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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도서] 페인트

이희영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희영의 소설 『페인트』는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다.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로 발간되는 여러 작품 중에서 선택될 확률이 높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독자들, 그럼에도 소설에 대한 갈증이 있는 이에게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시간 낭비를 막아줄 '평타' 이상의 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2019년 4월에 1쇄를 발행하였는데, 내가 들고 있는 책은 2021년 63쇄이다. 1쇄를 다 팔기도 어려운 시집에 비교했을 때 엄청난 '베스트셀러'임에 틀림 없다. 실제로 책은 흡입력이 있다. 작가가 설정한 배경 속에서 인물들은 정확한 인과관계에 따라서 움직이며, 그 과정에 억지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잘 빚어진' 작품이다. 책 뒤표지에 있는 심사평은 책을 압축적으로 요령 있게 설명하고 있다.

 

부모가 없는 영유아와 청소년들을 정부에서 '국가의 아이들'로 직접 보호 관리한다는 발상으로 시작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이야기이다. '청소년이 직접 자기 부모를 선택한다'는 문제적인 가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자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매력 요소이다. 부모를 직접 면접하고 점수를 매겨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은 독자들에게 현실을 전복시키는 쾌감을 선사한다. (책 뒤표지)

 

  심사평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현실을 전복시키는 쾌감'에서 눈이 멈춘다. 정말 이 소설이 현실을 전복시키고 있는가? 소설을 다 읽은 소회를 밝히자면, 극장에서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감상한 듯했다. 타임 킬링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제공하면서, 최대한 관객이 알고 있는 이야기 문법을 지키며,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게 서사를 끌고 간다. 대체로 우리는 현세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서사를 편안하게 여긴다. '아이언맨'이나 '어벤져스'를 보면서 현대 과학기술의 승리를 만끽하고 선은 악을 이긴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한다. 반대로 '낯설게 하기'를 통해 관객의 상식과 가정을 위협하면 영화는 불편해진다. 만약 영화를 보면서 거부감을 느꼈다면, 그 영화가 나의 상식이나 이데올로기가 잘못되었다고 고발했기 때문이다. 『페인트』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현전을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다시 확인하는 데에 머물렀기에 나는 '현실을 전복시키는 쾌감'이라는 평가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 글은 어째서 그러한가를 소설의 몇 가지 지점을 분석하며 증명할 것이다.

 

  소설은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자식을 낳아서 기르려고 하는 부모가 줄어들고 출산율 저하가 국가 운영을 위협하는 문제로 대두된다. 이에, 육아에 따른 고통을 국가가 대신 짊어지는 정책이 마련된다. 태어났으나 부모가 키우기를 원하지 않는 아이는 국가가 공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센터인 NC에 맡겨진다. 아이들은 '가디'라고 불리는 가디언에 의해서 관리되고 성장한다. 소설의 서술자 '제누 301'은 NC에서 자란 아이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연상시키는 국가양육 시스템은 합리적인 것 같지만 소설의 작가는 여기에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솜씨 있게 첨가한다. NC에 맡겨진 아이들은 20세가 되면 독립해야 하는데, 사회는 그들을 차별한다. 부모에게 길러진 사람이 일등 시민이라면 NC 센터 출신은 보이지 않게 이등 시민이 된다. 국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NC의 아이들을 입양하는 제도를 권장한다. 제누 301이 있는 청소년 센터의 아이들은 부모 인터뷰(parent's interview), 소설에서의 용어로는 '페인트' 과정을 통해서 NC 센터를 나올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NC 출신이었던 이력은 사라진다. 페인트를 거쳐 부모를 만나는 아이들은 차별을 받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직접 선택할 수 없지만, 제누 301과 같은 NC의 아이들은 부모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역발상이 흥미를 자아낸다. 소설의 설정은 언론에 꾸준히 보도되는 아동 학대 문제를 역으로 비춰준다. 입양이 청소년 시기에만 가능하게 된 것도 아동학대를 미연에 막는 예방책으로 소설에서는 설명되어 있다. 더이상 아이는 무기력한 약자가 아니다.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센터에 있는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센터장인 '박'도 어린 시절 내내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게 폭행당하고 사과 받는 악순환을 경험한 인물이다. 소설은 부모의 월권 행사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다.

