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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도서]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첫 출발은 나쁘지 않다. 뭐 사람의 역할을 대신하는 안드로이드라면 많이 있어왔지만 그 중에서 기수의 역할을 하는 로봇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기수는 키도 작아야 하고 몸무게도 50킬로가 넘어서는 안되니까 로봇이 대신 한다면 얼마든 가벼울 수 있고 부상의 위험도 없을테니 말이다. 혼자서 달려도 70킬로를 넘기기 힘든 말이 100km/h까지 갈 수 있다면, 그것은 품종 개량과 기수 개량(?) 그 두가지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야기 진행도 자연스럽고 그만큼 인기도 많아 좋은 리뷰는 많으니 나는 읽는 내내 아쉬웠던 점 몇 가지만 써보고 싶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안드로이드에 대해서 할 이야기는 과연 이것 뿐인가 싶은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설정이 등장했을 때부터 우리가 천착한 문제는 바로 그들의 감정, 그 중에서도 '선한' 감정이다. 시간을 50년 전으로 돌려서 1968년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내용을 보자. 릭 데커드는 지구에 몰래 잠입한 안드로이드 레플리컨트를 잡아 죽이는 블레이드 러너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레플리컨트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인간은 기계보다 더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이다. 로봇이 감정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더 인간적이라면 우리는 대체 인공지능보다 나은 것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항상 있어왔고 좋은 소재였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전제가 되는 사실, 로봇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을 위해 작가들은 갖은 장치들을 설정한다. 수십만대 생산되는 로봇 중 하나가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을 가질 수 있기는 할테니 가능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 빈도가 너무 잦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주제는 사실 너무 뻔하기도 하다. 우리는 안드로이드를 일개 로봇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가지는 감정은 인간이 느끼는 그것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흉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일까. 그런 물음은 90년대 '공각기동대'에서도 유효하고, 2000년도에 만들어진 스필버그의 영화 'A.I'나 2004년도 영화 '아이, 로봇'(물론 원작은 훨씬 전이지만)에서도 계속된다. 1968년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설정과 물음은 SF에서 빠지지 않는 고인물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무척 역설적인 것이 공상과학소설의 설정은 항상 미래를 다루는데 미래의 안드로이드에게서 벌어지는 일이라는게 항상 그들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까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봤는데도 나오는 작품들은 하나 같이 '이런 거 생각해본 적이나 있어?' 라는 식이다.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감정들은 하나 같이 착하기만 하다. 

 

왜 우리는 안드로이드에 대해 단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을까.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을 상상하면서부터 로봇이 어쩌면 인간보다 나을지 모른다는 환상이 같이 자리 잡았다. 그 소재가 매력적인 것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작고 욕심만 가득한 존재이며, 그들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은 결국 파멸 뿐이라는 도식을 완성시키기 적당하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에서도 인간은 그저 에너지원일 뿐인 존재가 아니었던가. 휴머노이드 콜리는 물어본다. 왜 인간은 그런 감정을 가지나요. 어떤 때 인간은 행복한가요. 주로 답을 해주는 쪽은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보경이다. 보경은 그 자체만으로 무생물인 콜리에게 큰 위안을 받고 소설 후반부에서는 그 상처를 극복한다. 콜리의 역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민과 위안, 사랑과 베풂의 감정을 반복해서 물어줌으로써 그것을 발견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투데이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돌려줌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마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에 잔뜩 호기심을 가진 존재의 질문은 사실 1991년 터미네이터가 존 코너에게 '왜 인간은 눈물을 흘리지'라고 하는 질문에서 이미 물을만큼 물었다. 이제는 좀 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여전히 로봇을 다루는 소설들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으니 식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감정을 느낄 때 오히려 감동을 느낀다. 왜일까. 그것은 그 외의 존재를 인간보다 하등하다고 생각하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주인의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 고양이가 아기가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모습들은 사람이 했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동물은 '그럴 줄 몰랐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다. 거기에 느끼는 놀람과 감동의 감정은 그런 자만의 연장선에서 로봇에게는 조금 다른 형태로 생겨나는 것이다. SF에서 로봇이 주는 감동은 대부분 '그럴 줄 몰랐는데'라는 전제에서 발견된다. 그럴 줄 몰랐는데 릭 데커드를 구해주는 레플리컨트, 그럴줄 몰랐는데 사람처럼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에이아이 데이빗처럼 우리는 '그럴 줄 몰랐던' 안드로이드를 재발견 함으로써 항상 감동을 강요 받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언론에 이 책의 홍보 제목은 '이토록 따뜻한 인공지능이라니'라고도 되어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인공지능이 사이코패스보다 비정한 존재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그렇지 않음에 놀라고 감동을 받아야 할까. 

 

구성에서 보자면 작품에서는 '콜리'라는 로봇과 '투데이'라는 말의 교류를 경마라는 도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어떤 소재는 그 자체로 이야기의 결말을 말해준다. 인간은 더 나은 기록을 위해 말을 인위적으로 교배하고, 로봇을 만들어 내며 욕심의 끝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인간적인(?) 사람은 연재나 은혜 같은 어린 학생들이다. 생각해 볼 여지조차 없이 누가 봐도 이것은 그냥 학생들과 로봇 콜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다만 그 스토리라인에 로봇이 들어갔다는 사실만 좀 다를 뿐 나머지 구도는 여타의 소설에서 보아왔던 갈등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어른들의 욕망과 쾌락에 희생되는 동물과 버려지는 로봇들,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학생들의 이야기 구조는 뻔해도 너무 뻔하다. 뻔하다는 표현은 언제 가능한가. 초반 스토리 라인의 얼개를 알게 되었을 때 뒤의 이야기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때이다. 결국 이야기는 큰 반전조차 없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대로 흘러가고 등장인물들은 투데이의 단 2주 생명연장을 위해 너무 많은 희생들을 쉽게 치른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사실 이 소설이 SF로 가지는 문제는 다름 아닌 SF적 요소가 너무 부족한 점에 있다. 작품에서 사실 로봇을 빼면 SF적 요소는 거의 없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소방관의 죽음에 등장하는 다르파의 생존 수치 예견 시스템이나, 비오는 날 연재를 태워주던 다르파를 제외하면 그냥 지금 현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새로운 상상력이 없다. 그 부분들을 제외하면 '과학문학상'보다는 '청소년 문학상' 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 내용이다. 상상력이 나와서 덧붙이자면 한 번은 SF 영화가 디스토피아를 자주 그리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핵 전쟁, 환경 파괴, 자연 재해 등이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상력이 최소화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유토피아는 모든 것을 상상해 넣어야 한다. 가로등도 바꿔야 하고, 핸드폰, 운송수단, 정류장, 의복, 음식까지도 죄다 상상력으로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신 디스토피아는 아무것도 안해 놓고 그냥 지금의 뒷골목을 만들어 놓고 몇 가지만(날아다니는 택시 정도) 넣어줘도 무리가 없다. 소설에서 그런 상상력을 넣지 않고 싶으면 그냥 서사에만 집중하면 된다. 실제로 소설의 중간 정도에 가서는 콜리의 존재는 골방에 무릎을 끌어 안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로봇에 그치는 느낌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에서 강한 임팩트를 주기는 했지만 콜리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냥 필요할 때만 불러 쓰는 로봇 같은 느낌을 줄 뿐이어서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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