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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움도 부끄러움도 아닌

   - 달팽이 이야기 5

 

 

달팽이 두 마리가 텃밭에서 만났다

커다란 상추 잎사귀 위에서였다

한 놈은 멋진 집을 등에 지고 있었다

집에 새겨진 소용돌이 무늬는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소용돌이 무늬를 미끄럼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들이 반짝거렸다

그걸 바라보고 있던 민달팽이는 눈이 부셨다

이번엔 긴 더듬이를 뒤로 향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시커멓고 길다랗기만 한 벌거숭이 몸통이 흉물스러웠다

어쩜, 넌 집 한 채 없구나

그래도 용케 살아가고 있으니 참 대단한 걸

소용돌이 무늬가 우아하게 다가와 짐짓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벌거숭이 몸통은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요즘 세상에 그깟 집 한 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쳇

거짓말한 피노키오의 코처럼 벌거숭이 몸통이 길게 늘어났다

길어져서 가느다래진 등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아팠다

모처럼 비가 내려서 대낮에 소풍 나온 게 후회스러웠다

온 힘을 다해 상추 잎사귀에서 기어 내려와 흙 속으로 몸을 숨겼다

상추 잎사귀 위에는 이제 소용돌이 무늬만 남았다

저렇게 숨는다고 부끄러움이 가려지나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면 될 것을

사람들이 그래서 널 괄태충이라고 부르는 거야

나라면 집 한 채 없이 괄시받고 사느니 그냥 콱 죽어버릴 텐데

달팽이는 민달팽이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멋진 집을 보아달라는 듯 온몸을 으스대었다

새 한 마리가 나무담장 위에 앉아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콱 죽어버릴 텐데,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새는 달팽이를 향해 날아갔다

이번엔 대꾸를 좀 해줘야겠다고 민달팽이도 흙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진 달팽이집이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허공 속에서 공포의 비명과 안도의 한숨이 잠시 얽혔다가 풀어졌다

달팽이 두 마리가 있던 상추 잎사귀에 선명한 흔적이 남았다

부러움도 부끄러움도 아닌 그 흔적 위로 내리는 비가 거세지고 있었다

 

 

<시작 노트>

 

똑같은 연체동물 복족류에 속하는데도 민달팽이는 달팽이와는 다른 대접을 받는다. 집이 없기 때문이다.

 

민달팽이는 한국어로는 괄태충이라는 좀 모멸적인 어감이 느껴지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영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영어로 달팽이는 미소(smile)를 떠올리게 하는 snail인 반면, 민달팽이는 뭔가 칙칙한 느낌을 주는 slug인 것이다. 또한 느리고 부진하고 침체되고 게으르고 둔한 상태를 표현하는 데도 sluggish 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면, 민달팽이는 서구권에서도 사람들에게 단단히 밉보인 게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집이 없다고 해서 어찌 삶조차 없을 수 있겠는가! 집이란 기껏해야 우리 삶의 절반 정도쯤만 끌어안을 뿐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집은 등에 짊어진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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