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이 말이 말이건 막걸리건 간에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정권의 '뻔뻔함'이었다. '변명'이라도 한다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최소한 미안함이라도 있다는 소리고, 나름 어떻게든 용서를 구하겠다는 최소한의 의사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명조차 하지 않겠다는 저 거만함, 어짜피 어떤 말을 하더라도 너희가 믿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는 교만. 1987년은 바로 그런 파렴치한 권력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1987'은 1월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당하다 사망한 사건에서 시작해서 6.9 이한열 군이 최류탄에 맞고 쓰러져 6.10 민주항쟁이 발생하기까지를 기록한 영화이다.
영화에서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실제 6.10 항쟁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중이던 박종철 군이 고문수사 중에 사망하자 박처장(김윤식 분)은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려 한다. 담당 검사이던 최검사(하정우 분)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것을 알고 화장을 못하게 하고 부검을 한다. 이 과정에서 최초 박종철의 사망을 확인 했던 의사는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나중에는 양심선언을 하며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알린다. 부검을 담당했던 황적준 박사는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박종철 군의 사망 사유가 '고문에 의한 경부압박 질식사'라고 정확히 기재한다.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한 박처원 치안감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되는 발표를 하고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당시 언론은 보도 지침을 따로 받아 박종철에 대한 기사는 쓰지 못하도록 했으나 동아, 중앙일보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의 사망소식을 전한다.
한편, 이 수사의 책임을 말단 꼬리에서 자르려 했던 경찰은 조한경(박휘순 분), 강진규에게 뒤집어 씌우고 교도소에 수감하고 이때 교도관이었던 안유씨는 본 사건이 무마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수사관은 두 사람에게 1억원을 주고 입을 다물라고 했으나, 마침 수감중이던 이부영(전 의원)이 이 사실을 알고 사건을 전말을 알게 된다. 이 내용은 김정남에게 전달되고 김정남은 이를 발표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게 정리된 내용을 전한다. 이를 받은 정의구현사제단은 5.18 광주 민주화항쟁 7주기 행사에서 이를 발표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다루면서도 이런 영화가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영화의 성패를 가른다. 나는 그 기준으로 서너가지를 생각하는데 그 첫번째는 주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너무 집중하여 억지감동을 유발하는 경우이다. 볼 때는 울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저 불쌍하구나라는 생각만 남게 된다. 두번째는, 고문이나 구타 장면을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안타까움을 유발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고문을 당하는 학생에 대한 감정이입이 격화되면서 영화의 본질이 자칫 흐려진다. 이럴 때는 분노의 방향이 독재체제의 단면이 아닌 과한 폭력성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셋째, 주제의 강점을 맹신한 나머지 무리하게 스토리를 전개하는 경우이다. 택시운전사의 경우 그 당시 상황을 절제된 상태로 잘 재현했지만 몇명 장면의 경우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부수적으로는 짧은 시간 영화에 내용을 담느라 주인공이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급격히 캐릭터가 변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위의 부분에 있어서 영화 1987은 꽤 성공적인 영화이다. 고문장면에 너무 많은 컷을 할애하지도 않고, 남겨진 자의 슬픔에도 절제를 배치한다. 스토리에서도 실제 이야기에서 추가된 캐릭터는 연희(김태리 분) 정도여서 큰 무리가 없고 영화적 흥행을 위한 과도한 장치도 없다. 또한 연희도 등장 내내 시위에 대해 방관자나 비판자 역할에 그치다 마지막에 겨우 가담하는 정도이다.
영화 광고만 보면 이 영화는 최검사(하정우 분)와 박처장(김윤식 분)의 대결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박처장이 영화 전체에서 악의 영역을 대변하는 것은 맞지만, 최검사는 영화 초반에 활약하고 변호사로 나가버리고 잘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또 일부러 그렇게만 광고하는 이유가 있음) 최검사의 역할이 지나고 나면 동아일보 윤기자와 의사와 부검의 등이 진실을 밝히고, 동아일보 해직 기자가 교도소에서 그 내용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분)이 전령의 역할을 하고, 김정남이 글을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하는 순간까지 어느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마치 기적처럼 이뤄진다. 때문에 이 영화는 주인공이 없는 영화인 것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너무도 잘 살려 냈고 영화의 바통은 자연스레 연희로 넘어가고 이한열의 죽음까지 이어지면서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한국 현대사의 가장 높은 산맥인 6.10 항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충격적이고도 놀라우면서 틈만 나면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 사실은....
박종철이 고문을 당했던 이유는 누군가의 은신처를 밝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이 바로 박종운인데,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사건들을 은폐하려했던 정형근이 있는 한나라당으로 입당해 국회의원으로 출마까지 한다. 이 내용은 이박사의 '와주테이의 박쥐들'에서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이전에 부림사건을 다뤘던 '변호인', 5.18 민주항쟁을 다룬 '택시운전사' 그리고 '1987'까지 보고도 그 중심 세력이었던 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마주보고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다. 여하튼 이 영화는 박종철로 시작해서 이한열을 거쳐 6.10 항쟁으로 마무리 되는데, 위에 설명한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보는 것도 재미 있지만 생각지 못한 인물들의 등장이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몇 년 동안 본 영화중에 가장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