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 돌림 채소들에 찾아오는 손님들
- 추사의 텃밭 1
늦은 봄에 추자 돌림 채소들을 심었다
겨우내 묵혀두어 추저분했던 안뜰 텃밭이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푸르른 채마밭으로 변했다
벚꽃 다 져서 적막했던 뜨락이
다시 시끌시끌했다
올해도 하면(夏眠)에 들어야 하나 고민하며
우리 집 살림 형편을 살피러 왔던 달팽이들이
푸릇푸릇 돋아난 상추들을 보고는
밤마다 사각사각 환호성을 질러댔다
서너 번 손전등을 들고 나가 입막음을 했으나
풍족했으므로 나는 곧 못들은 척 내버려뒀다
배불리 잘 먹어서 허리가 굵어진 배추들이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환한 대낮에 우리 집 안뜰에 놀러 온 흰나비들이
나풀나풀 흉보는 소리도 들렸다
가만히 듣고만 있기엔 사정이 몹시 딱해 보여서
배추들에게 일일이 허리띠를 매주었다
그 옆에서 부추들은 우쭐대며
가늘게 쭉 뻗은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 곧 예쁜 꽃도 피워 올릴 테니 자주 놀러 오라고
지나가는 꿀벌들에게 온갖 아양을 다 부렸다
눈꼴사나워 가위를 들고 나오는 나를 보고서야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키를 키우는 일에만 골똘한 고추들에게는
한여름이 다 되었어도 찾아오는 손님이 하나 없었다
멀쑥한 고춧대 겨드랑이에 별을 닮은 하얀 꽃들이
하나 둘씩 피어나기 시작하자 비로소 찾아왔길래
활짝 반겨주었더니 냅다 줄행랑을 놓았다
고양이 놈이 쓰러뜨린 고춧대를
긴 막대기 꽂아 부축해서 세워주는데
오므라진 고추 꽃모자를 푹 눌러 쓴
어린 가을의 동그랗고 매끈둥한 턱이 보였다
추사의 텃밭에 찾아온
입추의 아침이었다
<시작 노트>
오늘이 한국에서는 입추이지만
여기 뉴질랜드에서는 입춘이어서
올해는 어떤 채소들을 텃밭에 심을까 잠시 궁리해본다
아무래도 추사(醜士)의 텃밭에는
추자 돌림 채소들이 제격이 아닐까 싶은데
서재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텃밭이 잡초들로 어지럽다.
같은 추자 돌림이라고
우리 집 안뜰 겨우내 묵혀둔 추저분한 텃밭에까지
멀리서 귀한 손님이 찾아와
못난 사내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있지만
대양을 건너고 적도를 넘어서 먼 길을 오신 손님 입추를
그래도 나는 반갑게 맞는다.
상추 잎이 억세질 때까지
배추 속이 꽉 찰 때까지
부추 꽃이 활짝 필 때까지
그리고 고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때까지
올해도 추사의 텃밭에서
부디 오래오래 머물다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