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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도서]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저/김춘미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다자이 오사무는 2차 세계대전 전부터 문필활동을 시작했지만, 전후에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가다. 다섯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작가의 이력부터 심상치가 않다. 『인간실격』의 인물 요조는 작가의 삶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는 허구적 인물임에도 작가의 분신이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이 작품은 문학적 형식으로 자기 삶을 표현한 해명서이기도 한 셈이다. 나는 얼마전 『인간실격』을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소설' 코너에서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 당대적인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데 드레스 코드를 맞추지 않은 손님처럼 『인간실격』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책의 뒤표지에는 "청춘의 한 시기에 통과 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이 데카당스를 찾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이지만, 정전을 지나치게 경외할 필요는 없다. 『인간실격』은 작품의 미적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문제는 가려진 채 신화화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신화화를 경계하면서 작품이 어째서 작가의 해명서인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전후 일본의 주류 문화가 봉착한 모순과 그 해결방식이 드러날 것이며, 한국사회를 되비춰보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인간실격』은 액자형 구조를 지닌다. 외부 액자에서는 서술자 '나'가 요조의 사진에 대한 인상을 전하고 요조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 사연을 서술한다. 내부 액자는 요조가 서술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외부 이야기에서 '나'는 교바시 스탠드바의 마담을 우연히 만나 요조가 쓴 것으로 보이는 노트 세 권을 건네받는데, 그 노트가 내부 이야기인 것으로 암시된다. 내부 이야기는 요조가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서술 구조를 취하기 때문에 타인과 세계가 주관성에 녹아들어 있다. 외부 이야기는 소설이 주관성에 침윤되는 것을 막고 객관적 거리를 확보해 준다. 이를 테면, 외부 이야기의 '나'는 「서문」에서 요조의 표정을 일컬어 괴상하고 섬뜩하고 으스스하며 기분 나쁘고 불길하다고 평한다. 작가는 자기를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위악적으로 추하다고 말한다. 자기를 객관화함으로써 균형 감각을 드러낸다. 만약 외부 이야기가 없었다면, 『인간실격』은 소설의 형식을 빙자한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오히려 내부 이야기 속 자신을 합리화하는 고도의 전략이라 할 수도 있다. 외부 액자 속에 내부 이야기를 배치해 자신의 '부끄럼 많은' 생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세속과 불화하는 광대

 

  주인공인 요조는 '실용'으로 매개되는 사회적 삶의 형식에 적응하지 못한다. 육교는 기차의 선로나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 만들어진 실용적인 건축물인데 어린 요조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느끼는 즐거움에 주목한다. 지하철 역시 도시 공간에서 이동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교통수단이지만, 요조는 땅 위보다 지하에서 기차가 이동하는 것이 더 재미있으므로 발명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유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시선이지만 저열한 어른의 세계보다 순수하다. 육교와 지하철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실망한다.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전제는 일반인과 다르다. 문제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어린 시절의 전제를 포기하지 않고 고수한다는 점에 있다. 그의 의식은 일상인과 불화한다. 그는 실용으로 매개되는 인간 관계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인간'을 잘 모르겠다고 지속적으로 말하며, 세속적 생활 양식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를 테면,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는 시간에 그는 고통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공복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생존을 위해서 양식화된 모든 것과 생래적으로 어긋난다.

 

  대다수의 인간이 공유하고 있으며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속적 가치에 대해서 그는 비상한 공포를 느낀다. 이 공포가 그를 익살꾼으로 만든다. 그는 자신과 어긋나는 체제에 적응하기 위하여 연기하는 길을 택한다. 익살꾼을 자처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웃김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은폐하는 것이다. 세계와 불화하는 인간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가면을 쓰지만, 그것은 본래적인 자기가 아니기 때문에 분열된다. 실존적인 상처는 삶의 원형으로 자리잡아 그의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특정 배역을 강요하는 삶의 무대 위에서 그는 연기하지만,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라, 다른 방식으로 복수당한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편력, 학업으로부터의 일탈, 자살 시도, 알코올 중독, 모르핀 중독으로 변주된다.

