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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과 영혼

[도서] 집중과 영혼

김영민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김연아를 기억한다. 지금은 텔레비전 광고에 주로 얼굴을 비추지만, 그녀가 선수 시절에 빙상 위에서 펼친 연기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완벽한 동작, 섬세한 표정과 제스처,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정확성은 피겨 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준다. 트리플 악셀이라는 피겨 스케이팅 용어가 귀에 익게 된 것도 김연아 덕분이었다. 나는 광고 모델 김연아가 아닌 빙상 위의 김연아를 더 기억하고 싶다. 광고에서는 그녀가 상품으로 전시될 뿐이지만 피겨 스케이팅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극점에서 실현한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통달하여 비범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경탄한다. 그들의 솜씨를 일컬어 신의 경지라고 칭송한다. 보통 사람의 기량과 비교하여 동뜨게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그리고 그 성취가 일회성의 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처럼 보이는 성과가 계속해서 실현되는 사람들. 보통 달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수행으로 탁월성을 증명해 보인다.

 

『집중과 영혼』은 이처럼 인간적인 존재를 넘어선 인간을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김연아와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도달한 그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 김영민은 그 알짬이 인간의 '집중'하는 능력에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런저런 일에 마음을 쏟는 가운데 한 곳에 의식을 모으는 경우가 있다. 학교에서 집중은 흔히 들리는 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집중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동물의 수준 너머에 있는 인간적인 태도를 주문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은 인류가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갖게 된 특이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특이한 까닭은 그것인 생존과는 무관한 의식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집중의 반대편에 '애착'이 있다. 욕망은 바지에 엉겨붙는 껌처럼 대상을 모르고도 그것에 달라붙는다. "인간의 갖은 욕망이 부리는 리비도적 애착은 마치 점성 좋은 껌같이 오직 그 장소, 그 시간, 그 관심만을 고집하며 비켜나지 않는다. 껌은 바지를 모르지만, 필경 파괴적으로 바지를 고집하는 것이다." (12쪽) 리비도는 자기를 분출할 대상을 성급하게 찾는다. 애착의 특성은 참지 못함, 즉흥성에 있다.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동물적 특성은 과거 동서양의 철학자에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손에 들고서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그리하여 신체로 인해 더럽혀진 영혼의 정화라고 주장했다. 달뜬 욕망은 인간의 균형감각을 해치고 동물적 상태로 타락시키기 때문에 야생마를 조련하듯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니체가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라고 했듯,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인내와 절제는 인간적인 행동이다. 먹이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고양이에게 "다음에 줄게!"라는 말은 허망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다음에 줄게!"가 효용을 가지며, 인간은 그 말에 담긴 약속을 믿고 이행할 줄 안다. "내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상하는 존재, 기대를 생산하는 존재”인 것이다."(30~31쪽)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의식'의 발달은 인간 존재의 혁신을 가져온 진화사의 한 결절점이 된다.

 

그런데 집중은 인간이 지닌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곳에 집중할 때에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표백되고 자기를 잊어버린 채 대상에 몰두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주일무적, 성성적적의 경지라고 일컫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망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중의 요체는 의식의 힘을 통해서 의식의 토대가 되는 '나'를 잊음에 있다. "비록 좁은 길이고 짧은 체험이긴 해도 최고의 기량 속에서 잠시나마 번득이는 빛은 대체로 에고를 극복했거나 망아(忘我)에 이른 것처럼 보이며, 그 과정은 집중과 구성적으로 관련된다." (249쪽) 이덕무는 팔뚝이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는 글쓰기 체험을 증언한다.

 

내 마음은 한 가지 경계에 깃들어 형상과 접촉하여 만약 하는 바가 있게 되면, 갑자기 눈동자가 돌아가고 팔뚝이 움직이며 손가락이 덩달아 붓을 잡는다. (…) 마음은 눈을 잊고, 눈은 팔뚝을 잊고, 팔뚝은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벼루는 붓을 잊고, 붓은 종이를 잊게 되니, 이러한 때에는 팔뚝과 손가락을 마음과 눈이라고 불러도 괜찮고 먹과 벼루를 붓과 종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고요히 마음을 거두고 맑게 눈을 안정시켜 (…) 잠깐 사이에 붓과 종이, 먹과 벼루, 마음과 눈, 팔뚝과 손가락은 서로를 도모하지 않고, 또 앞서 하던 일을 까맣게 잊게 된다(195~196쪽, 정민 2000 재인용)

 

육체를 벗어나는 노력이 의식이라면, 의식을 넘어서려는 노력에 집중이 있다. 자기가 지닌 애초의 그릇의 한계를 넓히려는 노력이 공부일진대, 공부의 중심에는 집중이 있게 마련이다. 김영민은 다양한 각도에서 자기(1)를 잊는 영도의 체험(0) 또는 나(1)와 너(2)가 맞부딪히고 어긋나고 분망해지는 세속을 벗어난 (귀)신의 경지(3)를 언급한다.

