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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도서] 늙어감에 대하여

장 아메리 저/김희상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일전에 도야마 시게히코가 낸 에세이집이 국내에서 출간될 때 제목이 '자네 늙어봤나, 나는 젊어봤네'로 바뀌어 출간된 적이 있다. 실제 책의 내용의 유익함에 비하면 제목은 그야말로 거만하게 느껴지는 늙은 꼰대의 느낌으로 표현해 버린 점이 못내 아쉬웠다. '꼰대'라는 단어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 이라고 지식백과에 표현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젊음을 거쳤고 늙음을 거치지 않았다는 경험의 차이가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설교를 하는 가장 큰 명분이다. '내가 해봤는데 의미없다' '나도 젊을 땐 너처럼 해봤지만 후회한다.' 같은 식의 말이다. 

 

똑같은 경험을 하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의 경험을 다양한 정보와 책을 통해 객관화하고 해석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발전해 나가는 사람들은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자기만의 생을 살뿐이며 다른 사람의 삶은 돌아볼 겨를조차 없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평생 책 한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도 책보고 있는 젊은이에게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가르치려 들기 때문에 젊은 사람은 거부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젊다고 할 수도 없고 늙었다고 하기에 건방진 그런 나이 정도가 되었고, '늙어가'는 일에 대하 다시 생각해볼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노년의 지혜와 행복이라는 말 따위로 현실을 치장하는 것은 자기기만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자기기만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이제 타인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더 예의있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느낌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사람들이 가는 프랜차이즈점에서는 누구나 물어볼 법한 질문을 해도 '어휴 그것도 모르나' 싶은 반응이 느껴지고, 나는 절대 그렇게 나이들지 않겠다는 선긋기가 배어나온다. 40대의 나이에도 그런 것을 느끼기 시작하니 60대가 되면 그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대중가요는 여전히 우리는 주류다는 식의 가사가 많이 나오는데, '내 나이가 어때서'라던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는 식의 말들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완성되어 간다는 식의 말은, 직장에서 연차가 됐다고 무능한데도 승진하는 사람들과 다를게 없다. 

 

사실 젊음을 거쳤다고 한들 그는 그저 자기 인생의 젊음, 그 한 길만을 지나왔을 뿐이다. 인생에는 수 백만가지도 넘는 다양한 경우가 있으며 그 중 어느 것도 답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든 사람은 자신이 단지 '젊은 시절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도 가르치려 들고 있으니 세대간 차이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에 대한 반성과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나이'만을 내세우며 꼰대질을 하기에 앞서 늙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 '늙어감에 대하여'는 나이든 사람이 밀려드는 젊은 세대에 대해 왜 거부감을 갖게 되는지, 그리고 자신의 지위가 어떻게 변해가는 지에 대해 생물학적, 문화적 해석을 보여준다. 나는 책의 머리말을 이 책을 읽는 이가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그 쇠락을 두고 '귀족과 같은 우아한 체념'이라거나 '황혼의 지혜' 혹은 '말년의 만족'이라는 말 따위로 치장해 위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굴욕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사회적 연령'이라는 보이지 않는 굴레가 쓰여진다. 이 연령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가 그에게 미래의 신용을 더는 인정해주지 않으려 하는, 아예 미래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으려 하는 지점'이다. 여전히 혼자서는 20대 때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에게 사회는 냉정한 시선으로 사실상의 격리 선고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믿는 나이가 아닌 그 필요성과 발전가능성을 보고 사회가 내리는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함에도 여전히 우리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기 십상이다. 어느정도 나이가 되면 사회는 그가 이뤄놓은 성과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청년 시절에는 가능성이라는 핑계거리가 있었으므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도 할 말이 있었지만, 늙어가면서 그런 변명의 안식처는 점점 좁아지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만다. 

 

개인적으로 문화적 노화에 대한 통찰이 가장 와닿았는데 그 분석은 이러하다. 늙어가는 사람은 현재의 문화적 현상을 자신의 시대였던 과거의 관점으로 해석하려 들며 그만큼 현재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시대정신을 따라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은 정말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는 공포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보자면 세대간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선거다. 과거의 선거는 젊은 사람의 투표는 무조건 진보세력에 유리했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공부도 하지 않은' '현대사는 모르는' '부모가 다 해주는 편히 산' 세대라고 욕해도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가 우리가 살아온 환경에 맞게 비판정신과 시대정신을 따라 성장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그들의 환경에 맞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우리 때는 군 생활이 36개월이었다는 둥, 나때는 공부 하고 싶어도 못했다는 둥 하는 소리는 이제 말도 꺼내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냉정히 말하면 우리가 지금 태어났으면 지금 젊은 사람들처럼 살았을 것이고, 그들이 80년대에 태어났다면 우리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차이는 좁힐 수 없다.

 

그 모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마음은 바로 '나이든 사람은 현명하고 답을 알고 있다는 교만'을 끄집어낸다. 어느 시대에건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과 차별화를 시키며 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책에서도 그 시발점은 '문화적 은어'의 사용이라고 말한다. 은어사용은 젊은 사람들에게 피아식별과 차별화의 수단이 된다. '오나전' '짱' '훈남' 이런 단어를 겨우 익히기도 전에 유행을 지난지 오래고 지금은 '킹정' '어쩔티비' '쌉가능' 같은 용어도 유행이 지나갈 지경이다. 젊은 사람은 문화적 차이에서부터 조금이라도 윗 세대와 차이를 두고 싶어하는데,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내가 젊어봐서 아는데'라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꼰대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단순히 외모에서 느껴지는 노화의 흔적이 아니라 이제 문화적 노화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늙어가는 사람이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수순이 될 것이다. 늙어가는 순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바로 문화적 뒤쳐짐과 사회적 연령의 노쇠함을 받아들이고, 젊을 때와는 달리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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