 

  그에게 '인간' 혹은 '세계'라는 관념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 못하는 비본래적인 것이다. 인간은 허위와 가식으로 서로 만나면서 자신의 괴물성, 짐승성을 능란하게 감춘다. 세속을 대변하는 인물이 요조의 친구 호리키다. 요조는 화방에서 호리키를 처음 만나 그로부터 술, 담배, 창녀를 배우고 방탕한 삶에 빠진다. 요조를 마르크스 연구 서클로 끌어들인 것도 호리키인데 요조는 서클에서 중책을 맡는 등 모임을 이어가지만, 호리키는 서클 활동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성보다는 유행을 좇는 허영심에 더 기울어진 속물이기 때문이다. 호리키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필요할 때는 요조에게 돈을 빌리면서 그를 이용하지만 정작 요조가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어려울 때는 그에게 냉담한 모습을 보인다. 요조가 넙치의 집에서 관리를 당하는 동안 호리키에게 찾아갔을 때, 요조가 자신이 앉고 있는 방석의 실을 무의식중에 끊자 방석실을 아까워하며 끊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실오라기같은 작은 것이라도 손해 보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다. 호리키의 어머니가 멀건 팥죽을 내오자 호리키는 방탕한 성품에 걸맞지 않게 어머니에게 정중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송합니다. 단팥죽입니까? 저런, 호사스럽게. 이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볼일이 있어서 금방 나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아닙니다. 모처럼 어머니의 자랑거리인 단팥죽을 만드셨는데, 황송합니다. 먹겠습니다. 자네도 들지. 우리 어머니가 일부러 만드신 거라고. 야, 이것 참 맛있다. 야, 참 호사스럽군."(83쪽)

 

  육해진미도 아닌 "팥이 적어서 싱거웠고, 새알심을 먹어보니 새알심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84쪽) 단팥죽을 친구에게 대접하면서 그는 야단스럽게 생색을 낸다. 요조의 시선으로 포착된 위선과 뻔뻔스러운 허위 의식은 독자에게도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친구는 중학교 시절에 만난 백치 '다케이치'다. 그는 요조가 보이는 너스레와 익살스러운 행동이 연기임을 간파하여 요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요조가 다케이치의 귀에서 나오는 고름을 닦아주는 것을 계기로 그들은 가면 없이 진정한 얼굴을 내보일 수 있는 친구가 된다. 요조는 자신의 '도깨비' 그림을 다케이치에게 보여준다. 고흐, 세잔, 고갱, 르누아르와 같이 진짜 예술을 했던 화가의 그림을 닮은 그 도깨비 그림에 다케이치는 굉장하다고 감탄한다. 요조는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39쪽)라고 다짐하지만, 성인이 된 그는 먹고 살기 위하여 도깨비 그림 대신 소년 만화 내지는 춘화를 그리는 신세가 된다. 호리키-춘화의 세계와 다케이치-도깨비의 세계 사이에서 요조는 분열된다. 그는 예술적 삶을 동경하지만 그에 다가갈 수 없고, 보통 사람으로 살고자 하나, 인습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에 여성 편력이 끼어들어 그의 삶을 더 복잡하게 한다. 그는 타고난 매력으로 여성에게 호감을 산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에 준수한 외모를 지닌 그는 여성들에게 구애의 편지를 수없이 받는다. 그를 만나는 여성들은 쉽게 마음을 연다. 요조를 단 두 번 만난 쓰네코는 그와 함께 죽자는 권유에 선뜻 바다에 몸을 맡긴다. 호리키의 집에서 만난 미망인 시즈코와 곧장 동거에 들어가고 정부(情夫)가 된다. 요조가 의지하고자 하면 여성들은 틀림 없이 그를 안아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헌신한다. 요조와 여성의 인연으로 실현되는 재혼, 기둥 서방, 내연 관계, 정사(情死)는 상스러운 것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인습과 제도에 의해서 성적 결합은 제약되지만 요조의 매력은 관습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요조는 여성과 관계 맺으며 일상성의 범주로부터 일탈한다. 그가 연기에 실패하는 지점, 본래적 실존을 굴절된 방식으로 실현하는 지점이 여기다.