 

대개 달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완고한 에고를 잊어버리는 체험을 증언한다. 일본의 마사지사들은 손님의 몸을 마사지하는 상황에서 손님의 몸을 치료하는 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대신 마사지를 해준다고 느낀다. "진짜 달인은 자신이 손님을 고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손님을 둘러싸고 있는 큰 존재의 힘을 빌려, 그걸 손님 몸에 흘려넣어요. 우리 마사지사는 그 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304쪽, 이소마에 2016 재인용)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낌새나 기별과 같은, 오늘날 '미신'으로 간주되는 앎의 영역은 나의 깜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내 몸을 통해서 감지되는 타자를 예감케 한다.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신칸트학파의 교수는 일본에서 활쏘기를 배울 때, 길을 잃고 헤매는 심정으로 활을 쏘다가 어느 날 스승인 아와 겐조가 보는 앞에서 무심히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더니, 스승이 엎드려 절 하면서 "그가 쏘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나와 싸우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나를 잊었고, 그렇게 찾아온 '그'는 무심한 몸에 자연스레 들어선 것이다(310~311쪽 참조).

 

차분한 집중의 형식은 에고를 넘어서기 위해 에고를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을 임계점까지 밀어붙여야만 의식 아닌 의식의 지점에 도달하고 '그'를 불러들일 수 있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상념이 사라진 상태가 공(空)이지만, 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념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출세간의 목적이 출출세간에 있듯, 불립문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잊어야 한다. 그러니 집중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적인 행동과 그에 가미된 정성이다. 반복되는 행동을, 정성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행하게 될 때, 나를 잊으며 내 몸에 없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다. "과연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차분하고 견결하게 이루어지는 집중과 정성이야말로 달(達)과 성(聖)으로 가는 좁은 길이다."(360쪽)

 

집중에 의해 터득된 앎은 알고도 모르는 역설적 지경에서 성취된다. 자아를 망각하는 경지는 얼핏 광기나 치매와 겹쳐 보인다. 광기와 치매 둘 다 자아를 잊은 상태라는 점에서는 집중 행위와 동일하다. 천재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과 그에 동반하는 창조성은 집중과 광기의 형식적인 동형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집중은 형식이되, 내용을 잃은 형식이 된다. 내용은 영도에 이르고 형식만 남은 상태, 그곳에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새로운 창조성이 발생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바로 이 인(仁)하다는 말 속에 집중의 역설성 혹은 집중의 탈세계성이 새겨져 있다. '인하다'는 것은 생이불유(生而不有)하듯 부드럽게 옮겨가는 처신이며 이윽고 '오른손이 한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인데, 이는 응당 불가능한 행위다. 그것은 의식의 바다에서 올라온 집중이 바로 그 의식을 초월하는 지경의 불가능성을 잠시의 무지개처럼 내보이는 형식이다. (439쪽)

 

김영민이 일러주는 달인 또는 성인의 변증법은 결코 자기계발 담론이 아니다. 자기계발이 완고한 에고를 확증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실현시키는 세속적 삶의 적응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김영민이 강조하는 달인이나 성인이 되기 위한 절차탁마의 과정은 오히려 에고와 세속을 떠난 자리에서 지속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려는 방향성이며, '선비로 시작하여 성인으로 끝마친다'(순자)에서 확인되듯 삶을 조형해가는 의지이다.

 

나는 최근에 글씨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평소 글씨체가 악필이어서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에도 서류를 읽는 상대방이 글자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글씨체를 바꿔보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생각이 그치면 글자는 이내 예전 모양으로 회귀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글씨체를 바꿔주는 책, 『나도 손글씨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를 샀다. 책에서 제시하는 글씨체를 '본'으로 삼아서 그 본이 보여주는 '틀'에 따라 그대로 따라쓰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최근 3주 동안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글씨를 썼다. 글씨체를 눈여겨 보고, 글자에 따른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신경쓰면서. 첫 일 주일 동안은 천천히 쓰면 다른 글씨체가 나왔지만 빠르게 쓰자마자 바로 예전 글씨체로 되돌아왔다. 기존의 버릇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주가 지나자 신경 쓰지 않는 순간에도 '본'으로 삼은 글씨체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쓰더라도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가로획을 쓸 때 왼쪽으로 조금 더 뻗은 모양이 되고, 자음 이응이 더 원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 의식의 타자인 몸이 움직인 덕이다. 식별이 불가했던 악필은 천천히 쓰면 꽤 균형잡힌 글씨로 보일 만큼 변모했다. 여전히 삐뚤빼뚤한 부분이 있어서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계속한다면 더 좋은 버릇이 몸에 깃들 것이다. 늘 그 '꼴'이었던 내 글씨체는 '본'을 만나서 하나의 '틀'을 얻었다. 그 틀에 복종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예전 그 꼴 그대로였을 것이다. 자기 변화의 요체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틀에 대한 복종에 있으며, 그 과정에 담기는 인간의 집중과 정성에 달려 있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한 집중의 양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훨씬 방대한 영역에서 집중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차분함을 서술하는 데에 한 장을 할애하기도 하였고, 공동체적 삶 속에서의 집중과 공부에 관한 담론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출출세간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공동체론은 타인의 비평에 노출된 가운데 좋은 몸을 얻고, 적절하게 응하며, 현명한 복종과 지배를 실천하는 생활양식을 벼려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가 세속을 떠나서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의한 자는 탈속이 아닌 세속에서, 그렇지만 그 세속과 창조적으로 불화하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전에 이이가 성인이 되기로 한 이상 터럭만큼도 물러서서는 아니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듯.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일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제대로 이행한다면 메시아에 방불케 할 실존이리라. 김영민의 책을 읽고 나서 『중용』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성실함[誠]은 진실[誠]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진실(誠)이란 하늘의 길이고,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길입니다. 진실이란 힘쓰지 않아도 중에 들어맞고 숙고하지 않아도 원칙과 부합되므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도에 맞으니 성인에게 가능합니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선을 골라서 굳건하게 잡는 것입니다. (『중용』,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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