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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저/김영옥,윤미애,최성만 공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한 때는 문학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는 현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선량한 자가 핍박받고 악한 자가 득세하는 세계. 그렇지만 문학 속의 이야기는 현실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과거로부터 전래한 신화와 이야기들은 착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었다. 선한 자가 몰락하고 약자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 그 비극성 속에 일말의 비판적 전망과 희망이 있었다. 『파우스트』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도 모순은 존재했지만, 작품의 완결된 형식 속에서 질서 있고 아름답게 삶이 직조되어 있었다. 무질서하고 황폐하며 추악한 현실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그런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철학은 문학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도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문학으로 접근하는 통로로서 철학은 일종의 세계관에 가까웠다. 문학이 현실과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통용되는 코드로는 문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철학은 문학의 이질성을 다른 언어로 해명해 주었다. 플라톤을 위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맹자가 들려주는 말들은 모두 도끼가 되어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알튀세르와 푸코는 인간이 온전한 주체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 호명된 형성물이라고 알려주었다. 사르트르는 타자가 나의 자유를 시선으로 강제하는 지옥이라고 했다. 그 모든 철학의 담론들은 텔레비전 광고, 저널리즘이 즐겨 인용하는 통계와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나는 철학이 은폐된 진리를 계시해준다고 믿었다. 그림자를 실재로 믿고 살아온 수인은 철학의 은총으로 드디어 동굴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문학과 철학 역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구원이란 없다. 신의 이름 하에 신음하던 인간이 해방되는 서사 속에 흑인이나 여성이 억압되는 은폐된 구조가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 배제와 타자화가 나타난다. 문학사에서 칭송 받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일정한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어쩌면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질서와 아름다움은 특정 타자를 배제한 결과물일 수 있기에 환상이며, 잘못 실현되면 기만이 된다. 철학은 그 자신의 담론이 이데올로기가 됨을 감수하고 주장하는 총체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도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철학자가 만든 철학의 총체성은 구체적인 인간과 세계를 추상해서 얻은 대가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담론 안에서 명제가 참이 되더라도, 담론 바깥에서 무력해진다. 그래서 모든 담론은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은 편견과 고정관념, 좋은 말로 선이해를 떠나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자유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은 중단없이 비판 작업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사회가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철학이라는 대항 담론으로 깨부순 후에는, 철학에 대립하는 반철학 또는 비철학을 세움으로써 철학 이데올로기를 허문다. 진정한 해방에는 결말이 있을 수 없다. 한 존재자가 이 세계에서 숨쉬기를 마치는 순간까지 비판을 지속하려는 의지에 자유가 있다.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그러한 자유를 실천하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식 체계의 모순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침식되어 있는 도시를 낯설게 바라봤던 철학자의 사유가 펼쳐져 있다. 백 여 년 전에 탄생한 이 책은 오늘날 읽어도 참신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벤야민은 점증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전체주의 기운과 거리를 두고 있다. 비판적 거리는 당연히 내용 상으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독자가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책과 글의 형식이다. 주유소, 확대사진, 골동품, 벽보와 같은 도시에서 만나는 대상이 표제어인데 그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다른 연상을 펼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Fakten, 事實)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69~70쪽)

 

표제어는 '주유소'이지만 글의 내용은 주유소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연관성이 있다면 주유소-기름-윤활유의 연상에 의한 연결뿐이다. 글은 유물론을 말한다. 확신은 관념론 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세계를 파악하는 주체의 힘과 권능을 강조한다. 타자는 상위의 인식으로 도달하기 위한 반테제로서 의미를 지닌다. 변증법적 지양은 새로운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변증법과 다른 방향에서 진리를 마주하고자 한다. 확신보다 사실이 삶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관념 바깥에 실재하는 타자의 힘과 권능을 중시한다.

 

문학이 문학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확정된 문학의 범주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진리는 책, 거대한 체계로 인간사와 자연사를 정리한 담론 안에 있었지만, 현대에는 전단, 팸플릿, 포스터가 정보를 실어 나른다. 전단, 팸플릿, 포스터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토대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상품을 유통시키는 매개 역할을 담당한다. 이 현대적인 매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고 소비되는 언어의 형식을 타고 진리가 전파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 이미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대중사회가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헤겔이 지향했던 절대 정신으로서의 학문 체계, 거대한 학문적 구조가 아니라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와 사실들이 구성하는 힘을,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순간 의미있게 성좌가 되는 순간을 더 중시했다.

 

벤야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19세기의 담론이라면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은 20세기의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견은 옳았을까? 이 역시 상징보다 알레고리를 선호하는 특정 관점의 이데올로기임에 틀림 없지만, 그의 의견은 어느 정도 옳았다. 타자를 주체에 동화시키기보다는 타자의 균열에 자기 자신을 거는 철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철학만이 반성적 철학이며, 신화가 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 없이 변화하는 세계와 발을 맞추어 진보하는 인간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문학다움을 고수할 때, 철학이 철학다움을 주장할 때, 그것들은 급격히 보수화되고 망가진다. 느닷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 같은 타자를,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직시하는 정직성만이 해방이다. 그는 현대를 호흡하는 철학자였다. 당대를 지배하는 공기와 향기를 미세하게 식별할 줄 아는 탁월한 감식안을 지니고 있었다. 철학이 대중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까다로운 책'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팜플렛'과 같을 것이다. 오늘날로 번역한다면 방송과 유튜브를 외면하고 대중에게 충격을 주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벤야민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책의 충격 효과는 유튜브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다시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리라.