 

  찢긴 실존을 견디기 위해 그는 점차 술에 의존하다가 모르핀에 중독된다. 규범에서 더욱 일탈하며 폐인이 되어간다. 요조는 정신병원에 수감되면서 자기 실존을 '인간실격'으로 규정한다. 세속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일상인의 시선에서 그는 약물에 중독되고 방종한 성애를 탐닉하는 비정상인이다. 그러나 작품 세계 속에서 '인간'은 결코 긍정적인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가식과 실용, 관례와 규범에 자신을 내맡기고도 자기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비본래적 실존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요조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하였고, 그를 분열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요조의 형이 마련해준 가옥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허나 그를 폐인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마담이 요조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세속적 이념 바깥에 있는 이 소외된 존재의 긍정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136쪽) 이 문장은 내부 이야기가 시작되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13쪽)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자기만의 세계에 유폐된 유아론적 인간에게 건넨 위로 같아 보인다. 작가는 문학적 형식으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비록 인습적 측면에서 함량 미달의 인간이었지만, 인습 너머의 지점에서 자유를 추구한 인간 이상(하느님)의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작가 자신이 구축한 세계 안에서만 옳다. 2022년을 사는 나로서는 그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웠다. 그는 인습과 자유의 대립항 이상으로 중층적인 모순을 지닌 존재이다.

 

에고의 환상과 내부의 식민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소설을 다시 읽으면 숨겨진 진실이 보인다. 이를 위하여 두 가지를 재검토해야 한다. 먼저, 요조가 찢긴 실존을 살아가야 했던 원형을 다시 살펴보자. 그는 근원적으로 타인에 대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존재를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17쪽) 요조는 타인이 좋아하는 '실용'을 '익살'로 변형시켜 가면으로 착용함으로써 자기를 적응시킨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기 실존을 개방해 타자와 만나기보다는 진정한 자기를 가면으로 은폐시켜 스스로 고립된다. 자신을 가장하는 전략은 어떻게 보면 사회적 자아를 획득하는 길인 듯 보이지만, 사회와 어긋나는 자아를 은밀하면서도 온전히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폐쇄적이다. 어린 요조는 아버지가 선물로 무엇을 사줄까냐는 질문에 우물거리다가 아버지를 실망시킨다. 아버지가 아사쿠사 절 앞에 있는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정월 사자춤 탈을 사주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아버지가 자는 동안 아버지의 수첩에 몰래 '사자춤'이라고 써 두어 위기를 모면한다.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철저히 기만한다. 그럼으로써 요조는 자기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자기만의 세계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 타인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은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알리바이다.

 

  그가 얼마나 자기 세계에 집착했는가는 그의 연기를 들켰을 때 느낀 감정의 기복에서 알 수 있다. 철봉을 향해 뛰어갔다가 엉덩방아를 찧어 주변 친구들을 웃긴 요조는 다케이치가 "부러 그랬지?"라고 말한 순간부터 불안을 느낀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실패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다케이치한테 간파당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일순간에 지옥의 업화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것을 눈앞에 보는 듯하여 저는 왁 하고 소리치면서 발광할 것 같은 기색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31쪽) 누구나 자신이 감춘 것을 들켰을 때 수치심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요조의 감정은 별스러운 데가 있다. 그만큼 자기를 철저히 방어하려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자임한 장난꾸러기 역할은 자기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 면에서 요조의 자살 시도는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이다. 지속적으로 에고를 위협해 오는 세계,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지 않는 좋은 방법은 생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에게 세계란 언제나 위협이고, 타인은 알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91쪽) 이처럼 완고하게 에고를 고집하는 특성은 나르시시즘과 공모한다. 나르시시즘의 정점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성이 있다.

 

