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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도서]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이한중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조지 오웰의 산문집을 읽었다. 책 자체가 오웰의 중요한 산문을 모아 놓은 것인데, 나는 그 중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산문을 다시 추렸다.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는 구체적인 일화를 소설처럼 기술해 놓은 글이다. 책에 수록된 초기 산문이 작가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면, 「정치와 영어」, 「나는 왜 쓰는가」, 「작가와 리바이어던」과 같은 후기의 글들은 작가와 정치, 글쓰기의 관계를 선언하는 사상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었다. 글의 결은 다르지만 오웰이 쓴 산문은 전기이든, 후기이든 상관 없이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직성'이다.

 

시인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바로 봄'을 선언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일부

 

시인은 어째서 바로 보겠다고 하는 것일까. 바로 보겠다는 선언과 의지가 없이는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절박한 의식 때문이다. 생활에 침윤되면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활인은 공기처럼 당대 이데올로기를 호흡한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지배적 담론에 의해 의식을 형성하며 국가 주체로 호명된다. 소위 편견과 고정관념이라고 일컫는 프로그램화된 사고 방식이 주입된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자명한 대상은 실은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거쳐 왜곡된 상으로 인식된다. 들뢰즈가 '다양체'라는 개념으로 물자체의 영역에 있는 대상을 상상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대상을 바로 보겠다고 선언한다. 사물 그 자체를, 사물의 생리를, 수량과 한도를, 우매함까지도. 명석하게 보겠다고 한다. 명석판명한 앎은 데카르트를 상기시키지만, 데카르트를 초과한다. 사물을 바로 보게 될 때, 그는 코기토의 확장이 아니라 죽음으로 도약한다. 당대 이데올로기를 진공상태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약호인데, 그 약호를 지우는 순간 시인의 언어는 생활인에게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버릴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시'라고 알고 있다. 오웰은 '죽음'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시'가 아니라 '산문'을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웰은 대상을 탁월하게 묘사할 줄 안다. 한 인도인의 교수형을 참관했던 경험을 담은 「교수형」에서 형장을 향하는 수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교수형」, 25~26쪽)

 

독자는 죄수의 뒤를 따르는 글쓴이의 시선으로 죄수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미 대상을 언어로 묘사하려고 일찍부터 노력해 왔음을 털어 놓은 바 있다. 그런데 묘사력은 단순히 말을 멋지게 부리는 것으로 힘을 얻지 못한다. 대상을 정확히 보려는 주의력과 관찰력이 요구된다. 오웰은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사물을 바로 보려했다. 그가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생활에 일찍이 환멸을 느꼈던 것도 그에게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초과해 버리는 감각적 촉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주의 관념에 빠져들지 않았다. 사물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볼 줄 알았다. 그래서 위 인용에 이은 서술은 편견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대상과 정직하게 조우하는 시선을 증언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 - 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6쪽)

 

「코끼리를 쏘다」 역시 그의 지적 정직성을 잘 드러낸다. 발정난 코끼리가 마을에 난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부순다. 오웰은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에 가서 총을 구한다. 그런데 일이 커져 오웰의 주변으로 버마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오웰이 총으로 코끼리를 쏘아 죽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천 명의 눈 앞에서 그는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과감한 지배자로서 행동해야 했다. 코끼리를 쏘지 않는 것은 압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이천 명의 시선에 떠밀려, 죽이고 싶지 않았던 코끼리를 총으로 명중시킨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일종의 영웅이 된 셈이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부조리와 모순을 느낀다. 저 순간 오웰은 제국-식민지의 역학이 작용하는 생활 공간 속에서 '지배자'의 탈을 쓰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였다. 지배자이면서 오히려 피지배자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체험한 것이다. 이를 아이러니로 느끼는 자체가 이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실존을 증명한다. 그의 산문이 투명하고 산뜻하다면, 그것은 관념의 막을 걷어낸 그의 시선 덕택이리라.

