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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도서] 17일

롤라 라퐁 저/이재형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일종의 장르소설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17일」.

장르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표지! 저 표지 속에 있는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해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실화, ‘퍼트리샤 허스트’사건에 대해선 1도 아는 바가 없었기에, 해당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을 위해서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해본건 안비밀.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기에, 그 사건에 대한 결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이미 스포일러가 넘쳐나고, 심지어 그 사건의 중심인 퍼트리샤 허스트는 지금까지도 멀쩡히 살아있는 인물이다. 장르소설의 백미는 결말로 치닫는 과정과 반전인데, 이미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다 알려진 상황에서 어떻게 소설을 집필한것일까? 그게 참으로 궁금했다.

소설 속 주인공 진 네베바. 미국인이었던 그녀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변호를 위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SLA에게 납치되었던 그녀가, 왜 SLA의 멤버가 되어 돌아왔는지, 은행테러 주동자가 되었는지, 그녀가 SLA에게 납치된 후 세뇌되었던게 아닌지, 혹은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인해 SLA멤버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러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그녀는 SLA에 세뇌되었었기 때문에 테러를 한 것이니 그녀는 무죄다’ 라는 보고서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각종 자료 수집을 위해 직원 프랑스인 비올렌을 고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내가 생각하기에 네 해석은 좀 편협한 것 같아. 너는 실제 결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어. 이 사건들이 왜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은 안해 보았니?" p 042

그저 순수하고, 맑게, 큰 문제 없이 살아온 여학생 비올렌. 그런 비올렌이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 사건’에 관한 각종 기록과 기사를 스크랩하고 정리하는 일은, 진 네베바의 성미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속에서 그려진 진 네베바는 일종의 아나키스트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처음엔 페미니스트처럼 보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두 까는 진 네베바를 보면서 페미니스트보단 아나키스트 쪽에 가까워보였다).

진에 비올렌에게 1968년 봄에 대해 물어봤을 때, 비올렌은 자신이 어렸을 때 눈으로 본 사실만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진은 그런 비올렌을 다그치며 ‘편협’하다고 했다. 물론 진의 말처럼 실제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해 아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비올렌이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치않고, 무작정 “너의 의견은 편협해”라고 대답하는건, 학생을 가르쳤던 교수로써도, 어른으로써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이건 내 가치관이 이러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야한다고 강요를 하는 것 처럼 보인달까? 엄연히 살아온 세대가 다른 비올렌의 입장에선,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면 모를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비올렌에 대한 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큰 고생없이 자라온 비올렌에게, 미국을 동경했던 비올렌에게 이런 진의 모습은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을것이고, 대단해보였을 것이다. 어린 여학생들이 커리어우먼을 보며 동경하는 뭐 그런거랄까? 그렇게 비올렌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진의 가치관에 물들며 진에게 ‘세뇌’를 당하게 된다.

퍼트리샤가 SLA에 납치된 후, 그들에게 ‘세뇌’를 당했다는 보고서를 써야할 진이, 정작 자신 스스로가 또 다른 사람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참 아이러니 했다.

퍼트리샤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구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모든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즉 은퇴자 카드나 실업자 카드, 퇴역 군인 카드, 장애인 카드, 전 재소자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질 좋은 육류와 채소, 유제품을 1인당 70달러어치씩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받아야 할 식량을 못 받게 될 경우 우리가 알 수 있게 길거리와 버스정류장, 영화관에서 불만을 토로하라. p 061

프랑스인 비올렌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메리카 드림’같은 그런 동경이랄까? 그렇게 동경하는 미국에서 퍼트리샤 허스트라는 여성이 한 무장단체에 납치되었다. 그런데 퍼트리샤를 납치한 그 무장단체가 요구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있는 빈민들을 구호해달라는 거였다. 그렇게나 동경하던 미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심지어 그 빈민을 정부에선 돌봐주지 않는 반면, 테러를 일으키는 무장단체가 오히려 빈민들을 돕자고 하다니! 이렇게 모순적인 미국의 모습은, 미국을 동경하던 비올렌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뿐만인가? 진은 비올렌에게 1704년 아메리카 원주민 습격사건을 이야기 하며, 문명화된 미국이 원주민의 터전을 파괴하고 약탈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분노한 원주민들이 미국 여성들을 납치하였다. 이후 풀려난 미국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자력으로 원주민들에게 탈출했던 여성들은 원주민에게 몸을 판건 아닌지 의심을 받았고, 협상으로 풀려난 여성들에겐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는 모욕만 남았다.

하지만 미국은 앞뒤를 자르고, 그저 원주민들이 문명화된 미국을 습격했다는 사실, 그런 원주민들이 미국의 여성들을 인질로 잡아갔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자, 이 사건은 비올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문명화된 미국이 원주민의 터전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건 폭력이 아닌걸까? 풀려난 인질들에 대한 미국 여론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니었던걸까?

또 하나, 무장단체에 잡혀있던 언론재벌의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 그녀는 어땠을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퍼트리샤 허스트는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자랐을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모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고, 약혼자가 성관계를 원할 때마다 그에 부응하며 살았다. 그런 그녀가 납치되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기를 납치한 사람들 중 자기 또래의 여자들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이 미국의 빈민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도와야한다고 했을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SLA는 뒤집힌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지요. 즉 백만장자인 허스트 부부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었고, 빈민구호협회들은 한 무장투쟁단체의 주도적 행동에 쌍수를 들어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p 083

이제 그녀는 인정한다. 납치야말로 그녀에게는 하나의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p 118

"젊은 미국인이라는 것은 곧 베트남에서 죽은 친구들의 수를 세는 것을, 만일 흑인이라면 경찰의 검문 때 미처 신분증을 내밀 겨를도 없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는 것을 의미하지. 또한 자기 부모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정부의 계속되는 실패를 막지도 못하고,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당이나 이념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p150

퍼트리샤 허스트의 부모는 SLA가 요구하는 대로 빈민구제를 했고, 미국 국민들은 환호했다. 오히려 SLA를 잡으려던 경찰들을 문전박대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SLA가 퍼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하고, 빈민구호를 외치던 그 시기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냉전시대. SLA처럼 급진적인 단체는 미국에겐 암덩어리였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더욱 그랬다.

