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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도서] 동물농장

조지 오웰 저/도정일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은 전체주의 사회를 우화로 풍자한 소설이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어서 책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회자된 바가 있고, 각종 필독 도서 목록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우화가 지닌 장점인,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고 간명하게 보여주거나 역사적인 현실을 의미 있는 플롯으로 엮어서 되비춰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세계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오웰이 그리고 있는 '동물농장'은 현실 사회주의의 대표 주자였던 소련의 역사를 알레고리하고 있다. 존스 씨가 운영하는 매너 농장은 러시아 혁명 전의 봉건국가를 가리킨다. 존스로 대표되는 지배자(왕과 귀족)는 동물(인민)들을 착취한다. 압제에 시달리던 동물들은 우연한 계기로 존스를 내쫓고 '동물농장'을 세운다. 동물농장은 말 그대로 동물이 주인된 농장이며, 프롤레타리아가 주인된 국가를 연상시킨다. 러시아 혁명기에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국가를 이끌었다. 지도자들은 새로 건설된 사회를 구상했고 제도를 정비했고, 강령을 세웠으며, 방향을 설정했다. 그들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몸으로 일하는 계층과 구별되는 노동당의 수장이었다. 노동당원은 지도자 계층이 되었고 인민과 구별되는 특권을 누렸다. 소설에서는 영리하고 합리적인 '돼지'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동물농장 운영 방향을 두고 부딪치는데, 이는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들의 갈등은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 사이의 권력 투쟁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의 러시아가 스탈린 독재로 변질되면서 동력을 상실했음을 안다. 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이 실권을 쥐면서 폭력과 강압으로 동물을 착취하는 체제가 다시 수립되고 결국 혁명은 변질되며 왜곡되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소설 『동물농장』은 소련이 형성되고 타락하는 양상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어쩌면, 실제로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면서 이 소설은 더 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오웰의 공격처럼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타락하고 실패한 체제였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선각자였다. 그렇게 서구 자유주의 국가의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은 나팔을 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괜히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과 대립하고 있던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동물농장』이 반가웠으리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한패이다.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에 개인의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장치들이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문화적 장치로 오웰의 작품은 호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더 정치한 검증을 요구하는 가설에 불과하다. 허나,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국가를 비판하는 소설이라는 편협한 해석이 대중화된 오늘의 상황을 보면 가설이 터무니 없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오웰의 작품을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서라고 단정짓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특정 계층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사회주의가 틀렸다면 자본주의는 옳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옳다면 그들이 누리는 특권도 옳다.

 

내가 보기에 『동물농장』의 진정한 주제는 사회주의 풍자가 아니다. 풍자의 대상은 오히려 국가가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본성이다. 조금만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전체주의를 부르는 인간의 본성을 꼬집는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을 설립한 이래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권력의 문제, 지배와 피지배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실 사회주의 국가만 풍자한 것이 아니라 개체의 자유를 압살하려는 모든 권력을, 타락한 권력을 재생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공격한 것이다.

 

『동물농장』은 계급이 있던 봉건사회에서 계급을 타파한 혁명이 실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교체에 불과했음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플롯이 설계되어 있다. 혁명은 애초에 불평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동물들이 무력으로 존스 일가를 몰아내고 동물농장의 주인이 되었음을 인식하였을 때, 젖소들이 울부짖는다. 인간을 몰아내자 젖을 짤 인간의 손이 사라진 것이다. 돼지들이 나서서 우유를 짠다. 그런데 짜두었던 우유가 조용히 사라진다. 알고보니 우유는 돼지들이 슬그머니 가로챈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자 스퀼러가 돼지들은 동물농장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하므로 돼지들이 그 우유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동물들을 설득한다.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나폴레옹과 달리 스노볼은 동물농장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인간에게 대적해서도 용감하게 싸워서 훈장을 받는 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긍정적인 지도자로 그려지지만, 그조차도 우유를 소유하는 특권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불평등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간이 모이는 사회 집단에서는 크고 작게 지배-피지배 관계, 주인-노예의 관계가 성립하며, 아주 사소하고 작은 차이로 시작된 힘의 불평등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소설은 권력의 작용과 불평등의 심화 과정을 미묘하면서도 명쾌하게 보여준다.

 

