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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log.yes24.com/document/7710956

이신은 벼루 속 먹물 같은 마당으로부터 눈길을 거두고 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엄습했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객의 본능이 살아났다. 뭔가 이상했다.

김흥진의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흥진이 곯아떨어진 것인가. 하긴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을 것이다. 연일 그를 죽이라는 상소가 장마철 소나기처럼 쏟아지니 누군들 견딜 수 있을까. 더욱이 김흥진보다 책임이 덜한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이 자진自盡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 아니던가.

임금과 사돈 간인 장신은 형 장유와 함께 계해년 거병에 참여해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후세에 사람들이 인조반정이라고 일컫는 그날의 거의擧義는 의리를 명분으로 삼았다. 광해군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형과 동생들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저질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가 후금(후일 청나라)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했는데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서인들은 광해가 불효자식이자 의리를 저버린 군주라 비난하면서 일어섰다.

장신은 반정의 공으로 황해도감사ㆍ평안도감사를 지냈고, 병자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12월 호란을 당한 후 강도방위를 맡았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강화도 총책임자였던 검찰사 김흥진 등과 함께 왕실과 노모, 아내까지 버리고 먼저 도망해버렸다.

난이 끝나자 조정신료들을 비롯하여 저잣거리의 민심도 장신을 참해야 마땅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처음 장신은 공신이라는 그늘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나 싶었지만 그것은 사태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었다. 임금은 그의 죄를 물었고, 사약을 내려 마땅하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해 자진하게 하는 것으로 사태를 매듭지었다.

장신의 죽음으로 난감해진 것은 김흥진이었다. 장신이 죽은 마당에 그보다 더 책임이 큰 자리에서 똑같은 죄를 저지른 김흥진이 무사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그에게는 장신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죄가 하나 더 있었으니, 자신의 실책으로 수많은 백성을 청나라 포로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민심이 김흥진에게 그토록 가혹한 데에는 나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폭풍우가 거세도 언젠가는 그치는 법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흥진이 믿는 것은 하늘의 이치가 아니라 부친인 영의정 김환이었다. 그가 정승으로 버티고 있는 한 그의 면전에서 아들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주청할 대신은 없을 터였다. 김흥진은 사대문 밖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한껏 몸을 사리고 자신을 탄핵하는 소리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장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심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비단 민심만이 아니었다. 호란으로 아내와 첩, 아들과 딸을 잃은 사대부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마당에 장신 따위가 자결한 것으로 누그러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신은 귀를 세워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찾았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코를 고는 소리도, 가끔 몸을 뒤척이는 소리도 없었다. 물론 지극히 조용히 잠을 자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이신의 예민한 귀에 숨소리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이신은 조용히 방문을 밀었다. 이불을 걷어찬 채 누워 있는 희끄무레한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대감, 이신이오.”

이신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김흥진의 목숨을 반드시 끊어놓고 말겠다는 다짐이었다. 이신이 담장을 넘어올 때 김흥진은 이미 산 목숨이 아니었으니 저승길로 떠나는 마당에 자신을 찾아온 자객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치禮治의 나라 조선에서 대감은 정이품 한성판윤까지 지내지 않았는가.

이신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김흥진을 다시 불러보았다.

“김흥진 대감…….”

이신은 말을 하다 말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흐르는 피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대감, 괜찮으십니까?”

이신은 방 안을 살폈다. 한가운데 대감이 널브러져 있고, 주변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신은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직 따뜻했지만 맥박은 뛰지 않았다. 몸을 뒤집자 명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확하고 단호한 칼놀림이었다. 김흥진이 어둠 속에서 놈의 모습을 본 순간, 칼날은 이미 가슴 아래를 뚫고 들어간 뒤였을 것이다. 아니면 놈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황천길로 떠났을 수도 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몸의 중심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베어버린 깔끔함. 숙련된 전문가의 솜씨였다.

이 정도 솜씨를 가진 자라면 흔적 같은 것은 남기지 않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신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내 선화의 병풍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다른 병풍이 자리를 잡았다. 역시 산수화였다. 아내의 그림은 오래전에 이신의 방으로 옮겨졌다.

이신은 바닥에 흐른 피를 만져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았다. 놈이 자리를 뜬 지 얼마 안 됐다. 이신은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웠다. 풀숲에 숨어 있는 들쥐를 잡아채는 매의 눈처럼 마음만 먹으면 어떤 소리든 포착해내는 이신의 청력은,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알 수 없으나 어린 시절부터 지닌 능력이었다.

먼저 들려온 것은 여전히 마당을 서성이는 바람 소리였다. 이어 댓잎 소리, 하인들이 뒤척이는 소리, 이를 가는 소리, 멀리서 강이 출렁이며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가볍게 흙을 차고 오르는 발, 이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파장이 이신의 귀를 울렸다. 놈이다.

이신은 몸을 날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문짝이 마루로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이신의 몸은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이어 이신은 바람을 뚫고 대숲으로 몸을 날렸다. 만주와 요동의 광야에서 적을 쫓던 때를 떠올리며 이신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면 적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가 오히려 정확하게 가늠이 되었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넘어져도 좋았고,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도 좋았다. 그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날마다 죽을 가능성이 따뜻한 잠자리에 들 가능성보다 훨씬 높았다.

그는 적의 창에, 칼에, 화살에, 총알에, 포탄에 목숨을 잃고 먼저 떠난 전우들의 뒤를 따라갈 줄 알았다. 그래서 구천이 아니라 더 넓은 초원, 몽골의 사막, 중원을 떠도는 귀신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얄궂은 운명은 끝내 그곳에서 이신을 살려냈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그 운명은 이신을 마침내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으로 데려왔다.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으로.

