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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함께 읽고픈 시 남기기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저
창비 | 2006년 11월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102~103, 이병률 시집『바람의 사생활』에서)

 

 

봄은 온다. 한 묶음의 계절로 온다. 우리에게 함께 온다.

봄날은 간다. 낱낱의 날들로 간다. 당신이 되어 홀로 간다.

오는 봄에 가슴이 한껏 부풀다가도

막상 가는 봄날은 하루하루가 마냥 아쉬운 이유이다.

 

이 별에서 이별이란

달이 차고 이우는 것과 무관하게

또한 별이 떨어지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가 결국엔 온몸으로 나아가고야 마는 약속된 방향이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잊고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옮겨 앉아서

이젠 다른 계절의 햇빛을 받고 있다할지라도

당신이라는 제국에서 나 역시 봄날을 간다

 

가긴 가는데

아, 나의 봄날은 기억으로 기억으로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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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이수

    아래에 적은 글도 시같아요.^^(최고!ㅎㅎ)

    2018.03.26 10:35 댓글쓰기
    • 은이후니

      가을볕 아래 봄날이 가고 있네요. 키위 수확철이라 이제 조금씩 바빠질 듯.^^

      2018.03.26 11:16
  • 채움

    시 잘보고 갑니다.

    2018.05.14 16:59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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