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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평전

[도서] 이순신 평전

이민웅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가끔 타인의 삶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새해가 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말이다. 기존에 해 오던 패턴을 반복하면 편안하지만 권태에 빠지며, 반대로 도전하는 출발선 앞에서는 불안하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면 출발선 앞에서 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대부분 기록된 삶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록된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그렇다. 매년 대단한 변화가 있을 일도 없지만, 올해는 작게 나마 직장에서 내가 맡은 직분에 변화가 있기 때문에 3월 내내 긴장하며 지냈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2월에 샀던 책이 『길 위의 철학자』와 『이순신 평전』이었다. 전자는 자기 삶을 객관화시킨 글이고, 후자는 타인의 삶을 서술한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책 모두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둘 다 내가 살아볼 수 없는 길이지만, 그들이 걸어간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두루 적용될 보편적 삶의 원리가 있었다.

 

  『이순신 평전』은 전쟁사를 전공한 학자가 실증주의적인 시각에서 이순신의 생애를 서술한 책이다.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이순신은 '성웅(聖雄)'으로 신화화되어 있다.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의 위용은 과연 이순신이 우리의 민족의식과 국가적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줄 상징적 인물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이룬 해전 상의 혁혁한 공적으로 미루어보면, 그를 성웅으로 추앙하여도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출전한 해전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온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음에도 그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알더라도 나처럼 어린이 위인전에서 서술하는 정도로 아주 대략적인 스케치만 머리속에 있거나.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고전처럼 위인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그가 무과에 한 번 떨어졌고, 두 차례 백의종군을 했으며, 유성룡의 천거로 빠르게 전라좌수사로 승진했고,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의 주역이었다는 정도로는 '인간 이순신'을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내가 궁금한 것은 '성웅'이 아니라 '인간'의 면모였다. 그는 백의종군 했을 당시에 어떻게 지냈을까? 그는 어떻게 13척으로 133척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순신 평전』은 그런 의문을 사료에 근거하여 속 시원하게 해명해준다. 물론 이 책도 이순신에 대한 우호적인 관점을 견지한 가운데 해석을 가미한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공평무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각종 위인전이나 드라마에서 각색된 상상 중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이순신의 삶에 접근하고 있어서 믿음직스럽다.

 

  책은 이순신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추적하면서 이순신을 둘러싼 가족사, 사회사 등의 맥락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테면, 이순신의 위인전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여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했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흔히 묘사되는데, 그것이 오류임을 증명한다. 이순신의 현조인 '이변'은 과거에 급제하여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처세에도 능하여 예문관 대제학, 형조판서, 공조판서 등 정2품 직계 자리까지 오른다. 그러니 가문은 그 때부터 명문가로 등극하여 부유하게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의 증조부인 '이거'도 정4품 사헌부 장령까지 오르는 등 비교적 높은 벼슬을 했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기묘사화로 인해 음서로 평시서 봉사에 그쳤고, 아버지 '이정'은 아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비록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고위급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가문은 넉넉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는 대대로 이순신의 가계와 혼인으로 겹사돈을 맺는 가문이었다. 가문끼리 결속하는 일은 조선시대 명문가 사이의 관습이다. 어머니 변 씨는 이순신의 무과 합격을 기념하여 자신의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경제적인 기반이 튼튼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순신의 어린 시절이 가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꼼꼼하게 사료를 확인하여 신화적 이데올로기로 윤색된 허위들을 걷어낸다.

 

  이순신은 넉넉한 집안 배경을 토대로 앨리트 코스를 밟아 처음에는 문과 시험 공부에 매진하다가 스무 살에 무과로 전환한다. 그는 말에서 떨어지는 실수로 식년시에서 낙방하고 4년 뒤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로 급제한다. 이에 그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로서의 면모를 이미 그 때부터 갖추었다. 유성룡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며,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國難)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에 축적(蓄積)한 것이었다.(유성룡, 『징비록』 권2, 책 37쪽 재인용)

 

  또한, 이순신이 무과에서 구술시험을 치를 때는 유학과 역사에 통달하여 면접관의 감탄을 자아냈다는 기록이 <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카가 썼으니 약간의 윤색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으리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시험장에서) 무경(武經)을 외우는 것에 다 통과하였는데, <황석공> 부분을 언급하다가 시험관이 "장량이 적송자를 따라가 놀았다고 했으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라고 묻자, 이순신이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 <강목>에도 '임자 6년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라고 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가탁해서 한 말이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시험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이것은 무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탄복했다.(『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책 39쪽 재인용)

