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헤라자드의 천이야화(千二夜話)
- 디아스포라 디아볼로 4
부엌에서 분주히 저녁을 준비하던 사라
크게 틀어놓은 여섯 시 뉴스에서
이라크 소식이 들려오자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거실로 달려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고국을 떠나온 지 십여 년
그때 함께 데리고 온 어린 두 딸은
벌써 어엿한 숙녀 대학생들이 됐고
자신도 이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아줌마가 다 되었지만
그녀의 기억이 간직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은
아직도 삼십대 초반의 늠름하고 잘 생긴 청년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이라크 사내는
까칠한 얼굴에 볼품없이 깡마른 몸매
허구한 날 터지는 폭탄과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 때문에
불안해서 이젠 정말 못 살겠다고
마이크를 들이댄 외신기자에게 불평을 한다
아, 남편은 무사한 걸까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올 텐데
벌써 십 년 넘게 아무 소식이 없으니
역시 그런 걸까
그녀는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든다
미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당신은 아이들이랑 먼저 떠나라구
난 남아서 뒷정리하고 목돈도 좀 마련해서
곧 뒤따라 갈 테니 너무 걱정 말구
그렇게 우리 등을 한사코 떠밀던 남편의 두 손을
그때 꽉 잡고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낯설고 귀설은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에
간신히 난민으로 받아들여져
이름도 여기식으로 바꿔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반복한 자책과 후회를
사라는 오늘 저녁 또다시 되풀이한다
평소보다 늦어진 저녁 식탁에서
어젯밤 꿈에 본 남편의 죽은 얼굴이
자꾸만 눈에 떠올라
사라는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엄마의 울적한 기분을 눈치챈 두 딸도
말없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설거지를 다 끝내고
텔레비전도 꺼버려 적막한 밤
사라는 처음으로 딸들에게
연애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시작된
세헤라자드의 이야기 속에서
남편은 아빠는 여전히 살아있다
<시작 노트>
9.11 테러 이후 미군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세헤라자드가
구사일생으로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에 난민으로 받아들여져
사라로 이름까지 바꾸고 두 딸과 함께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녀가 두 딸들에게 들려줄 첫 번째 이야기, 즉 천이야화(千二夜話)는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자 두 딸들의 아빠에 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녀는 소식 없는 남편을 죽음에서 구하고
잊혀져 가는 아빠를 망각 속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를 구하는 힘이 되어주기도 할 터이니 말이다.
긴 밤을 건너가는 이야기 하나씩 들려줄 때마다
한 여인의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냈던 세헤라자드처럼
내 어줍잖은 시 한 편도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그러나 분수에 넘치는 오만이고 허영이며 사치일 터.
다만 내 시를 읽는 누군가가
삶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는 작은 희망의 불꽃을 잠시 피울 수 있고
아픈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위안의 손길이라도 잠깐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최고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
그렇게 작고 따뜻한 천이야화를 꿈꾸며
내 생애의 나날 동안 천두 편의 시들을 쓸 수 있기를
나는 바라고 또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