미국 정부가, 경찰이 타니아로 개명한 퍼트리샤 허스트와 SLA를 소탕하기위해 급습했던 그날은 또 어땠나. SLA가 숨어있다고, 곧 소탕을 하겠다며, 전국으로 생방송을 하던 그 모습. 그 건물안에 민간인이 있건 말건 총질을 하던 그 모습은 또 어땠나. 그 건물이 재벌들이 사는 건물이었다면, 과연 경찰들이 그렇게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소개작전을 펼쳤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SLA소탕작전은 미국이 그만큼 빈부격차가 심하고, 빈민들의 처우가 어떤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저는 제 부모님의 신중한 삶을, 그들의 비겁함을 혐오했어요. 그들이 노숙인에게 동전 한 닢 던져줄 때의 그 인색한 호의를, 그들이 '우린 헛된 꿈 같은 건 일절 꾸지 않아'라고 뻐기듯 말할 때의 그(씩씩한 기상으로 위장된) 씁쓸한 체념을 혐오했어요. 저는 더 이상 지금의 나로 남아있지 않을 거에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비올렌에게 털어놓았습니다. p 196

비올렌은 이러한 미국의 민낯을 보며, 더욱 진에게 빠져들었다. 비올렌은 또 다른 진 네베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미 중년이 된 비올렌은 동네 여자아이를 은연중에 자기처럼 세뇌시켜갔다. 진의 행동과 언사는 비올렌을 세뇌시켰고, 진의 모든것을 기록으로 남긴 비올렌은 그 노트를 한 소녀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소녀 역시 바뀌었다.

진 네베바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무죄를 위해, 그녀가 무장단체에게 ‘세뇌’ 되었다고 증명하는 보고서를 쓰려 했으나, 은연중에 퍼트리샤에게 공감하게 되었고, 그녀의 보고서는 다른 방향으로 쓰여졌다. 아니 쓰여졌을 것이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재판에 그녀의 보고서가 채용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도 진은 퍼트리샤가 SLA로 전향한 사실에 공감했을 것이고, 그녀가 SLA로 전향한 이유는 세뇌가 아니라, 다름아닌 미국의 문제라고 썼을 것이다.

그렇게 퍼트리샤에게 공감한 진의 영향은 비올렌과 어린 소녀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과연 비올렌과 그 어린 소녀는 정말 퍼트리샤에게 공감을 하고 싶었을까? 그녀들은 진 네베바같은 가치관을 원했을까? 그녀들이 원한건 정말 진 네베바 같은 가치관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가치관을 갖고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진 네베바는 그녀들의 성장기회를 박탈시킨 것이다.

그렇게 진에게 세뇌아닌 세뇌를 당한 비올렌과 여자아이는 퍼트리샤 허스트의 재판을 어떻게 보았을까?

"퍼트리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차고 넘치지요. 하지만 그녀는 부자였기 때문에 이번 재판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거에요. 허스트가는 퍼트리샤가 석방되도록 애썼고 1979년에는 캠페인까지 해서 성공을 거두었어요. 카터가 그녀를 특별 사면해주고, 클린턴이 복권시켰지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미국에서 이런 특혜를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중략) 퍼트리샤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10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와서 어린아이처럼 어쩔줄 몰라 하는 그녀의 미소와 '용서해주세요'라고 쓰인 티셔츠를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겼지요. 말하자면 퍼트리샤는 타니아를 땅에 묻는 데 동의한겅요. " p 307

SLA로 전향하며 타이아가 되었던 퍼트리샤 허스트는, 타니아를 버렸다. 그녀는 다시 언론재벌가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로 돌아갔다. 심지어 미국은 다른 SLA 단원들은 잔인에게 죽이기도 했지만, 퍼트리샤 허스트만은 달랐다.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지미 카터가 구원을 요청했고, 클린턴이 복권시켰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생겨난 무장단체 SLA. 빈민을 구호하라며 총을 들었던 SLA. 물론 그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민간인을 납치하고, 민간인을 살해한 그 순간부터 SLA는 그저 그럼 범죄자일뿐이니까. 다만 그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극심한 양극화, 극심한 빈부격차. SLA이 소탕된 이후에도 이런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언론 재벌 상속녀였던 퍼트리샤 허스트는 유명인사들이 구원을 요청했고, 실제로 복권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타니아로 개명하고, SLA로 전향했던 그 시절은 없었던 것 마냥.

이 소설은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한 장르소설이 맞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분명 이 소설은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저자는 서로 다른 세대를 산 세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분명 같은 시간속에 살았고, 만날 수 있던 시간속에 살았던 세 여성이지만,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살아온 나이대가 달랐기 때문에, 그녀들의 가치관은 다 달랐다. 그 세 여성이 이 실화 속 주인공인 ‘퍼트리샤 허스트’가 SLA로 전향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각종 사회문제를 짚어내었다.

우리는 이런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 눈 앞에 있는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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