 

후기 산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정치와 영어」였다. 생활이 타락하면 언어가 타락하는 것 못지않게, 언어가 타락해도 생활이 타락한다는 명제는 울림이 크다. 이 글은 저널리즘과 지식인 담론에서 횡행하는 군더더기 표현이나 라틴어로부터 유래하는 젠체하는 언어, 상투적인 표현 등이 사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전달하기보다는 애매하게 처리하여 독자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이러한 상투어는 이해하기는 어렵고 사용하기는 편하다는 특징이 있다. 상투어는 고유한 인식을 포기하고 언어를 편하게 부리려는 정신의 마취 상태를 반영한다. 전도서를 소위 타락한 언어로 번역한 다음 대목은 충격적이다.

 

내가 돌아가 해 아래를 보니 경주는 빠른 자의 것이 아니고, 전투는 강한 자의 것이 아니며, 빵은 현명한 자의 것이 아니고, 부는 사려 깊은 자의 것이 아니며, 총애는 기량이 뛰어난 자의 것이 아니니, 이는 시간과 기회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는 까닭이더라.

(I returned, and saw under the sun, that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neither yet bread to the wise, nor yet riches to men of understanding, nor yet favour to men of skill; but time and chance happeneth to them all.)

 

다음은 현대식 영어로 고쳐본 것이다.

 

당대 현상에 대한 객관적 고찰에 따르면, 경쟁적인 활동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선천적인 능력에 비례하는 경향성을 표출하지 않으며, 상당한 예측불능의 요소가 변함없이 고려돼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Objective consideration of contemporary phenomena compels the conclusion that success or failure in competitive activities exhibits no tendency to be commensurate with innate capacity, but that a considerable element of the unpredictable must invariably be taken into account.) (「정치와 영어」, 265쪽)

 

오웰이 지적하듯 두 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글이 구체적인 일상어와 이미지로 되어 있는 반면, 둘째 글은 추상적인 단어와 군더더기 표현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에 있다. 오웰은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정치와 영어」, 270쪽)며 타락한 글쓰기를 야유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향한 것이 아닌가! 나 역시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를 찾기보다는 추상적인 어휘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던가. 글 쓰는 사람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글 쓰는 사람은 그 정도가 다를지언정 부조리한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견고하게 하는 데에 동조할 것이 틀림 없다.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무방비한 마을이 폭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관총 난사를 당하고, 오두막들이 소이탄에 타버리는 것을 '평정平定' 이라 부른다. 수백만의 농민이 농지를 강탈당한 뒤 지고 갈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걸어서 길을 떠나도록 내몰리는 것을 '인구 이동' 이나 '전선 조정' 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재판도 못 받고 몇 년 동안 투옥되거나, 뒷덜미에 총을 맞거나, 북극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괴혈병으로 죽는 것을 '의심 분자 제거'라 부른다. 이런 식의 어법은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법 없이 명명하고자 할 때 필요하다."(「정치와 영어」, 270쪽)

 

'평정'이니 '인구 이동'이니 '의심 분자 제거' 등의 언어는 기호로 장막을 쳐서 사태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한국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남용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 '국가와 민족의 발전' 등의 언어가 실은 텅 빈 깡통 같이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런 상투어를 쏟아내는 인간은 경계해야 한다.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데에 기여하는 세력임이 틀림 없을 터.

 

오웰이 죽을 때까지 투쟁했던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당파성을 앞세워서 사태를 왜곡하는 기만 혹은 거짓이었다. 그는 작가의 생활은 당파적이더라도 글쓰기는 생활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옹호했던 그가 어째서 정치생활과 글쓰기를 구분하라고 한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의 글쓰기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특정 세력의 눈치를 보거나 외압을 느낄 때 글은 변질된다. 정직하지 못한 글쓰기는 독자를 기만한다. 그러므로 창작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에게 글쓰기 만큼은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터럭만큼이라도 자기 표현을 검열하게 될 때, 창조력은 압살되고 마는 것이다. 자유가 온전히 주어진 글쓰기가 오히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사물을 바로 보는 정직성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직한 글쓰기만이 감옥같이 생활인을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탄핵할 수 있다. 햇빛이 안개를 몰아내듯, 정직한 글쓰기는 나쁜 이데올로기를 흩어버린다. 좋은 글을 읽을 때 독자의 눈이 환해질 것이다. 그것이 오웰이 염원했던 세상이다. 그가 죽고 반 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바라던 세상은 도래한 것일까? 우리는 정직한가? 그리고 제정신으로 사물을 바로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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