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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오게 됐나요?"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걸 하나씩 늘리고 있는데,

그래서 오게 되었습니다."

 

평일 저녁 시간,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부리나케 준비해서 나왔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연기 수업이 한창인 강당이다.

 

이 나이에 와도 되는 건가,

너무 어린 친구들만 있으면 어떡하지,

내가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 괜히 주책인가

온갖 걱정으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종일 초콜릿 먹은 게 전부라 갑자기 배도 고팠다.

왠지 예쁜 사람들만 있을 것 같았다.

보이는 게 전부인 곳이니 신경이 쓰였다.

사놓고 아끼느라 한 번도 안 입은 정장 재킷을 걸치고 왔는데,

아뿔싸, 여기 온 사람들은 편안한 츄리닝 차림이다.

 

1. 반말

연기 수업은 모두 반말로 시작한다. 실제로 연기를 하게 되면 나이와 상관없는 역할이 주어지고, 내가 나이가 많아도 동생 역할이 주어지는 게 다반사기 때문. 처음엔 어색하지만, 곧 연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편했고 자유로웠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훨씬 쉽고 빠르게 친해진다. 존댓말이 주는 공손함, 예의 바름이 가져오는 거리감이 실로 어마했다.

 

2. 교감

본격적인 연기 수업에 앞서 여러 가지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은 실제 서울예술대학교, 한예종에서 하는 수업이다.

 

1에서 10까지의 속도로 걸음걸이를 걷기. 진행자가 10이라고 하면 재빠르게 걷고, 1이라고 하면 천천히 걷는 식이다. 무대를 정처 없이 걸으면서 부딪히지 않아야 한다. 걷다가 눈이 마주치면 점프하면서 마주 보면서 박수를 친다. 박수칠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두 번째, 두 명씩 짝을 지어 가상의 봉이 있다고 상상하고 봉을 옮기는 게임이다. 진행자의 지도에 따라 봉은 쉴 새 없이 커지고 무거워지고 짧아진다.

세 번째. 다섯 명이 모여 가상의 커다란 거울을 이리저리 옮긴다. 

 

네 번째, 두 명씩 마주 보고 가상의 공을 던진다. 깃털처럼 가벼운 공, 엄청나게 무거운 공, 작고 빠른 공 등 다양한 공을 상상하고 주고받는다. 과장할 필요 없다. 작은 공을 주면 작은 공을 받고, 큰 공을 주면 큰 공을 받으면 된다. 공을 비치볼처럼 던져도 되고, 볼링처럼 굴려도 되고, 독침처럼 쏴도 된다.

 

다섯 번째, 고양이와 쥐 게임. 쥐가 고양이를 피하는 원리인데 강당 전체를 방방 뛰어다니다 보니 몸이 많이 부딪힌다. 별거 아니지만, 깔깔거리고 몸을 부딪치며 어린아이 같은 면을 끄집어내는 게 목적이다.

 

이 외에도 여러 게임을 했다. 게임의 목적은 교감이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느끼고 반응하는 것, 어른이 되면 몸 부딪히는 게임을 하는 일이 없는데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고 야옹~거리는 흉내를 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세삼 깨닫게 된다.

 

3. 듣기

총 3시간 연기 수업이 진행되는데, 한 시간 동안 몸풀기를 했다면 이제 짧은 대사를 가지고 즉흥 연기를 한다. "어제 밤에 뭐 했어?" 같은 말도 억양, 뉘앙스에 따라 심문하든 추궁형이 되기도 걱정하는 말투가 되기도 하고 애정이 어린 질문이 되기도 한다. 그걸 상대방과 호흡하면서 같은 대사를 가지고 여러 장면을 연출하는 식이다.

 

"제발"과 "싫어"만 반복하는 즉흥 연기와 "넌 할 거야"와 "난 안 할 거야"를 반복하면서 감정의 폭을 점점 키우는 즉흥연기도 했다. 삐지듯이 난 안 할 거야 에서 소리 지르며 절규할 때 묘한 희열을 느꼈다. 말을 뱉어내는 것뿐 아니라 숨소리까지도 연기에 포함되는 거더라. 연기하면서 상대방과 눈 맞춤을 5분 이상 길게 해야 했는데, 이렇게 집중해서 상대방의 눈동자를 쳐다본 게 얼마 만인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실제 연극 대본을 리딩하기도 했다.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대사를 빨리 정확하게 제대로 치는 것보다 상대방의 대사를 잘 듣는 게 우선인 점을 강조했다.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호흡하는 거기 때문에 듣는 게 우선되고 반응이 따라오는 것이다. 

 

일할 때도 커뮤니케이션이 늘 중요한데, 듣기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를 연기 수업에서 배울 줄이야. 

 

연기 경력이 제법 되는 훌륭한 선생님 두 분은 MBC 아카데미에서 배우 지망생을 대상으로 수업하기도 하고 경력이 있으신 배우를 지도하기도 하지만 아무 경력도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업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보통 경력이 있으신 분은 대사할 때 머릿속으로 장면의 흐름을 정하고 그 흐름에 맞춰서 상대방이 따라오도록 요구한다. 이미 틀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반면, 일반인은 아무것도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탁월하다. 허술하지만 허술하기 때문에 연기가 아닐 수 있다.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서 사랑하는 연인이 되기도 하고, 살인자가 되기도 하다. 

 

처음 배워보는 연기 수업이라 새롭고, 새로운 만큼 색다른 시각을 얻었다. 고작 3시간 수업인데 기가 쭉 빨린다. 연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뭘 하든 쉬운 건 없구나. 예쁘고 편한 연기만 골라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직업, 책임을 놓아버리고 다른 인격이 되고 싶은 갈망을 연기로 잠시나마 풀었다. 감정을 참고 인내하는 것보다 털어놓고 뱉어내는 게 얼마나 후련한지. 살면서 소리를 지를 일이 많이 없으니까,

내가 소리지르는 걸 본 강사님은 원래 IT업계가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많다며 덧붙였다. 소리를 질러도, 못되게 굴어도 연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게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적어도 여기선 모든 게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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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march

    연기를 배우기 시작하셨어요? 대단하세요~~연기를 배워볼 수도 있다는 것을 왜 생각지 못했을까요? 저도 혼자서 연기를 해보곤 했었어요. 아주 어릴때 ^^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싶다는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배우로서 좋은 점이 그런 것 아닐까요?

    2021.05.27 23:4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꿀벌

      아쉽게도 시작과 함께 끝이 아닐까 싶어요. 열정적으로 알려주시는 선생님을 만나서 좋긴 한데 6월부턴 공연을 올리는 걸 목표라 진행될 예정이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고 책임감을 갖기엔 지금 시점에선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우연한 기회가 닿아서 한번 체험했을 뿐이에요. 혼자서 연기를 하셨다니! 그 시절의 마치님이 궁금해요. 어떤 연기를 하셨을지 ㅎㅎ

      2021.05.28 00:22
  • 스타블로거 부자의우주

    연기수업
    IT업계 종사자의 스트레스.
    꿀벌님의 체험, 도전과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 역시 다르네요 ^^

    2021.05.28 02:1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꿀벌

      다른 영역이라 그런지 색달랐어요 ㅎㅎ 잠깐 딴사람이 된 느낌도 들었네요

      2021.05.29 14:44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