 

  그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후에 기록한 자신의 일기에서 주기적으로 나아가 활을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활쏘기를 중시한 까닭은 스스로 무장으로서 본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가 해상에서 일본군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근접전보다 원거리에서 배를 총통이나 불화살로 전소시키는 전략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무장이 무력을 과시하기는 쉬우나, 지략까지 겸하기는 쉽지 않다. 문관도 용맹함을 갖춰야 당당할 수 있고, 무관도 지력을 단련해야 주체적일 수 있다. 이순신은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전라좌수사가 되었을 때부터 대비 태세를 갖추었는데, 유성룡에게 최신 병법서를 구하여 장수들과 자주 토론하였다고 한다. 이론에 매몰되어서 실천을 외면하면 공허하지만, 경직성 때문에 이론을 외면하는 실천은 위험해진다. 그는 문무를 겸비함으로써 공허함과 위태로움 양면에서 벗어나 매사를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해전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늘 이기는 싸움만을 했기 때문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골라서 참여하고, 질 것 같으면 빠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고 있었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이기는 조건을 조성했다. 명량해전이 대표적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병력, 군선, 군량, 무기 등 모든 측면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사람을 편협하게 인식한 선조의 오판과 일본의 이간책으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하여 180척 중 170여 척을 잃고 만다. 원균은 도망쳐 상륙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참살당한다. 임금은 교서를 내려 이순신을 복귀시킨다. 그는 이미 합천과 가까운 초계에 자리 잡고 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며 계책을 꾸준히 논의하던 중에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로 유명한 장계는 백의종군이 끝나고 쓰였다.

 

  그는 침착하게 남해 지역을 돌면서 군량미를 확인하고, 수군에 지원할 병사를 선발하고, 적을 맞이할 장소를 물색한다. 그에게 남은 13척(장계를 올린 후에 1척이 추가되었다고 한다)의 배가 일본의 대군을 맞이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한다. 유속이 빠르고 폭이 좁은 진도의 울돌목은 적은 수로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폭이 좁았기 때문에 일본의 대형선인 아타케부네는 진입할 수 없었고 소형선인 세키부네만 조선 수군과 대적할 수 있었다. 세키부네는 화력 면에서 아타케부네에 비해 약했으므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전투 초반에는 오직 이순신이 타고 있는 대장선만 일본 군선에 맞서 싸운다. 그렇게 한 시간을 버텨도 조선의 다른 병선은 선뜻 나서지 못한다. 이순신의 용맹함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처럼 대담하게 행동한 까닭은 용맹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대장선만으로도 잠시 동안 싸워볼 만하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기고 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1,000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법으로 다스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두 번 세 번 약속을 엄밀하게 했다.(『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9월 15일, 책 337쪽 재인용)

 

  칠천량해전에서의 참패로 이미 공포에 질려 있던 수군들은 대장선의 분투를 보고 용기를 얻는다. 그들도 싸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군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위협보다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순신은 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에서 133척 중 31척을 격파하고 일본군을 패퇴시킨다. 임진왜란 전란을 통틀어서 가장 값진 승리였다.

 

  이순신 평전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대목은 소통이었다. 저자도 이순신이 소통의 달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번거로웠을 텐데도 자신의 전쟁 상황을 알려야 하는 곳에는 부지런히 전령을 보내어 소식을 보내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무엇보다도 해전에서 승리한 것에 도취되지 않고, 엄정하게 공과를 파악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태도는 놀랍다.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승리하고 전과를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고한다.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는 왜 대선 1척 당파, 왜적 1급 참수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왜 대선 1척 당파, 우리나라 포로 1명 구출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은 왜 대선 2척을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왜 중선 2척, 왜 소선 2척을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과 다른 사람은 왜 대선 1척을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 대선 1척을

우부기전통장 사도진군관 이춘은 왜 중선 1척을

유군장 발포가장 나대용은 왜 대선 2척을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왜 중선 2척을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 중선 1척을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유섭은 왜 대선 1적을 당과하고, 소녀 1명을 구출했고,

