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걸 온 더 브릿지>는 2000년 4월에 한국에서 극장 개봉되었는데, 홍보를 위해서 빠뜨리스 르꽁트 감독이 직접 내한하여 기자회견도 가진 것으로 나온다. 당시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나는 업무가 바빴던 탓인지 영화 광고도, 감독의 기자회견 기사도 보지 못해서, 이 영화를 놓쳤던 모양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나 이곳 뉴질랜드에서 며칠 전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갔다가 너무나 익숙한 감독의 이름을 그 표지에서 발견하고 주저 없이 이 영화를 빌려와 보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란……! 아내와 함께 두 번을 보았다.
<걸 온 더 브릿지>는 그가 이미 많은 작품들에서 다루었던 주제, 즉 '현실' 속에 분명 있을 법하지만 왠지 '꿈'처럼만 여겨지는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고 다시 만나는 곳이 흐르는 강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인 것처럼, 이 영화는 '현실'과 '꿈'이라는 강의 양안에 모두 걸쳐 있다.
그 두 주인공은,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절망밖에 없어 자살하려고 다리 난간에 위태롭게 선 호스티스 출신의 스물 두 살의 여자 아델(Adele, 바네사 파라디 Vanessa Paradis 분)과 자신의 서커스 공연에 필요한 표적을 고용하기 위하여 그 다리 위를 서성거리고 있던 마흔이 넘은 칼잡이 사내 가보(Gabor, 다니엘 오떼이유 Daniel Auteuil 분). 가보는 그동안 그런 식으로 자살 직전의 여자들을 구슬려 자신의 표적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미 죽을 결심을 한 여자에게 강물에 떨어져 죽는 것이나 칼에 맞아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가보의 표적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어긋나는 대화가 보여주듯이, 이들은 한 팀이 되기에는 너무 달라 보이고 <퐁네프의 연인들>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발전할 가능성은 더 더욱 멀어 보인다. 그러나 가보의 말에 자극 받아 강물로 뛰어든 아델을 가보가 몸을 던져 구해내면서 이들은 기묘한 한 쌍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미 포기한 목숨을 가보가 구해주었으니, 아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가보의 살아 있는 표적이 되는 것밖에 없다. 아델은 가보의 부탁대로 표적이 되기로 하고 가보는 행운의 표시로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아델에게 준다.
한 번도 실수함이 없이 두 사람의 공연은 서커스 쇼에서 큰 인기를 모으게 되고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한다. 여기에 한 번도 행운의 숫자를 뽑아 본 적이 없다는 아델에게는 카지노 판에서 거액을 따고 고급 자동차 경품권에 당첨되는 행운(luck)까지도 뒤따른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랑(love)까지 따라주지는 않는다. 가보의 칼 던지기 공연이 회를 거듭할수록 아델은 자신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표적판에 박히는 가보의 칼날에 아찔한 쾌감을 느끼며 온몸을 비틀어대지만 가보는 한 번도 아델의 몸을 탐하지 않는다. 그러니 18살에 만난 첫 남자를 따라 가출해서 이 남자 저 남자 품을 전전했던 아델이 한눈을 팔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크루즈 선상에서 만난 그리스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아델은 가보와 헤어지고 그 남자를 따라나선다. 그러나 자기가 믿었던 그리스 남자가 형편없는 바람둥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꿈은 곧 깨지고 만다. 역전된 상황에 접하기는 가보도 마찬가지. 아델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여 가보의 표적이 된 그리스 남자의 신부―신랑을 아델에게 빼앗기고 실의에 잠긴 그녀가 배에서 떨어져 자살을 시도하려는 것을 가보가 구슬려 그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에게 던진 칼 하나가 그녀의 몸에 박히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가보 역시 유람선에서 강제 하선조치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터키의 낯선 항구에 따로따로 기착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었고, 행운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 그들은 다시 만나서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한 편의 소설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구체적 실감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빠뜨리스 르꽁트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수준 높은 문학성이 잘 드러나 있는 멋진 대사는 이 아름다운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가장 큰 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이미 짜여진 플롯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영화의 서사를 만들어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이들이 주고받는, 풍부한 함의를 지닌 대사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실'과 '꿈'을 모두 품어내는 이 영화의 저력은 이 영화가 흑백 필름으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연유한다. 총천연색으로 찍었으면 아마도 너무나 화려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했을 극장에서의 서커스 장면, 크루즈 선내에서의 공연 장면, 카지노에서 도박하는 장면 등은 흑백의 은은함 속에 묻혀서 그 장면 속에 있는 두 사람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는 흔히 행운의 상징이라고 부르는 화려한 색깔의 무지개조차도 이 영화에서는 무채색 반원으로 꿈처럼 등장한다.
<걸 온 더 브릿지>는 리얼리즘의 흑백 필름으로 찍어낸 '꿈'같은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그 사랑이 단지 꿈처럼 허황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현실'에 육박하는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진실이면서 동시에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 진실은 바로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오로지 '아델'과 '가보'를 볼뿐이다. 바네사 파라디와 다니엘 오떼이유의 얼굴과 몸을 잠시 빌려 '아델'과 '가보'는 우리에게 사랑과 행운에 관한 진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