단검 하나가 날아와 이신의 귓가를 스쳤다. 표적에 닿지 못한 단검은 댓줄기에 꽂혔다. 칼을 맞은 대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힘이 좋구나.”

이신은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말했다. 놈은 대숲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놈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면 어둠이 사라질 때까지 녀석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놈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이신의 허점을 찾아 칼을 겨누었다. 이신의 귀가 그것을 알아챘다.

이신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댓줄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칼을 놓아라. 살려주겠다.”

진심이었다. 김흥진을 죽였다는 이유로 놈의 목숨을 빼앗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신은 놈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며 다시 대를 칼로 베었다.

“누가 시킨 짓이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단단하게 한 걸음 내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자는 뜻이었다. 이신은 힘주어 칼을 거머쥐었다.

후드득, 댓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대 사이에서 날아올랐다. 이신은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면서 놈의 칼을 막았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퍼져나갔다.

놀라운 힘이었다. 전쟁터라면 갑옷과 투구를 뚫고 상대의 뼈까지 여지없이 베어버릴 위력이었다. 낯선 칼놀림이었다. 조선의 검술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법이라기보다는 예법이나 무도에 가깝다. 즉 힘보다는 정확도와 민첩성을 더 중시했다. 하지만 놈은 이신의 몸을 반쪽으로 쪼갤 듯 날아왔다. 언뜻 보면 수가 없는 칼이다. 하지만 아니다. 오랫동안 칼만 잡아온 능수능란한 고수가 분명했다. 온몸의 기운을 칼끝에 싣고도 칼을 자기 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솜씨가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이신은 몸과 칼의 위치를 바로잡으면서 상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놈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날아올랐다. 댓줄기를 발로 딛고 튀어 오르며 그 반동을 이용해 이신을 향해 칼을 겨누려 함이었다. 이신은 한껏 몸을 낮추며 대의 밑동을 베어버렸다. 댓줄기들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미처 대에서 발을 떼기도 전에 놈은 균형을 잃고 허공에서 허둥거렸다. 이신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신의 칼이 놈의 옷자락을 가르면서 가슴을 스쳤다. 경고. 말하지 않아도 놈은 알 터였다.

“다시 묻겠다. 누가 보내서 왔느냐.”

놈은 대답 대신 이신에게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칼날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훈련된 자객은 칼보다 입을 먼저 단속한다. 호락호락 하리라곤예상하지 않았지만 칼까지 맞은 몸으로 호흡 한 번 길게 뱉을 새도 없이 달려드는 기세에 이신은 순간 감동하기까지 했다. 너의 주인은 좋은 자객을 두었구나. 누구냐, 그는.

이신은 그를 살려주고 싶었다. 그를 대신해서 김흥진을 죽여주었으니 사례를 달라 해도 양껏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신이 조선에서 상대하려는 자는 저런 자객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 사대부들이었다. 그러니 저자에게 냉혹할 이유가 없었다. 이 자객은 심지가 굳세고 임무도 알며 그 책임이 무거운 줄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알까? 그러나 번득이는 칼 아래서 그런 상념은 어리석음이었다. 칼을 들고 김흥진의 담장을 넘어올 때는 이신이든, 놈이든 누구라도 혼자 살아 돌아가든지, 아니면 함께 죽어야 했다.

이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달리 택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여지없이 살아온 자신의 지난 삶에 그는 피로를 느꼈다. 불면과 악몽으로 이어진 새벽과 느닷없이 벌어진 칼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하자.

“고통 없이 끝내주마.”

이신은 서너 발 떨어진 놈을 향해 말했다. 몇 번의 합을 겨루는 사이 자객은 입안 가득 독을 머금고 머리를 쳐든 뱀으로 변해 있었다. 놈은 어금니를 꽉 다물고 칼을 그러쥐었다.

그때였다.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짐승인가? 아니다,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다. 침착한 발걸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투리를 신은 소리가 아닌 걸로 보아 김흥진의 노비는 아닌 듯 했다. 분명 가죽신을 신은 발걸음인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리가 독특했다.

또 다른 자객일까? 만약 이놈과 한패라면 등 뒤를 조심해야 할 터. 그러나 다가오던 발소리는 더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다. 이상했다. 왜 같이 덤비지 않는 것일까. 만약 숨어 있는 자가 이놈과 한 패가 아니라면 김흥진을 죽이기 위해 무관한 두 명의 자객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왔다는 말이 된다. 이신까지 합하면 세 명의 자객이 동시에 만났다는 것인데, 그럴 확률은 낮았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보다 대숲에 숨어 있는 자는 놈을 노리는 것일까, 이신을 노리는 것일까.

“누구냐!”

이신은 숨은 자객의 허를 찌르기 위해 칼로 대를 베어버렸다. 그러자 그 순간 이신과 겨루던 놈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신은 몸을 굴려 흙을 차고 튀어올라 놈의 등 뒤로 뛰어내렸다. 단칼에 끝내고 대숲에 숨은 자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놈은 발로 흙을 차 이신의 눈에 뿌렸다. 순간, 당했다고 생각한 이신은 눈을 감으며 칼을 휘둘렀다. 칼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놈의 몸뚱어리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단검이 놈의 목에 정확하게 박혀 있었다. 이신은 서둘러 놈의 목에서 칼을 뽑았다. 피가 뿜어져나왔다. 피가 아깝구나……. 이신은 부릅뜬 채 멈추어버린 놈의 눈동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밭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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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저
비채 | 201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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