나도 궁금하다.

가장 마지막에 가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썼을 때, 그건 정확하게 내 얘기다. 내가 좋아한 사람을 여러분이 좋아할 가능성은 없다. 김수영 얘기만 마지막으로 하겠다. 김수영이 쓴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가 있다. 여기에 팽이 얘기가 있다. 팽이들이 같은 중심으로 돌면 하나가 무너진다. 한 가정엔 엄마 팽이, 아이 팽이 있는데, 아이가 엄마에 근접해서 부딪히면 하나가 넘어진다.

그걸 보는 순간, 인문학과 철학이 생각났다. 철학의 마지막 목적은, 여러분 각자의 생각이 정리돼서 여러분 팽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여러분은 각자가 돌고 있는 회전이 있다. 우리 각자가 삶을 살아내는 거니까 남 제스처 흉내 내지 말고, 어떻게 돌아야하는지, 속도 등을 생각해야 한다.

김수영이 처음 낸 시집 이름이 『달나라의 장난』(1959)이었다. 독재 체제는 하나의 팽이가 다른 팽이들에게 같은 방향으로 돌라고 하는 거다. 각자 자기 팽이의 속도와 생각을 가지면 될 것 같다. 붙지는 마라. 애인과 가깝다고 붙지 마라. 사랑스러울수록 가까이 붙으려고 하지 마라. 아이를 넘어뜨릴 수 있다. 이게 인문학의 정신이고 감수성인 것 같다. 1950년대 김수영이라는 탁월한 인문학자가 팽이를 보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거다.”


김수영 시인은 위대했던 것이다. 자신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으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를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민주투사인 척했을 때, 김수영은 자신의 소시민적 나약함에 정직하게 직면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위대하다. 그것은 자신을 치장하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pp.13~14)

“여러분이 내 흉내를 내면 난 좌절한다. 난 종교가 아니다. 철학은 여러분 목소리대로, 여러분 제스처를 내고, 어느 때 가장 행복한지를 알아서, 삶을 버티고 견디는 거다. 카프카가 위대한 건, 다른 소설가의 흉내를 안 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단순하게 생각해야 ??. 팽이를 본 뒤 나는 어떻게 돌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살아낸다는 건 내 스스로 팽이 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게. 다른 사람이 너무 근접하거나 간섭하면, 상대방을 넘어뜨리거나 내가 넘어질 수 있다. 이 자리가 제대로 됐다면, 강신주라는 팽이가 소음 낸 거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어떤 팽이인지 자각했으면 된다. 궁극적 목적은 여러분 각자가 시인, 철학자, 소설가가 되는 거다. 여러분만이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느냐, 그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 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한 악은 도처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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