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백영옥 작가님의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에 故 이은주 님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보였습니다.
그때 나와 같은 곳에 머물던 한 장기 체류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영화배우 이은주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도엔 인터넷 카페가 많아서 한국 소식을 아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녀가 죽고 나서 일주일이나 흐른 뒤 그 얘기를 들은 것이다. 이은주를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마 바나나를 빼앗긴 게 서럽고, 이 여행이 힘들고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143p -
고 이은주 님 자살 소식을 들었을때 군에서 훈련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요 근래 안타깝게도 연예인 자살 소식이 종종 들리지만 그때만 해도 연예인 중에 누가 자살한다는 것이 그리 쉽게 들을 수 있는 뉴스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 자살했데"하고 말하던 기억이 나네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상적으로 봤었던 연기자였기에 자살 소식은 좀 뜻밖이었습니다. 그날은 밖에서 훈련 받고 육공 트럭에 타던 때라 날씨가 무척 추웠습니다.
백영옥 작가님의 말처럼 저도 서럽고 힘들고 외로웠을때 왠지 그 노래가 머리속을 울리는 느낌이 종종 들었던 듯 합니다. 노래 가사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지만 그런 분위기, 기분에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곡보다도 그 사람이 불렀던 그 노래, 그 소리...묘한 울림...
잊혀지지 않는 노래
Only when l sleep란 노래를 극 중 가희(이은주)가 부릅니다.
그 노래가 머리속을 맴돌 때가 있습니다. 원곡이 있고 원곡을 부른 가수가 따로 있지만 故 이은주 님이 부른 노래가 더 유명하고 "주홍글씨"란 영화보다도 더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정작 영화는 그리 흥행하지 못했고 영화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더 많이 기억되는 건 아마도 배우의 자살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 네이버 영화, 주홍글씨에서 - ]
"번지점프를 하다"는 동성애적인 요소가 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죽은 애인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합니다. "주홍글씨"에도 동성애적 요소가 등장합니다. 어쨌든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은주 님은 초반에 죽는 역할이었지만 그 초반부에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유작이 된 "주홍글씨"에서 절정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은주 님은 출연한 영화마다 죽는 연기를 많이 했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는 역이었고, 차태현, 손예진 씨와 함께 했던 "연애소설"에서도 병에 걸린 역으로 나왔지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장동건씨의 애인 역할을 하다가 중간에 총에 맞습니다. 영화속 배역의 영향이었든 다른 이유였든 간에 안타까운 일입니다.
뭔가 섬뜩하면서도 묘한 느낌의 영화
영화관에서... 영화 전체적으로 노출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야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혹은 묘한 느낌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올드보이"에서 그 교실 회상씬에서 주던 그런 느낌이었는데요 교실 창밖으로 어린 대수가 두 어린 연인의 모습을 쳐다보았던 것처럼 관객들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가만히 숨 죽이면서 어떤 비밀 하나를 쳐다보는 느낌... 특히나 가희(이은주)와 성현(엄지원) 둘의 장면에서는 더욱 그랬던 듯 싶습니다.
가희가 처음 아내를 데리고 소주집에 나타났던 모습이 오래된 필름처럼 떠올랐다. 아내는 가희가 내게 자신을 소개할 때, 다소곳이 소주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숙의 표징이라 생각했던 것은 질투였고, 순진함은 전략일 따름이었다. 나는 아내와 가희를 만나고 가희는 나와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가희와 나를 만난 것이다.
내 거울은 나를 속였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 호출, 거울에 대한 명상 중에서, 274p -
김영하 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는 전 애인인 가희와 현재 아내인 성현이 "나"를 비춰주는 거울에 비유됩니다. 트렁크 안에서 가희에게 아내인 성현과 이야기를 듣고 "거울"에게 속았다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래서 제목도 "거울에 대한 명상"이라고 했을 텐데요.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왜 거울에 대한 명상이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를 다시 보고 책을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나"를 가희가 나르시스트 라고 부르는 데 그것도 거울과 연관지을 수 있겠네요.
어쨌든 영화에서도 트렁크에 갇힌 상태에서 가희를 통해서 아내 성현과 가희, 그리고 자신까지 이어진 삼각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지요. 순진하고 정숙했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숨겨진 모습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퍼즐조각처럼 하나씩 맞춰지고 드러나게 되지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소설보다도 좀 더 농도 짙게 묘사해 냅니다.