 

어쨌든 주유소, 차량에 연료를 주입하는 장소는 벤야민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준다. 주유소의 일반적인 쓸모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인식이라면, 벤야민은 교환가치로 환원되어 버린 특정 공간을 다시 사용가치로 환원시킨다. 그런데 사용가치는 주유소의 기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연료'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유물론 선언'으로 재배치된다. 주유소는 새로운 신화, 꿈이 된다. 그곳에서 부르주아의 신화를 대체할 새로운 신화가 탄생한다. 그 신화를 벤야민은 자신의 꿈 이야기로, 기계 장치 메커니즘의 세부 묘사로, 책읽기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보는 길이라면, 베끼기는 두 발로 걸어가는 길이라는 주관적 은유로, 말리는 충고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삶의 지혜가 담긴 경구로, "천재는 근면함이다."(74쪽)라는 통찰이 담긴 문장으로 내어 보인다.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 나열되어 있는 글들은 독립적이면서 각자가 새로운 신화를 구성하는 별들로 반짝인다. 글들에서 의미를 찾고 직조하는 몫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벤야민의 탁월함은 사유를 이미지화하는 능력에 있다. 사유는 개념이고, 이미지는 직관이다. 사유는 언어와 논리의 영역이지만 이미지는 세계와 감각의 편이다. 벤야민은 이미지로 사유를 전개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창안해 내었다. 그것은 상투적인 소통과 진부한 코드를 벗어나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을 열린 자세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미덕으로 갖는다.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닐까?"(223쪽) 아, 철저하게 관념론자인 나로서는 벤야민의 글쓰기가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세계에 손을 내밀어 본다. 더 감지하고 느끼고 싶다. 더욱 풍요롭게.

 

운율에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 그것은 마치 장벽의 갈라진 틈새를 통해 연금술사의 방 안으로 흘러든 빛살이 여러 결정체, 구, 삼각형들이 빛나도록 하는 것과 같다.(97~98쪽)

 

사람을 대할 때 일상적 예절을 중시하면서 거짓말을 비난하는 사람은 유행에 맞게 옷을 입으면서 정작 내의는 입고 있지 않은 사람과 같다.(109쪽)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126쪽)

 

내부공사 관계로 임시 휴업!

꿈에서 나는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총을 쏘았을 때 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시 시체로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잠에서 깨어났다.(141쪽)

 

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확신(Uberzeugung)을 강탈하는 도적떼와 같다.

범죄자를 죽이는 것은 윤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범죄자를 죽이는 것의 합법화는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그리고 국가는 모든 인간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다. (149쪽)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 Geistesgegenwart)야말로 미래의 진액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153~154쪽)

 

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알게 되는 곳

그곳은 그의 실패에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고 그 약점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강한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배를 업신여기고 우리의 불운을 부끄러워한다.(172~173쪽)

 

충고를 부탁받은 사람이 제대로 충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고를 부탁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다음 그 의견을 승인해주는 것이 좋다.(185쪽)

 

첫 번째 꿈

율라(Jula)와 함께 나는 어디를 가고 있었다. 우리의 일정은 산행도 산보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었다. 우리는 산 정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돌출한 암벽을 뚫고 나와 암벽과는 엇갈린 방향으로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치솟은 말뚝을 산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위에 올라갔을 때 그것은 산 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편편한 고원이었고, 그 위에는 양편으로 상당히 높은 고풍스러운 집들이 서 있는 넓은 길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길을 따라 달리는 차에 타서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가는 동안 그 차가 방향을 틀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몸은 율라 쪽으로 기울어졌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내게 입이 아니라 뺨을 갖다 댔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뺨이 상아로 되어 있고 그 뺨을 따라 정교하게 까만 줄이 길게 칠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187쪽)

 

성공은 세상사의 변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은 그 성공을 추구하는 의지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성공의 진정한 본질은 성공을 초래한 원인들이 아니라 성공이 예정된 사람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성공의 정체는 바로 성공의 총아들에서 밝혀진다. 그 총아들이란 곧 성공의 응석받이들, 성공의 의붓자식들이다. 세상사의 변덕과 짝을 이루는 것은 개별 존재 속의 괴팍함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은 예로부터 희극의 특권이었다. 희극에서 관철되는 정의는 하늘의 작품이 아니라무수한 실수들이 모여 이루어낸 작품, 마지막 작은 실수 하나로 마침내 정확한 결과를 산출하게 되는 그런 실수들의 작품이다. (188쪽)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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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na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1.09.14 14:58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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