돼지들은 인간의 글을 읽을 줄 아는 종으로 지식을 독점한다. 염소 뮤리엘과 당나귀 벤저민도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돼지들만이 인간이 쓴 책(고급 지식)을 소유하고 지식에 접근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안할 권리를 갖는다. 힘센 말 복서는 알파벳을 외우는 것조차 힘들어서 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육체적인 노동에만 헌신한다. 지식의 불평등은 권력의 불평등을 낳는다. 힘을 가진 쪽이 약자를 기만하고 교묘하게 착취하는 상황을 만들어 간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을 쫓아낸 후에 스노볼을 점차 배신자, 악마로 만들어간다. 풍차를 만들려는 계획은 스노볼이 구상한 것이지만 나폴레옹은 스퀼러를 이용해 사실은 나폴레옹이 풍차를 계획한 것이고 스노볼은 풍차를 폭파시킨 주범인 것으로 호도한다. 스노볼이 피를 흘려가며 인간과 용감하게 싸웠던 사실도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으로 조작된다. 안타깝게도 동물농장의 대다수 동물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나폴레옹의 계략에 속아넘어간다. 계명도 바뀐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문장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수정된다. 동물들은 그것이 바뀐 것 같다는 느낌만을 갖는다. 나폴레옹의 무력에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복서는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는 잘못된 신념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여 말년에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오웰은 단순히 권력자인 나폴레옹만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기 권익을 자신도 모르게 박탈당하는 무지한 대중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의 동물은 인간의 알레고리로서 서로 같으면서 같지 않다. 동물농장의 오리와 닭과 같은 동물은 선천적으로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인간이라면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소수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적으로 동일한 능력을 지닌다. 누군가 나는 '머리가 나쁘다'라고 단정짓는다면 그는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적으로 탁월해 질 기회와 인연을 얻지 못한 것일 뿐, 혹은 의지를 발휘하지 않았을 뿐, 누구나 탁월해질 수 있는 마음의 싹을 지니고 있다. 오웰이 동물을 내세워서 인간 사회의 모순을 폭로할 때에 독자가 느끼는 묘한 부조리는 이러한 알레고리 효과로부터 온다. 동물과 인간은 같으면서 다르다. 독자는 소설 속 세계와 소설 밖 세계를 오고 가면서 서로를 비춰본다. 독자는 진정으로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각자가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를 듣는다. 앎은 괴롭고 무지는 편하다. 각자가 편안한 무지에 함몰된다면, 탐락(하이데거)의 상태에 빠진다면 악덕은 재생산되게 마련이다. 대중은 권력을 가진 자들을 견제해야 한다. 오웰이 믿었던 민주주의도 이것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긴장의 끈을 놓으면 부패한다. 돼지들은 처음에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이내 매력적인 선망 기표인 인간 기호를 소유한다. 그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암말 몰리가 댕기를 단 자기 모습에 찬탄하는 나르시시즘은 기호의 사이에도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댕기는 인간 문명의 표식이며, 인간성을 드러내는 중심 기표이다.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표식이 매력적으로 보이면서 주체를 현혹하는 것이다. 혁명을 지도할 만큼 나름 합리적인 족속이었던 돼지들은 권력을 차지하자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인간의 기호를 소유하려 든다. 존슨이 살던 본채는 폐쇄되었지만 실권을 확보하자 돼지만이 본채에서 생활한다. 인간처럼 침대에 눕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는 금지되었지만 돼지들은 예외적으로 허락되어 안락과 향락을 즐긴다. 돼지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가 만들어진다. 특권을 대물림하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돼지들은 인간처럼 두 발로 선다! 돼지들은 어느새 최초의 압제자였던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풍자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의 타락은 인간과 돼지를 뒤섞어버린다.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134~135쪽)

 

권력을 가진 주체가 타락하는 현상은 사회주의 국가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인류사에서 무수하게 반복되었다. 한국사를 조금만 되돌아보면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해 민중을 수탈했던 잔혹한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가리기 위해 지금은 유래없이 자유가 보장된 시대라고 선전하는 장치는 없는가? 시민들 모두가 깨어 있기 위해서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을 연마하려고 애쓰는가? 그보다는 각자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 부를 불리기에 바쁜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 국가 역시 자유라는 외피 아래에서 권력은 타락하고 대중은 무지하여 지배와 피지배 계층이 기이한 공생관계 속에서 부조리를 증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비판은 몰락한 구소련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 국가가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모든 문명 국가에 유효하다.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권력을 가진 존재가 피지배자들을 기만하면서 그들을 착취하고 있다면, 허위 의식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법칙으로 착각하고 고통스러운 자각보다는 무지 속에서 안락함을 누리려고 하는 인간이 많아진다면, 그곳은 전체주의 국가이다. 자본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동물농장』이 독자에게 작용하는 힘이 강력한 까닭은 소설 플롯의 치밀한 구성에 있다. 메이저의 연설로부터 시작하는 혁명 전야에서 메너 농장을 동물농장으로 바꾸는 혁명, 권력투쟁, 독재, 타락, 매너 농장으로의 회귀에 이르는 사건들이 비약 없이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여 결말에 이른다. 오웰은 정확한 문장을 쓰고자 했다. 정확성은 정치적인 힘이 된다. 독자의 마음을 파고들어가 그를 변화시킨다. 작가가 쓴 작품을 읽고 독자가 현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오웰이 어느 산문에서 주창한 정치적 글쓰기의 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가 쓴 소설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하게 된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내 경우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는지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그 여러 동기들 가운데 어느 것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나는 안다. 내가 쓴 책들을 돌아보니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하는 형용사들 속으로 속아 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들을 했다는 사실을 알겠다. (「나는 왜 쓰는가」,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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