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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100% Pure New Zealand'' 영화
은이후니
200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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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0% Pure New Zealand''. 뉴질랜드 관광청에서 지난 1999년부터 전세계를 대상으로 야심적으로 펼치고 있는 캠페인의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에는 100% 순수한, 즉 오염되지 않은 푸르고(green) 깨끗한(clean) 대자연의 땅이 바로 뉴질랜드라는 강한 자부심이 담겨있다. 때맞춰 뉴질랜드 올로케이션으로 제작되어 전세계적으로 개봉된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키위들이 속에 품고만 있던 자부심을 가슴 밖으로 내놓고 자랑하도록 만들었다.
피터 잭슨이 흥행 수입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꼼꼼히 계산하고 있는 동안, 뉴질랜드 관광청은 피터 잭슨의 영화 덕택에 뉴질랜드로 놀러오려고 하는 잠재 관광객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뉴질랜드 헤럴드>는 <반지의 제왕>이 헐리우드의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는 천문학적인 흥행 수입을 기록하고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세계적인 여행 잡지사 <론리 플래닛>에서 실시한, 다음에 여행 가고 싶은 나라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뉴질랜드가 1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을 잇달아 보도했다.
그러나 나는 <반지의 제왕>을 둘러싼 이런 떠들썩함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소동이,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야행성 조류인 키위가 흔적만 남아 있는 작은 날개를 펼치고 환한 대낮에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보기에는 좀 민망했다. 자부심이 지나쳐 자만심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자부심에 자만심이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그들이 자랑스레 내세우는 ''100% Pure New Zealand''의 순도에도 흠집이 나게 될 터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피터 잭슨은 영화제작사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받은 돈이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소송을 제기했으며, 베트남전에서 쓰였던 것과 동일한 성분의 제초제를 한때 생산했던 공장이 있는 뉴질랜드 북섬의 한 도시에서는 그 배상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피해자들 간에 해묵은 논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이 만들어낸 이 떠들썩한 소동과 추문 속에서 내게 조용히 그러나 너무나 큰 물결로 다가온 또 다른 뉴질랜드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웨일 라이더(The Whale Rider)>였다.
2.
물론 제작비 규모, 영화적 볼거리, 그리고 상업적 성공의 측면에서 <웨일 라이더>는 <반지의 제왕>에 견줄 상대가 못 된다. 하지만 <웨일 라이더>는 아무리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더라도 결코 얻지 못할 깊은 감동, 너무나 소박해서 오히려 컴퓨터가 만들어낸 스펙터클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장면들과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 그리고 상업적 성공을 무색하게 만드는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해 <반지의 제왕>보다 훨씬 더 돋보이는 영화이다.
뉴질랜드 북섬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모여 사는 한 마오리 부족이 처한 전통의 단절이라는 사건과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단지 그들에게만 국한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자주 나타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에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사건이며 과정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또한 권력의 장자 상속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끝까지 고집하는 늙은 족장의 무력함과 그에게 말없이 대항하면서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그 고집쟁이를 감싸 안는 어린 손녀의 맑은 용기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이 단순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
영화의 중반을 넘기면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이 두 방향의 힘은 제각기 폭발한다. 어린 손녀의 편에서는, 학교에서 개최한 콘서트의 마지막 순서로 아직도 오지 않아서 빈자리로 남아있는 할아버지께 헌정하는 연설을 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그 정점에 달한다. 바로 그 시간, 어린 손녀가 출연하는 콘서트를 보러 학교로 향하던 늙은 족장은 밤 바닷가에 좌초되어 죽어가고 있는 고래들의 무리를 발견한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있던 그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자신의 조상들을 이 땅에 실어 나른 저 고래들을 이렇게 죽음으로 내몬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라고 늙은 족장은 탄식한다.
위기에 처해 있는 전통이 바닷가에 좌초한 고래라는 이미지로 등장한 셈인데, 영화 속에서 고래 떼의 좌초는 상당히 우연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져서 감독이 너무 안이한 결말로 이끈 것이 아니냐는 혐의도 가질 법하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고래 떼의 좌초가 일 년에 두 세 번씩은 꼭꼭 일어나는, 별로 드물지 않은 사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이야기 설정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으며 현실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전설에서처럼, 어린 손녀가 몸집이 가장 큰 우두머리 고래 등에 올라타서 바다로 향하자 좌초된 다른 고래들 역시 그 뒤를 따라 바다로 향하면서 고래 떼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전통이란 기존의 관습을 답습하기(족장의 권력은 장자, 즉 사내아이에게만 승계된다)보다는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여자도 능력을 갖추었다면 족장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이 있을 때 그 생명력이 보다 오래 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3.
이렇게 전통의 단절과 계승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읽어내지 않더라도 <웨일 라이더>는 오랫동안 쉽게 가시지 않을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그 감동의 원천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하며,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서 오는 깊은 공감이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대다수의 우리가 살고 있는 너무나 복잡하고 시끄럽고 요란한 도시와는 달리 너무나 한적하고 고요하고 소박한 바닷가 작은 마을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뉴질랜드,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 바로 그런 한적하고 고요하고 소박한 이미지가 아닌가. 그러니 <웨일 라이더>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100% Pure New Zealand'' 영화라고 부를 만하지 않겠는가. 나는 뉴질랜드 관광청이 입만 열면 내세우는 ''100% Pure New Zealand''를 <반지의 제왕>이 아니라 <웨일 라이더>에서 말 그대로 100%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100% 순수한 뉴질랜드를 영화를 통해서 미리 조금 맛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국적 없는 판타지인 <반지의 제왕>이 아니라 지금도 뉴질랜드에서 실재하는 현실인 드라마 <웨일 라이더>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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