트렁크 장면은 정말 장난 아니었죠. 트렁크에 선혈이 낭자할 때 영화관 스크린에도 붉은 빛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처절하달까요. 한석규란 배우가 "쉬리"란 영화로 유명해진 이래 국내 영화에서 톱스타로 자리매김 했지만 솔직히 그 이후의 영화가 그렇게까지 흥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주홍글씨"에서, 특히 트렁크 씬에서 보여준 연기는 가히 절정이랄까요. 좀 지저분한 느낌도 들고 섬뜩한 느낌도 들고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그런 느낌을 관객에게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두 배우가 트렁크 안에서 보여준 연기는 혼신을 다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 열연에 비해서 영화가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원작과 영화와의 거리
영화 "주홍글씨"는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하고 "사진관 살인 사건"을 합성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트렁크 씬에서 가희가 주홍글씨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솔직히 그 부분이 그렇게 와 닿지는 않고 제목을 왜 주홍글씨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하긴 원작을 가져오면서 그대로 제목을 대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주홍글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는데요. 막상 영화를 보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관 살인사건"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 KBS문학극장이나 MBC베스트 극장같은 - 보았던 기억이 얼핏 납니다. 영화관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이 맞더군요.
겨우 이런 거였나. 나는 미궁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천천히 집으로 차를 몰아오다가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갑자기 충동적으로 차를 유턴시켜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사진관은 셔터가 올라가 있었고 희미하게 여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정명식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잠시 후, 그가 사진관 밖으로 나와 갈고리로 셔터를 끌어내렸다. 그리ㅣ고는 상가 쪽 뒷문으로 돌아가 사진관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사진관 살인사건 중 43p -
"사진관 살인 사건"은 대체로 이렇게 끝납니다. 결국 범인은 다른 사람이었지만 애초에 용의자로 지적된 두 남녀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었던 거죠. 영화 주홍글씨의 또다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는 성현아 님이 살해된 사진관 주인의 아내로 나옵니다.
소설의 결말과 영화에서 끝맺음은 약간 다르게 나옵니다. 어쨌든 어떻게 생각하면 두 단편 소설이 서로 관련성이 있어보이기도 합니다. 소설만 보자면 "사진관 살인사건"에 나오는 형사의 아내에게도 "다른" 남자가 있었고 "거울에 대한 명상"의 "나"의 아내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면 원작이 된 두 소설을 섞어서 영화가 더 좋은 영화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영화에서 전체적인 틀은 "거울에 대한 명상"이 차지하고 "사진관 살인사건" 부분은 기훈(한석규 분)이 겪는 하나의 일로 영화에서 부분적인 느낌이 드네요. 혹은 액자 구성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훈(한석규)이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는 딱히 직업이 나오지 않지만, 두 원작을 연결하기 위해서 형사 역할을 맡긴 듯 합니다. 영화 시작은 기훈이 "사진관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가면서 시작하는데 어쩌면 극중 형사라는 역할이 두 소설을 연결짓는 데 가장 알맞았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는 "나"라는 사람을 가희가 나르시스트라고 부릅니다. 그 깔끔해 보이는 모습 뒤편에 담긴 이중적인 모습이 한석규라는 배우에 잘 어울렸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영화를 보면 기훈의 직업을 형사로 해서 이어붙였지만 그 이음새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두 원작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왜 두 소설을 섞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어찌되었든...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이 원작이 되어서 기억에 남고 그 소설이 두 개나 들어가서 특이했고 배우들의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연기가 또 기억에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노래가... 이은주 님의 모습과 함께... 그 목소리와 함께... 잊혀지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다만 원작 소설의 재미와 배우들의 열연에 비해서 흥행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저 자신은 그 트렁크 장면만 빼면 - 하긴 그것이 영화에서 절정이었을텐데요 - 그런대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꼭 보세요 하고 추천해 드릴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원작을 읽고 그 여운을 생각하면서, 그 노래를 떠울리면서 본다면 그런대로 볼 만한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ps. 소설이 영화화 된 영화를 - 국내 소설- 생각하다보니 "바람의 전설"하고 "주홍글씨"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것도 많겠지만 인상적이었던 두 영화를 우선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