 

  한국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부모-자식 사이의 갈등 문제도 제기된다. 제누 301를 입양하려고 온 하나는 제누와의 페인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하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성공을 위해 발레와 외국어 공부를 시키고, 사회적 성공에 필요한 온갖 지원에 열성을 다한다. 하나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대리 만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어머니의 지원을 거부한다. 교육열이 강한 한국에서는 유독 하나의 어머니와 같은 투사된 욕망이 과잉 표출된다. NC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 받아서 상처를 입는다면, 한국의 아이들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간섭 받거나 자유를 누리지 못해 상처 받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차별과 혐오, 가정폭력, 왜곡된 부모의 욕망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설정에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다. '재현'의 측면에서 소설은 성공적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록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끌어오고, 아이가 부모 면접을 실시하는 역발상으로 독자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음에도 새롭지 않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현전의 이데올로기의 범주 안에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미래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기술진보의 단편들을 제시한다. 단편들은 서사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소품 같은 역할들을 한다. 기숙사는 음성 인식으로 불을 켜거나 끌 수 있다. 손목에 차고 있는 멀티워치에서 홀로그램을 쏘아 영화를 마음껏 볼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편리하고 윤택한 삶에 대한 미래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을 보다 편리하게 해 줄 기술은 문제 없이 소설 속에서 승인된다. '헬퍼'라는 로봇은 NC 곳곳에서 인간의 자질구레한 영역을 보조한다. 헬퍼들은 페인트 면접이 있을 때마다 음료를 내오거나 치우고, 센터 곳곳을 청소한다. 헬퍼는 인격이 없는 노예이다. 이와 같은 묵시적 가정은 헬퍼가 열등과 조롱의 기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소설 후반부에 NC 아이들은 화재대피 훈련에 참가하는데 가디인 '황'은 아이들이 대피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안전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려 한다.

 

저들도 분명 십 대 시절을 지나왔고 어른들의 어떤 모습이 가장 참을 수 없는지 경험했을 텐데, 왜 망각의 강물을 마신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도 어른이 되면 똑같아지려나? 아! 잊어버맂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황을 인간 헬퍼라고 하겠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노아가 구시렁거렸다. (179쪽)

 

  이 장면 바로 직후에 NC의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박이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이들은 박에게 환호하며 달려간다. 그러니까 인용문은 벅찬 재회를 위한 극적 장치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작가가 의도한 장치와 무관하게 작동되는 차별적 인식이다. "괜히 황을 인간 헬퍼라고 하겠냐?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인간 헬퍼'는 황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반성적 의식과 인격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헬퍼는 인간의 눈에 열등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노예를 바라보는 시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미국에 노예 제도가 있었던 시절, 백인들의 눈에 흑인 노예들은 열등하고 인격이 없는 존재였다. 소설에서 인간 노예는 기계 노예로 대체되어 있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묘사가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현전의 이데올로기를 승인하는 표식은 제누 301과 페인트로 만나는 하나와의 대화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와 해오름은 NC를 방문하는 일반적인 부모들과 달리 가식 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속마음을 여과 없이 말한다. 아이 앞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예의 없어 보이는 그들에 대해 가디들은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제누 301은 그들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어 3차 면접까지 진행한다. 3차 면접에서 하나와 제누가 함께 산책하면서 하나는 자신이 부모의 꼭두각시였음을 깨닫는 과정을 고백한다. 제누 301은 그 다음 단계인 합숙까지 가지는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이상적인 부모'(164쪽)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는 제누에게 서운해하지 않고 쿨하게 제누의 결정을 존중해준다. 헤어지기 직전 나누는 다음 대화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자식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센터를 졸업하게 되면, 정말로 찾아가도 돼요?"

"그럼, 우린 진짜 친구가 되는 거야."

하나가 개구쟁이처럼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부모보다 훨씬 가까운!"

나는 해오름이 그려 준 내 얼굴을 꽉 안았다. 작은 액자 속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165쪽)

 

  작가는 부모의 환상으로 강압된 일방적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본다. 자식은 부모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자식은 독립된 인격체이며, 그들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고, 부모의 간섭 없이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그러나 부모는 그들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강요하고 억압한다. 진심을 감추고 자식을 사랑한다면서 자기 욕망을 투사한다.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관계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싹트기 어렵다. 부모-자식 관계가 회복되려면 부모부터 자기 내면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문장이 소설의 중간에 박혀 있다.

 

우리는 양 떼가 아니기에, 양치기 개가 몰아가는 대로 우르르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의 센터장인 박 같은 사람. (112쪽)

 

  제누 301은 어른들의 가식을 꿰뚫어볼 줄 알고, 박과 최같이 NC의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른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박은 주말 퇴근도 반납할 정도로 오로지 NC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분투한다. 제누 301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어른들의 사회를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박을 인정한다. 대가 없이 헌신하는 가디는 자기가 낳은 자식조차 키우기 싫어 NC에 맡기는 무책임한 부모와 대조를 이루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묘사된다. 제누 301의 시선에서 제누 스스로가 충분히 성숙한 의식을 지닌 합리적 인격의 소유자임이 드러난다. 인용문의 진실성은 서술자인 제누 301의 성숙한 태도와 인식으로 뒷받침된다. 제누 301은 17세 청소년이지만 이미 어른인 것이다.