  여성과의 관계는 우리가 두 번째로 검토해야 할 영역이다. 요조는 여성을 특정한 관념에 묶어 두고 일반화시킨다. 여성은 요조에게 '인간'의 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족속으로 보인다. "저한테는 인간 중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몇 배나 더 난해했습니다."(34쪽)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가장과 은폐를 더 철저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술회하면서 여자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었습니다."(34쪽) 여성의 종잡을 수 없는 특성은 많은 여성들이 그를 좋아하고 돌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더욱 곤란해진다. 그는 여성을 탐욕스러운 존재라고 규정한다. "여자들은 적당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생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저한테 익살 떨기를 요구했고, 저는 그 끝없는 앙코르에 응하느라 기진맥진해 버리곤 했습니다. 정말이지 잘도 웃어댔습니다. 도대체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쾌락에 훨씬 더 탐욕스러운 듯합니다."(35쪽) 동시에 그는 여성 일반을 경멸한다. "언니뿐 아니라 여자들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를 추측하는 일은 저한테는 지렁이의 생각을 탐색하는 것보다도 까다롭고 귀찮고 소름 끼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다만 여자가 그런 식으로 갑자기 울 때는 뭔가 단 것을 주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사실만은 어렸을 때부터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37쪽) 여성성에 대한 단순화된 인식은 남성-여성의 권력 관계에서 비롯한다. 상대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쪽은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못 가진 자이다. 권력자는 상대를 세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본 사회가 이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지만, 이에 더하여 요조가 이성을 매혹하는 마술적인 힘을 부여받았으므로 작품 세계 속에서 권력 관계는 한층 심화되며, 여성이 그에게 자발적으로 헌신하므로 요조의 편견은 이의를 제기하는 타자의 목소리 없이 정당화된다. 요조의 나르시시즘은 여성들이 보내는 공감으로부터 유지되지만, 그가 여성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경멸과 비하이다. 그는 여성에게 기생하면서 여성을 지배한다. 요조가 사는/보는 세계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남성의 일방적 환상으로 구축되어 있다. 가령, 다음 문장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환상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등 뒤에 있는 높은 창 너머로 석양에 물든 하늘이 보였고 기러기가 '여자'라는 글씨를 그리며 날고 있었습니다.(72쪽)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은 정상적인 가정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게 해준 요시코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자살을 시도하고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요조는 요시코의 처녀성에 매혹된다. 그는 그녀의 처녀성에서 일말의 구원을 바란다. 요시코는 처녀이든 아니든 요시코이지만, 요조에게는 요시코가 처녀인 것이 매우 중요한 특성이 된다. 왜냐하면 처녀성은 세상의 오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음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인간'의 속물성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인 요조는 이미 타락했지만, 여성에게는 타락이 아닌 순수성을 요구한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 앉아서 미소 짓고 있는 요시코의 하얀 얼굴. 아아,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성의 숭고함. 나는 여태껏 나보다 어린 처녀랑 자 본 적이 없다. 결혼하자. 그래서 나중에 아무리 큰 비애가 닥친다 해도 상관없다. 난폭할 만큼 큰 기쁨이 평생에 단 한 번 이라도 상관없다. 처녀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바보 같은 시인들의 달콤하고 감상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구나. 결혼해서 봄이 되면 둘이서 자전거 타고 아오바 폭포를 보러 가야지 하고 그 자리에서 결심하고, 소위 '단칼 승부'로 처녀성이라는 요시코의 꽃을 훔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104쪽)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마지막 문장은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작가 인식을 반영한다. 처녀성은 남성성에 의해 개발되어야 할 미개척지이다. 이를 위해서 요시코의 주체적 내면은 배제되어야 한다. 실제로 요시코의 욕망은 전면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요조의 환상 내지는 일방적 시선에 의해 그려진 여성적 면모만이 윤색되어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 매커니즘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뒷받침된 것이다.

 

  요조는 여성을 지배하되, 현실에서는 패배한 가부장이기에 문제적이다. 현실에서 찢겨진 일본 남성의 진정성은 여성에 대한 지배로 보상받는다. 요시코가 이웃 남자에게 강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삽화는 결정적이다. 요조의 아내는 호리키가 집을 방문한 동안 1층에서 콩을 삶다가 몸집 작은 상인의 침입으로 겁탈당하며, 요조는 그 장면을 2층에서 호리키와 함께 목격한다. 그런데 요조는 이상하게도 당장 요시코를 구하러 가지 않고 공포를 느끼며 누워버린다. 그 사건은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경멸하는 '인간'의 특성을 다시금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저는 혼자 도망치듯 다시 옥상으로 뛰어 올라와 드러누워 비를 머금은 여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그때 저를 엄습한 감정은 노여움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묘지의 유령 따위에 대한공포가 아니라 신사(神社)의 삼나무 숲에서 흰 옷을 입은 신령과 부딪쳤을 때 느낄지도 모를,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만드는 고대의 거칠고 난폭한 공포였습니다. 저는 그날 밤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한없이 인간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그것은 제 생애에 있어서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정면에서 정수리에 치명타를 입었고 그 뒤로 어떤 인간에게 접근하더라도 그때마다 그 상처가 쓰라린 것이었습니다.(115쪽)

 

