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달팽이 이야기 4
맑은 날 아침
안뜰 시멘트 바닥 위
간밤에 달팽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햇빛이 반짝거리며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이 끝나 가는 곳에
문득 멈춰 서 있는 달팽이집 하나
작고 둥글고 시커먼 그림자가 바짝 붙어 있다
똑똑똑, 노크를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빈집에서 빠져 나온 먹구름이
먼 하늘에서부터 뭉쳐 비를 뿌리기 시작하는 오후
새 한 마리 내려앉아
바싹 마른 소용돌이 무늬를
톡톡톡, 쪼고 있다
<시작 노트>
달팽이는 밤새도록 기어갔지만
동틀 무렵까지 풀숲에 도착하지 못한 채
안뜰 시멘트 바닥 위를 여전히 느리게 횡단하고 있었다.
등에 짊어진 집이 그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었던 것일까?
아침 일찍 먹이 구하러 나선 눈 밝은 새가 그 달팽이를 보았다.
새는 달팽이를 부리로 콕 물어 올려 시멘트 바닥 위에 몇 번 내동댕이쳤다.
숨죽인 달팽이가 은신하고 있던 달팽이집은 쉽게 깨졌다.
새는 깨진 구멍을 통해 달팽이 몸통을 끄집어내고는 꿀꺽 삼켰다.
햇빛 반짝거리는 시멘트 바닥 위에 이젠 주인 없는 빈 달팽이집만 남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아니 움직일 수 없는.
작고 둥글고 시커먼 그림자가 바짝 옆에 붙어 있는.
깨지고 상한 빈 달팽이집 안에 삶 대신 죽음이 들어 앉았다.
그 죽음 주위로 소용돌이치며 몰려든 먹구름이
마침내 비를 뿌리기 시작하는 오후,
나는 목이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