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밤, 마이클을 만났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립 공설운동장 잔디밭에서 열린 야외영화상영회 자리에서였다. <This is it>. 뒤에 서 있는 나무 그림자가 언뜻 얼룩져 나타나기도 하는 대형 스크린에 비친 그는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6개월 전쯤의 그의 모습은 바짝 마르기는 했지만 활력이 넘쳐났다. 온갖 표정을 목소리에 담아내는 그의 비트 강한 노래 실력도 여전했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쉰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몸놀림을 보여주는 그의 경이로운 춤이었다.

그의 온몸 근육의 구석구석에는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미세한 수신 장치들이 이식되어 내장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 장치가 음악의 리듬과 비트를 받아들이는 즉시 자동적으로 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몸 동작으로 변환시켜서, 그 어떤 가수도 흉내내지 못하는 독특한 그의 춤을 만들어내는 것이리라는 엉뚱한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가 수십 차례에 걸친 성형 수술을 통해서 데뷔 초기의 귀여운 흑인 꼬마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내 생각이 그리 엉뚱한 것만도 아니리라.

아무튼 눈으로 보는 영화였기에, 또한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에(영화 상영 도중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바로 위를 날아가기도 했다), 우리가 만난 마이클은 노래하는 마이클이 아니라 춤추는 마이클에 더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창 시절이었던 무렵 들었던 노래들이 흘러나올 때는 저절로 따라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Billie Jean’이나 ‘Beat It’ 같은 노래들 말이다. 내가 좋아하거나 즐겨 부른 노래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멜로디와 가사의 일부를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음은, 젊은 시절 한때 즐겨 다녔던 디스코텍에서 열광적으로 춤추며 노래했던 내 몸의 기억력에 힘입은 것이겠다.
<This is it>을 보면서 마이클을 만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젊은 시절을 만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클이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듯이, 우리의 젊은 시절도 이미 지나간 시간 저 너머에 있는 죽은 세월일 뿐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조금은 쓸쓸하게 했다. 그리고 ‘명성’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누구는 ‘팝의 황제’라고 부르며 마이클을 오래 기억하겠지만, 이제 그 명성을 누릴 수도 없는 처지가 된 그에게는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마이클은 살아 있을 때도 자신의 ‘명성’을 기꺼운 마음으로 누려본 적이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의 ‘명성(fame)’이 사람들의 시기심이나 아니면 그 자신의 아주 조그마한 실수에 의해서도 쉽게 ‘수치(shame)’로 변질되고 마는 족쇄가 되었을 테니까. 그가 말년에 경험한 여러 가지 부끄럽고 유쾌하지 못한 사건들은 바로 그의 명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또한 그에게 있어 명성은 자신의 진정한 ‘이름(name)’을 가려버리는 가짜 이름이며, 일상적인 삶을 질식시키는 파괴적인 이미지이기도 했으리라. 그가 수십 차례에 걸쳐 자신의 얼굴을 뜯어 고친 이유도 사실은, 자신의 얼굴에 덧씌워져 있는 그 끈적끈적한 ‘명성’의 가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통스런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마이클과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초상화현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잡지, 영화, 텔레비전의 스타들은 이미지에 의해 속속들이 파괴된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살도 뼈도 없는 존재로 변하고 만다. 스크린 속이나 우리들의 눈앞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은 외부원형질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답게 살지도 즐기지도 괴로워하지도 못한다. 가끔 그들 중 어떤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계에 의해 다시 토해내어진다. 그렇게 되면 그는 본의 아니게 주어진 그 반쪽짜리 삶을 고통스럽게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흘러간 시절의 스타가 겪는 지옥이다.
그러나 가장 흔한 운명은 이미지에 의한 죽음, 즉 초상화현상(肖像畵現像, Iconisation)이다. 이것은 동물이 박제로 만들어지는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마이클 잭슨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보자. 그 역시 여러 번 경련하듯이 꿈틀거려본다. 그는 추문도 생기고, 파란만장하여 뜨거운 사랑도 있는 사생활을 가져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우리는 단말마의 고통과도 같은 그런 무용한 시도들을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다. 마릴린 먼로(서른여섯 살에 죽었다)가 그랬고 그에 앞서 루돌프 발렌티노(서른한 살에 죽었다)가 그랬다. 마이클 잭슨은 아직도 경련하듯 몸을 파닥거리고 있지만 사실은 밀랍 얼굴을 가진 속이 텅 빈 인형에 불과하다. 이제 머지않아 그는 쓰러질 것이고 사람들은 그를 꺼져버린 별들을 안치하는 신전에 갖다놓을 것이다. 이미지에 의해 속이 파먹히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흡수되고 마는 것 그것이 바로 초상화현상이다.
- 365~366쪽, 『예찬』

미셸 투르니에의 이 불길한 예언은 그로부터 10년도 훨씬 더 지나고 나서야 실현이 되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 마이클 잭슨에게 있었던 일들과 예기치 못했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놀랄 만큼 정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마릴린 먼로나 루돌프 발렌티노보다는 좀더 오래 살았지만 마이클 잭슨 역시 그렇게 자신이 만든 ‘명성’에 의해서 결국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텅 빈 삶과 때이른 죽음, 그게 바로 명성의 대가이다. This is it. Good-bye, Mich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