  요조는 요시코가 느꼈을 수치심과 고통보다는 자신의 공포와 실망감에 주목한다. 인용문에서 느낄 수 있는 명백한 감정은 '배신감'이다. 요시코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그렇다. 자신의 전제와 또 한 번 어긋나는 세계 앞에서 그는 무기력하며,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슬쩍 회피한다. 여기에는 기묘한 감정의 일그러짐을 동반한 우울증이 있다. 우울증은 애도의 대상을 찾지 못한 나르시시즘이다.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의 근원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동반하는 나르시시즘이 있는 것이다. 그는 타인이 고통 받는 장면을 보고도 오히려 자기의 상처에만 주목한다. 지독한 자기애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을 낳는다. 요시코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겁탈 당한 이후로 요조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요조는 비겁해도 요시코보다 우위에 있다. 요조는 '신뢰는 죄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요시코가 사람을 쉽게 믿어버리는 면모를 헤아리면서도 이미 요시코를 탓하며 단죄한다. 요조와 대립하는 호리키조차 요시코에 대해서는 요조와 관점을 공유한다. "이건 마치 지옥 같군...... 그렇지만 요시코 씨는 용서해 줘라, 자네도 어차피 신통한 녀석은 아니잖나. 실례하네."(115쪽) 요시코는 죄를 지었고, 용서해야 할 대상이다. 철저하게 남성중심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을 당했는데 오히려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인물은 피해자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요조는 그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소설의 미학적 현실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작품이 전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대목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조선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동력을 얻었던 제국주의가 힘을 잃고, 일본은 세계 체제에서 낙오한다. 당대 주류였던 일본 남성은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미 제국의 호황을 누렸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권력을 펼칠 기회조차 차단당한 청년 세대는 이중의 좌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기성 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나마 기성 세대의 지배를 참고 승인해 줄 명분이었던 제국은 그들이 사회에 진입하는 시기에 붕괴되었다. 이제 청년에게 남은 것은 출구 없는 막막한 현실뿐이다. 퇴폐와 데카당스가 유행하는 것은 필연이다. "패전 후 혼란기를 우리는 다자이 하나에 의지해 살았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존재에 전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의 청춘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의 다른 걸작들이 모두 잊힌다 해도 『인간 실격』만은 언제까지나 거듭 읽히고 영원히 남을 작품이라고 확신한다."(오쿠노 다케오) 이 비평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 실격』은 당대 일본 청춘(대다수의 남성)의 욕망을 되비쳐주고 있었던 셈이다. 식민지라는 외부의 출구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리비도는 자연스레 내부를 향했다. 리비도가 발견한 대상은 약자인 여성이다. 근대화되지 않은 비자본주의적 영토를 식민지로 개발하여 착취하는 제국의 운동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전이되어 여성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형식으로 변형된다.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 서구가 동양을 대상화하면서 동양의 이질성에 신비와 혐오를 동시에 품었듯, 남성은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그들의 처녀성에는 경외를, 그들의 감성적 특성에는 경멸을 품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온갖 여성이 매력적 남성에게 매혹되고 헌신하는 남성적 판타지를 서사화했다. 환상은 제국을 향한 욕망이 좌절되는 지점에서 생성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 실격』은 일본 남성의 좌절된 제국주의가 여성이라는 내부의 식민지를 발견하는 작품인 것이다. 실패는 어떻게든 만회되어야 했는데, 마침 다자이 오사무라는 개인적 삶이 문학적 형식을 만나 요조라는 인물로 보상받은 것이다. 오쿠노 다케오의 과장된 엄살과 『인간실격』에 대한 숭상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인간실격』은 패배한 제국의 무의식적 소원 성취이다. 미/추, 관습/자유, 실용/놀이, 위선/진정성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모순을 이루는 퇴폐적 풍경은 악몽을 꾸었을 때처럼 당혹감과 불쾌를 느끼게 한다. 한국에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라면, 한국 사회도 분출되는 사회적 리비도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나르시시즘이 사회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경고 신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실격』이 신화화된다면, 우리는 작품의 이면에 흐르는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간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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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og

    <인간실격>을 읽고, 도무지 나에게 이렇게 이 소설이 그동안 왜이렇게 익숙하게 책 제목이 회자되었고, 여성인 내가 왜 이렇게 책이 불편할까 그다지 그 유명세에 비해 작품이 훌륭하거나 좋다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마음의 그 작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너무 공감되는 이야기이고, 특히 수많은 여성편력 속에서 요조가 무엇을 추구하고자 했는 지 그럼으로써 해소되는 것은 무엇이었는 지 여성인 나의 시선으로 더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22.05.25 09:06 댓글쓰기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