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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 모종 옮겨심기

   - 추사의 텃밭 2

 

 

비 그친 봄날 오후

공들여 싹 틔운 상추 모종들을

안뜰 텃밭에 옮겨심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상추들이

입학하는 첫날 운동장에 모인 초등학교 신입생들처럼

쭈뼛쭈뼛 두리번두리번 울먹울먹

코 묻은 연둣빛 손수건들을 나풀거리며

나란히 줄 맞춰 섰다

 

모종비까지 내려서 흠뻑 젖은 흙이니

어린것들이 울먹거리든 말든

두리번거리며 딴전을 부리든 말든

여긴 싫다고 앙살을 피우든 말든

여기가 바로 네가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꼭꼭 눌러준 후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장갑을 벗었으나

 

다음날 아침에 보니

낯선 곳에서 첫날밤을 보낸 어린 상추들 중에는

간밤에 달팽이의 습격을 받아 몸이 축난 것들이 제법 있고

따스한 햇살을 받고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상한 것보다 온전한 게 더 많고

달팽이야 내가 다 잡아주면 될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얼치기 농부가 건둥건둥 해치워서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하룻밤 만에 다 죽어버린 어린것들은

다시 살려낼 방도가 내겐 없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이 바로 무덤이 되어버린 죽은 상추들과

달팽이에게 갉아 먹힌 여린 잎사귀들이 애처로운 상추들을 바라보며

십여 년 전 이곳 뉴질랜드로 옮겨심은 내 삶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다 죽었고

아직껏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문득 두렵고 서글퍼지는데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일찍 독립시킨 딸아이에게서

취업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엄마 아빠 잘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보고 싶고 사랑해요

또박또박 적어 덧붙인 인사말에

시들어 있던 내 마음이 비로소 환해지고

오래된 내 뿌리에도 생생하게 다시 물이 돌기 시작했다

 

 

<시작 노트>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받은 이민 1세대에게는 적응보다는 생존이 우선이다. 이미 고국에서 뿌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졌기에 낯선 나라의 토양과 풍토에서 살아남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된다.

 

적응은 대체로 이민 1.5세대의 선결과제가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지간한 한국말은 자유롭게 구사할 있을 정도 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나 고등교육 과정은 이민을 온 나라에서 마친 이민 1.5세대에게 있어, 적응은 향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이민 국가의 주류 사회와 문화에 합류되는 동화(同化)의 디딤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이곳 뉴질랜드에서 10여 년을 버텨냈으니 생존에 성공한 셈이고, 딸아이는 대학을 거의 다 마치고 취업까지 확정됐으니 완벽하게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우리 부부에게는 적응의 과제가, 딸아이에게는 동화의 과제가 남아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옮겨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모종의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하는 일이듯이, 우리 부부와 딸아이에게 남아있는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가장 큰 비법은 우리의 뿌리, 즉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데 있을 터이다. 낯선 땅에서 우리의 뿌리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 뉴질랜드가 표방하고 있는 문화적 다원주의에 기여하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게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응이고 동화일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한 나라의 영토는 확장되고, 문화는 융성하며, 국력은 강해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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