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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카뮈

[도서] 굿바이 카뮈

이윤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인생이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모퉁이마다 불쑥 불쑥 나타난다. 설사 인생을 걸었을만한 숭고한 가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도 달성된 후의 허무감은 피해갈 수 없다. 하물며, 객관적 가치라곤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여타의 삶이란 또 어떠하겠는가. 철학자 미첼 헤스먼은 무려 1900장의 문서에 인생의 무의미함을 남겨 놓고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모든 다양한 시도에도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는 패배자의 자살이라기보다, 차근 차근 쌓아올린 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도달한 귀납적 결론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저자는 이를 종교적 이유를 갖고 분신하는 베트남 승려의 모습에 가깝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과연 그의 말처럼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것인지 철학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무의미를 가장 설득력 있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작가는 '카뮈'이다. 그의 글들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의 제1명제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점에 비하면, 카뮈의 삶이 무척 가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사에 길이 남았으며, 레지스탕스 운동 등으로 신념을 위했고, 미모의 여배우들과의 관계에서도 큰 행복을 맛보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카뮈의 작품 '시지프스의 신화'를 분석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신들을 노하게 한 어떤 죄로 인해 매일같이 큰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는 벌을 받는다. 정상에 다다르면 그 바위는 다시 시작점으로 내려가고 시지프스는 다시 이 일을 반복한다. 이는 흡사 지금 우리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고도 보여진다. 그렇다면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 한 것이라면 우리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저서 '선과 악'의 마지막 장에서 시지프스 신화를 다룬 부분을 통해 이 신화를 분석한다. 사람들은 시지프스의 노동이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체만한 바위가 아니라 주먹만한 돌을 정상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괜찮아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시지프스의 고통은 경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고통의 근원이 노동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노동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은 공허함에서 나온다.

 

시지프의 과제가 주는 공포는, 그것이 쉽건 어렵건 간에 시지프스가 실패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제에 아예 성공이라 간주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우주에서 철학하기 p.40)

 

설사 신들이 노동의 과정에서 시지프스가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해도 그는 아무 의미없는 행위에 행복을 느낀 채 맹목적 노동을 반복하는 퇴행 환자 같은 인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욕구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는 더욱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관적 의미가 아닌 객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떨까. 돌을 굴리는 행위가 하나의 신전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상상해보는 식이다. 이 과정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세월의 풍화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돌이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신전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는 영원한 권태가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미로의 귀결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가치나 목적을 갖고 행위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 할 지라도 일년, 십 년이 지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해진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한 맥락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위를 하는 당시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실 중요한 것은 행위를 할 당시의 감정일 뿐이다. 무의미 하다는 것은 시선을 외부로 향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태를 내부의 시선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먼 훗날의 시점에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유한의 관점이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발생하다는 사실이다. (p.62)

 

결국 허무주의의 근간에는 외부의 관점을 내부의 시선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매미 유충이 17년 동안 기다린다는 사실을 하찮게 여길지라도 매미 유충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생존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달성하려는 신념이나 목표도 사회전체, 국가전체로 볼 때 나아가 지구 전체로 볼 땐 지나치게 무의미한 행위인 것이다. 결국 우리 관점이 어디에서 존재하느냐는 허무주의 극복의 중요한 키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인생이 의미를 갖기 위해 객관적 가치 생산을 위한 주관적 만족이 가능해야 한다. 말초적인 욕망이나 단순한 행복감이 아닌 객관적 가치를 지니는 행위를 통해 존재완성의 과정은 달성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잭슨 폴록의 'NO 5'로 인공지능 로봇을 다룬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도 등장한 그림이다.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물감 뿌리기면서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만약 마지막 결과를 예상하고 무의미함에 비중을 두었다면 그는 한 부분도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결국 그는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의미를 갖는 인생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 그려진 그림이든 애착을 갖고 이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삶을 자살로 마무리한 톨스토이도 있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 생의 존재를 발견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저자가 카뮈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것에서 결론을 내리기 보다, 삶 이면의 무의미를 알면서도 현재의 하루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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