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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의 속사정

   - 추사의 텃밭 3

 

 

턱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와서

한 줄로 촘촘히

잘 자라고 있는 멀쩡한 배추들을

또 솎아내고 갔다

 

손바닥 텃밭에 살아남은

어린 배추들 여남은 개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에

사내의 잔손금이 묻었다

 

눈부신 햇빛을 실어 나르는

배추흰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배춧잎마다

반백의 사내가 쪼그려 앉아

눈을 찡그리고 살펴보았다

 

배춧잎들 곳곳에 장착된

아주 작고 노란 시한폭탄들이 제거되고

양산처럼 다시 펼친 넓은 어깨들엔

사내의 손톱 자국이 남았다

 

한여름 뙤약볕을 함께 견디고

건들장마도 다 지나간 텃밭에

똥배가 나온 사내가

이번엔 낡은 허리띠들을 들고 왔다

 

두둑도 고랑도 모두 덮어버린 채

제 몸무게를 힘겨워하고 있던

무성한 배추들의 굵은 허리마다

사내의 허리띠가 매어졌다

 

그리고 처서도 백로도 지난 오늘

수염도 손톱도 말끔히 깎은 사내가

마침내 다섯 포기만 남은 다 자란 배추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꽉 들어찬 속을 숨기고 있는 배추들은

말없는 사내의 속내가 궁금하고

아직도 비워내야 할 욕심이 많은 사내는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배추들의 속사정이 궁금하고

 

<시작 노트>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처음 배추를 길러봤다.

씨 뿌리고 싹이 나서 잎들이 무성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솎아낸 어린 배추들을 된장에 찍어 먹는 재미는 꽤나 쏠쏠했다.

 

그러나 스스로 결구(結球)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너무 일찍 배추를 묶어주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속이 꽉 찬 배추는 한 포기도 수확하지 못했던 기억이 오늘 새롭다.

 

반백(半百)을 훌쩍 지나 이제 육십에 다가서고 있는 내 삶도

어쩌면 그런 욕심과 조급함 때문에

속이 꽉 찬 결구(結球)를 아직껏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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