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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도서] 설계자들

김언수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김언수, [설계자들], 문학동네, 2010.

  소설 [뜨거운 피](문학동네, 2016.)를 아주 재미있게 읽어, 이어서 두 번째로 읽은 김언수의 작품이다. 띠지를 보니 "누가, 너에게, 설계를, 가르쳤지?"와 "언제나 핵심은 총을 쏜 자가 아니라 총을 쏜 자 뒤에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국내 소설로는 드물게(?) 청부살인을 소재로 하는데, 영화 <회사원>(2012.)이 연상되기도 하고...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었다.

  래생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아니라면, 쓰레기통에서 태어났거나.(p.35)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생각이냐?"(p.38)

  주인공의 이름은 래생(來生)이다. 한자의 의미하고는 다르게 그는 청부살인을 한다. 태어난 다음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어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에서 자랐다. 개들의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암살자, 청부업자, 추적자, 사냥꾼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는 영감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고, 죽이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털보가 카트를 끌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느리고 낙천적인 발걸음. 욕심도 조바심도 내지 않는 털보의 발걸음이 래생은 늘 부러웠다. 털보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큰 건수가 있다고 섣부르게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이 작은 애완동물 화장장을 굴리면서 조금씩 돈을 번다. 시체를 태워서 털보는 두 딸을 키웠다. 큰 딸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다. "적게 먹어야 오래가지. 애들 뒷바라지하려면 몇 년은 더 버텨야 하는데." 털보는 무서움을 탄다. 돈이 좀 급하다고 찜찜한 물건을 받는 일도 없다. 그래서 평균수명이 턱없이 짧은 이 바닥에서 털보가 오래 버티고 있는 것이다.(p.45-46)

  털보네 애완동물 화장장은 밤에는 타깃이 되어 죽은 시체를 처리하는 곳이다. 시신을 은밀하게 화장하기 원하는 청부업자 대부분은 이곳을 이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털보는 죽이고 은폐하는 일을 하면서 두 딸을 키웠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를 살리고 키우는 일을 한다. 일상적이면서 뭔가 내막이 있는 설정이 돋보이는데,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상황부여는 매우 특이하면서 인상적이다.

  설계자들에게 용병과 암살자들은 일회용 건전지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들에게 늙은 자객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설계자들에게 늙은 자객이란 그저 불필요한 정보와 증거를 잔뜩 품고 있는 곤혹스런 물집 같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방전된 일회용 건전지를 소중하게 보관하지 않는다.(p.55)

  살인청부업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독재와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전에는 눈엣가시 같은 사람을 지프에 태워 남산으로 끌고 간 뒤에 두들겨 패도 찍소리 못하던 무지한 시대였다. 하지만 자신을 도덕적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같은 일은 사라졌다. 그래도 누군가를 죽여야 하지 않는가... 살인청부는 국가가 설계자를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기업형 암살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는데, 너구리 영감은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다른 설계자가 있을 거고.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 래생이 말했다.

  "그 의자에도 분명 누군가가 앉아 있겠지."(p.93-94)

  암살자의 뒤에는 언제나 설계자가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어서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한다. 암살자는 늘 설계대로 움직여야 한다. 설계를 변경하거나 설계대로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질 수 있다. 그래서 정해진 규칙을 어기면 응분의 대가가 따르는데, 암살자만 따로 처리하는 청소부가 있다. 그런데 래생의 변기에서 소형 폭발물이 발견된다. 그는 설계된 것일까?

  래생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불어 살아야지.' 한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마도 한자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 진짜 사내는 빈속에 잭 다니엘을 처마시고, 변기 위에서 고양이처럼 울다가, 부엌칼을 손에 쥔 채 죽는 것이다.(p.102)

  하지만 이 설계의 출발지가 어디인지. 이 설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자도 이 설계의 정확한 실체를 모를 것이다. 설계자들의 세계에선 아무도 필요 이상의 정보를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보를 많이 가질수록 표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무지해야 한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라야 한다.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데 무엇하러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고민하겠는가. 그러니 모두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울타리 속에서만 꼼지락거리며 일을 한다. 그 작은 울타리들이 모여서 터무니없이 크고 복잡한 커넥션과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힌 설계가 탄생한다.(p.126-127)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에는 창으로 찔린 자국이 있지. 창녀와 포주는 농부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직업이고,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아들이 한 일도 살인이었지.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건 예술이건 종교건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것이 인간이란 종이야. 인간이라는 종은 처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거지. 살인자의 편에 기생하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죽이거나.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인류는 그런 아포토시스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야. 그게 이 세계의 참모습이지.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결국 누군가는 포주와 창녀와 청부업자 노릇을 하며 살겠지. 웃기게도 그래야 세상이라는 수레바퀴가 또 돌아가는 거거."(p.212-213)

  "사는 것도 다 그래. 인생 뭐 별거 있나? 이렇게 냄새나고 온갖 추잡하고 불결한 것들과 얽히고설키고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하지만 막상 먹어보면 그런대로 먹고살 만해. 때때로 맛도 있고. 어떤가? 이쯤에서 돌아서면 난 참 좋을 것 같은데, 이따금 여기 들려서 소주나 같이 한잔하고." 희수 영감이 타이르듯 말했다.

  "칼 뽑고 나왔습니다." 래생이 비장한 톤으로 말했다.(p.318)

  글을 쓰다 보니 [뜨거운 피]와 [설계자들]은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늙은 보스와 평생 그의 손과 발이 되어 따르는 주인공, 시대의 변화로 내리막을 걷는 조직과 주인공의 인생, 거대한 경쟁 조직의 등장과 압박, 주인공은 뛰어난 실력을 지녔고 그가 상대하는 인물은 더 뛰어난 실력자이고,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나와 독립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머무를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고... 또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이 아니던가... 삶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또 모든 것을 설계로 보기에는 삶이 피로하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숨은 세력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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