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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SE La Dolce Vita Special Edition

[DVD] 달콤한 인생 SE La Dolce Vita Special Edition

페데리코 펠리니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페데리코 펠리니의 3시간짜리 영화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는 커다란 예수상을 줄에 매달고 날아가는 헬리콥터와 그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하여 뒤따르고 있는 또 한 대의 헬리콥터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어 댄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드는 손은 예수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헬리콥터 안에 탄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이것은 높은 건물의 옥상 위에서 선탠을 하고 있던 한 떼의 젊은 여인들이 헬리콥터에 탄 신문기자 마르첼로와 손짓 대화(헬리콥터 프로펠러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으니까)를 나누면서 하는 자기들끼리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 사람이 뭐라고 그러는 거야?” “네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있을 걸.” “예수상은 어디로 가지고 가는 걸까?” “교황에게나 갖다 주라지 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젊은 여인들의 관심은 예수상이 아니라 그것을 뒤따르며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가와 그와 함께 타고 있는 신문기자에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헬리콥터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려진 순간부터 예수상은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신성은 인공성에 의해서 훼손되고 망각된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파티마의 기적’을 희화화한 듯한 에피소드도 이러한 도입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는 두 아이들의 거짓 증언에 놀아나는 어른들과 방송 및 언론매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일상에서 잃어버린 신성을 이적(異蹟)에서 되찾으려고 하는 현대사회의 속물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가장 신성에 가까운 동심에서조차도 신성이 사라진 암울한 현대사회의 저열함에 참다못한 하늘은 마침내 비를 퍼붓고 만다. 가장 신성시되는 종교가 이 모양이니 저자 거리의 소식들을 실어 나르는 신문기자의 일상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뻔하다. 마르첼로의 뒤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경박하기 짝이 없는 영화계의 스타와 그 뒤를 쫓는 저널리즘과 환락으로 가득 찬 나이트클럽과 자극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상류층의 파티 등을 차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흔히 ‘술과 장미의 나날들’이라 불리는 이런 삶은,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결코 ‘달콤한 인생’이 아니다. 새벽에 여배우를 무사히 호텔까지 데려다 준 마르첼로에게 돌아온 건 그녀 남편의 주먹이었고, 아들과 함께 간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한 무희에게 노익장을 과시하려던 마르첼로의 아버지는 몸이 받쳐주지 않아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떠나고 만다. 긴 환락의 밤 끝에 맞는 부스스한 아침은 사람들이 흔히 달콤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삶이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거리에서 우연히 목격한 낯익은 얼굴에 이끌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옛 친구 스타이너를 만난 마르첼로는, 스타이너가 파이프 오르간으로 들려주는 바하의 토카타를 들으며 자신의 삶의 이러한 속물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작가로 제법 명성을 얻은 스타이너와의 대화를 통해 마르첼로 역시 작가가 되고자 원했던 젊었을 때의 자신의 꿈을 기억해낸다. 그래서 이제 신문의 기사가 아니라 문학 작품을 쓰고자, 한가한 해변의 한 카페에서 타자기를 앞에 놓고 앉는다. 그러나 밤거리 출신의 약혼자가 징징거리며 걸어대는 전화와 웨이트리스 소녀가 틀어놓은 유행가 음악소리는 그를 방해한다. 해맑은 미소의 그 소녀에게 그 음악은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드는 생의 리듬이었지만 마르첼로에게는 머리 속을 두드리는 망치였던 것이다. 마르첼로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타자기에서 종이를 꺼내고 만다. 그런데 그가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던 스타이너는 놀랍게도 후반부에 가서 자신의 두 아이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비극적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재능 있는 화가와 무용가, 음악가 등 예술가 친구들을 많이 두고 있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는 그가 아이들까지도 죽이고 자살을 하다니! 자신과는 너무 다른 흠잡을 데 없는 삶을 누리고 있는 그가 도대체 자살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스타이너가 마르첼로에게 그 전에 했던 고백 속에 이미 들어 있다. 마르첼로가 약혼자를 데리고 스타이너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갔을 때, 스타이너는 마르첼로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가끔씩 밤에 나는 어둠과 침묵의 무게를 느낀다네. 그 평화로움이 나를 무섭게 한다네. 아마도 나는 평화를 그 무엇보다도 무서워하고 있는지도 모르네. 나는 그것이 단지 지옥의 얼굴을 숨기고 있는 외관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네.” 그 공포가 무서워서 그는 자살을 했던 것이고, 그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아이들마저도 죽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 사건 앞에서 마르첼로는 혼동에 빠지고 그러한 자신을 잊기 위한 것인지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해변의 주택에서 파티를 연다.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마르첼로 자신이 호스트가 된 이 파티는 한창 잘나가던 스트립쇼가 뒤늦게 온 손님의 등장으로 중단되자 점점 어긋나기 시작한다. 새벽녘에 바닷가로 뛰쳐나간 사람들은 바다에서 좋아라하며 뭔가를 열심히 끌어올린다. 그러나 거대한 가오리처럼 생긴 그 괴물은 다 끌어올려진 다음에는 바닷가에 그냥 버려지고 만다. 생기 없이 퀭한 그 괴물의 눈에서 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끝까지 남아 있는 마르첼로에게, 작은 개울이 가로막고 있는 저쪽 모래밭에서, 해변 카페에서 만났던 바로 그 소녀가 말을 건넨다. 그러나 파도 소리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마르첼로에게까지 가 닿지 못한다. 웃고 있는 그 소녀의 얼굴을 보며 열심히 귀를 기울이지만 소통불가능. 무리들에 이끌려 마르첼로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더 이상 달콤한 인생이 아닌 삶 속으로.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은 대충 이러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불쑥 불쑥 인과관계가 전혀 없이(그러나 작품 전체의 구조로 봐서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있다) 연결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조그마한 암시나 힌트를 간간히 보여주면서 하나의 스토리로 구축해나가는 당시의 일반적인 영화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이 영화는 그런 기대를 버리고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독립적으로 볼 것을 우리에게 주문한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통합되는 것은 객석에 다시 불이 켜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 머리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지금은 새로울 것이 없는 방식이겠지만 40년도 더 전인 당시에는 분명 하나의 혁명이었을 터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달콤한 인생>은 달콤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매우 씁쓸한 영화다. 그 씁쓸함에 인생의 참맛이 들어 있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는 이유는 그 참맛을 느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제목만 보고 달콤한 그 뭔가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선택했을 사람들에게는 3시간이라는 시간은 견디어내기에 너무나 긴 시간이 될 지도 모른다. <달콤한 인생>은 어쩌면 우리의 이 지루한 삶처럼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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