한후장 영 군관 최대성은 왜 대선 1척을

참퇴장 영 군관 배응록은 왜 대선 1척을

돌격장 영 군관 이언량은 왜 대선 1척을

대솔군관 변존서와 전 봉사 김효성이 힘을 합해 왜 대선 1척을 당파했으며,

(이상 전라좌도 왜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21척 당파)

 

경상우도 수군이 왜선 5척을 당파, 우리나라 사람 1명 구출

총 26척을 당파분멸(쏘아 맞춰 깨트리고 불로 태워버림)하고 승리함 (135쪽 재인용)

 

  정신 없는 전쟁 상황 속에서도 장수들이 올린 전과를 세밀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순신이 외부 세계에 민감하고 총명한 인물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신상필벌이 명확한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신임을 얻는다. 신상뿐만 아니라 필벌에도 이순신은 엄격하여 탈영의 죄를 범한 병사는 이유 불문하고 처형하였는데, 그가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별할 줄 아는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대업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연민을 가져야 할 때와 엄격하게 처벌해야 할 때를 구별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과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는 봄의 정취를 즐길 줄 알았고, 막내 아들이 죽었을 때 깊이 통곡하였으며, 1593년부터 돌기 시작한 역병으로 고통받는 수병들과 함께 아파했다. 장수들과도 긴밀한 소통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술자리도 종종 열었다. 그가 과음 때문에 고생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성웅의 이미지와는 일치하지 않는 인간적 면모라 하겠다.

 

  이순신의 총명함과 대척점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선조다. 그는 풍문에 의존하여 이순신보다 원균을 더 신임한다. 그는 왕궁을 버리고 피난 갔고, 세자인 광해군보다도 인심을 얻지 못했으므로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해석하는 편협함을 보인다. 거울방에 갇힌 전형적 인간상이다.

 

선조는 앞서 갑오년(1594년) 11월에 원균을 경상우수사에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임명할 당시의 논의 과정에서,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 것은 아닌가?"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에 유성룡은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입니다. 그는 수륙의 모든 장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통제사로 임명된 지 1년여가 되는 시점부터, 선조는 이순신이 일 처리를 제때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균에 대한 선조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선조는 원균을 보기 드문 용장으로서 쓸 만한 장수라고 인식했다. 그는 "원균이 습증에 걸린 몸으로 오랫동안 해상에 있으나 일을 싫어하는 생각이 없고 죽기를 각오했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원균이 하는 일을 보니 가장 가상히 여길 만하다." 라고 평가했다. (284쪽)

 

선조가 원균에 대해 "나랏일을 위해 정성스럽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칭찬하자, 이원익은 "그가 거둔 전공 때문에 인정할 뿐이지, 따지고 보면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라고 평가하면서 "원균에게는 미리 군사를 주면 안 되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나 군사를 맡겨 돌격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평상시에는 군사를 맡길 수 없다고 혹평했다.(286~287쪽)

 

  선조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는데도 자신의 고정관념을 확인시켜주는 사실에만 집중한다. "이순신은 게으로고, 원균은 용맹하다."는 극히 단편적인 자신의 고정관념을 완고하게 지킨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을 모두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평가는 정확해서 실제로 "미리 군사를 주면 안" 된다는 말은 미래를 예언한 듯하다. 그럼에도 선조는 실상과 어긋난 인식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나는 옳다'를 확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우울증을 겪고 있었을 것이 틀림 없다. 자기 실존의 부정을 만회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완고하게 에고를 지탱하는 것이다. 우울증과 나르시시즘은 서로 공모하지 않는가. 이순신에게는 나르시시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거울방을 나올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와 과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자기보다 타자에 열려 있는 태도, 이기는 싸움을 만들어가는 집중과 몰입, 다양한 능력을 겸비하기 위해 정진하는 자세는 성인(聖人)의 경지를 내비치고 있다. 그의 빛나는 승리는 초월적 힘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이 만들어 낸 결실이었다. 역병이 돌아서 자신이 통솔하는 병사의 40%가 죽어나가는 현실을 눈앞에 목도하면 어느 지휘관이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순신은 현전에 갇히지 않고 더 멀리 바라보았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눈 앞에 닥친 문제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가 처음부터 타고난 성인이어서 성웅이 된 게 아니다. 성인이 되기 위한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고, 행동 양식을 꾸준히 지속하고 실천하면서 자기를 완성해갔기 때문에 성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기를 완성하려는 꾸준한 의지와 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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