 

  인용문은 분명 기성세대와 성장세대 독자로 하여금 부모-자식, 어른-아이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미덕은 아이(청소년)에 대한 존중이다. 이상적인 부모-자식 관계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상호주관성에 기반을 둔다. 청소년의 고유한 세계를 인정할 것. 허나, 아이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널리 공유되고 있는 상식으로서 새로울 것이 없다.

 

  기성세대는 무지 때문에 성장세대를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조직화된 문명 사회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간섭하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열을 올리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단순히 자식을 훈장처럼 과시하고 대리 만족을 느끼기 위함만은 아니다. 기성세대는 학력에 의해 인간이 구획되고 차별 받을 수 있음을, 대학을 졸업한 자와 졸업하지 못한 자, 서울에 있는 대학 출신과 지방 대학 출신, SKY 대학과 비SKY 대학 사이에 분할되는 경계와 치밀한 서열이 보이지 않게 존재함을,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는 현재를 사는 아이들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몰아 넣는다. 물론, 분명한 소신과 신념으로 학력 경쟁에서 탈주하여 대안적 모델을 추구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들의 용기는 칭송 받을 만하지만, 그 역시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부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이를 온전히 부모의 무책임함이나 욕심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소설은 분명 부모-자식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지만, 부모된 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는 순간마다 문득 떠올리게 되는 반성과 다르지 않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하는 반성 말이다. 특히 소설을 일부러 찾는 독자라면 독서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자기성찰적 성향이 강할 것이다. 아이를 존중해야 함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격률을 모르는 현대인이 없듯. 그러나 생활 세계에서의 실천은 다른 문제이며, 거기에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 이상의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 현대 사회에 의해서 구조화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하겠다, 담배를 끊겠다와 같은 기약 없는 다짐이 어떻게 시작되고 무력화되는지를 안다면, 아이를 존중하겠다는 다짐 역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 다짐 역시 환상이기에 아이라는 타자를 만나는 순간 즉시 붕괴한다. 타자는 에고의 환상에 언제나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째서 부모-자식의 관계가 왜곡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친구 같은 부모-자식 관계는 발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 오늘을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변주일 따름이다. 필연적 귀결은 상대주의이다.

 

  인용문에서 충분히 짐작되듯, 소설에서 묘사되는 인간 관계와 내면은 재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설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난맥상을 절묘하게 반영했다. 그러나 재현에 그치면 현전의 형이상학을 깨뜨리기 어렵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만다. 독자가 읽기 쉽도록 배려한 소설일수록, 대중적 감각을 살릴수록 그러한 위험은 커진다. 재현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 까닭으로 소설이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변호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현전을 벗어난 상상력을 발휘해주기를 주문한다. 아이와 청소년은 아직 사회의 때가 덜 묻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가능의 존재들이다. '재현'은 현실 파괴의 도끼가 되기 어렵다. '침전된 내용으로서의 형식'(아도르노)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상상력에 진정한 '리얼리즘'이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부모-자식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친밀성이나 똘레랑스는 부수적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신뢰(김영민)다. 타자와 어울려 사는 동안 오해와 상처를 주고 받는 건 필연이다. 그러한 오해와 상처에도 관계를 포기하거나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관계를 지속할 때에, 상대를 재단하지 않고 부단히 이해할 때에, 신뢰를 기약할 수 있다. 신뢰는 자유주의자들이 선호하는 너도 좋고 나도 좋다의 상대주의를 배격한다. 듣다-말하다의 평등한 대화는 표면적으로 민주적인 듯 보이지만 그곳에는 자기 독백적인 환상만 재생산된다. 진정한 대화는 가르치다-배우다(비트겐슈타인) 차원에서 상호 개입으로 실현된다. 그래야 문명화된 삶의 형식으로 입문시킨다는 교육의 이상을 바랄 수 있고 진정한 가치의 전수가 가능해진다. 부모가 모범이 될 때, 개입은 강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표현이 된다. 상대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자유. 가치에 대한 존중과 복종을 품은 자유.

 

  물론, 이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사랑이리라. 낭시의 문장을 기억해 둘 만하다. 사랑은 내 모든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어져야 할 그의 몫을 모두 준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모든 것을 그에게 준다. 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주어져야 하는 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장 뤽 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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